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프리드리히 니체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4:21
1870년경의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h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다. 1844년 뢰켄에서 태어났으며, 1900년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하며, 포스트모더니즘실존주의 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생애

출생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프로이센 작센의 작은 마을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따온 것인데, 나중에 가운데 글자인 빌헬름을 뺀다.

그에 이어서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남동생 루트비히 요셉이 태어난다. 허나 니체의 아버지는 니체가 5세(1849년) 때 뇌질환으로 죽고 그 후년(1850년)에는 남동생이 죽어 엄마,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 댁에서 컸다. 그 후에는 (1856년) 할머니가 죽어서 그들의 집에 들어갔다. 여담으로장 폴 샤르트르도 비슷하게 어린 시기를 보냈다.

학업

186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으며,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를 다녔다. 1854년 나움부르크에 있는 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 명성이 있는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 문학고대 로마 문학에 대해서 중요한 입문 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1835~1836년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철학 공부와 군복무

1865년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저서들을 알게 되었고, 1866년에는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저서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을 읽게 되며, 니체의 세계에서 이 두 저서는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1867년 니체는 군대를 자원하여, 1867년 10월 군에 입대했다. 그는 포병으로 근무 하다가 1868년 3월 말을 타던 중에 사고를 당해서, 군복무를 중단했다.

바그너와의 만남

그 이후 그는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1868년 10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에 우연히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였고 이에 깊이 감동하였다.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1868년 11월 8일 브로크하우스의 집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를 처음으로 만난다.

바젤 대학교 교수 니체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

24세때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 뒤 그는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다. (죽을 때까지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보불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발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 제국의 성립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박사 학위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연

니체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 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여러 강연회에 연사로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저술 활동

1872년 니체는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리스 해석을 전개하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현대에서 부흥시킨 것이 바그너의 음악임을 논하여 친구 바그너의 신예술운동을 지원하려고 한 것이다.

1873년~1876년 반시대적 고찰 이 책은 보불전쟁 이후 거만해진 독일 문학계를 비판한다.

바그너와의 관계

니체는 1868년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다. 그는 바그너와 그 부인에게 감탄하곤 했다. 또한 니체가 바젤에 있을 당시 매우 긴밀한 관계였으며, 1876년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초대하였으나 바그너 숭배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나갔고, 니체는 병가를 얻어 소렌토에서 바그너와 겨울을 보냈다. 그 뒤 바그너의 대본 《파르치발》에 대하여 악평한 뒤 기독교적이고 국수주의적으로 변한 바그너에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증정하고 결별했다.

퇴직

1879년 이후 니체는 건강상의 악화와 자유로운 철학의 정립을 위해 35세에 바젤 대학교를 퇴직하고, 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가 요양과 집필에 전념했다.

철학자 니체

퇴직 후

1880년 니체는 페터 가스터와 함께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아침노을》을 집필한다. 그리고 이듬해 7월에 이를 출간하고, 실스 마리아 에서 산책 중에 영혼회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다.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집필 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 (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1882년즐거운 학문》 집필. 같은 해 3월시칠리아를 여행한다. 로마에서 뮤즈 살로메를 처음 만나고, 그녀에게 빠진 니체는 두 차례에 걸쳐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라팔로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하고, 1883년부터 집필에 착수한다.

1883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출간한다. 이 책은 니체 철학을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1884년 1월 니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를 집필한다. 그리고 8월 하인리히 폰 슈타인이 니체를 방문한다. 그다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집필했다. 1885년 2월에 완성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종부는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자비로 출판한다.

1886년8월선악의 저편》을 자비로 출간한다. 이 책은 니체가 1881년부터 1886년까지 기록했던 아이디어 노트를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실체론 비판, 가치의 전도 및 자유롭고 창조적인 미래 철학의 구상이 그 내용이다.

1887년, 니체의 건강이 나빠지고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듣자 우울증에 빠졌다. 같은 해 11월에 《도덕의 계보》를 출간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부터 《즐거운 학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전개한 도덕 개념의 종류와 기원을 종합적으로 비판하면서 《권력에의 의지》 철학에 대한 체계를 완성한다.

1888년에 《권력에의 의지》를 집필하고, 《바그너의 경우》를 출간한다.

발작

1889년 1월에 카를로 알베르트 광장에서 말을 감싸안으면서 발작을 일으킨다. 그 후 바젤로 옮겨져 정신병원에서 보내다가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해 《우상의 황혼 반 그리스도》, 《니체 대 바그너》, 《이 사람을 보라》를 출간한다.

1897년 어머니가 간호하다가 어머니가 죽자 여동생이 간호한다. 여동생이 니체 문서보관소를 세운다. 그리고 페터가스트의 니체 전집을 이어받아 편찬하고 유작들을 엮어 《권력에의 의지》를 1901년에 출간했는데 이는 1882년부터 1888년까지 쓰인 니체의 유작이었다. 그러나 페터가스트와 여동생의 작업은 니체의 뜻과는 다르게 파시즘적인 성향이 보였다. 결국 후에는 80년대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재편찬되었다.

사상

니체는 기존의 사상, 특히 형이상학과 맹신되던 도덕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그의 저서인 《선악의 저편》및 《도덕의 계보》에 잘 저술되어 있다. 니체는 스스로 비도덕주의자를 자처했으며, 종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사상가였다.

삶을 비하하는 사상들을 데카당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삶을 신의 창작물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사상도 그런 이유로 싫어했다. 이는 유명한 명제로 이어진다.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는 유명하다. 항상 세계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가치에 대한 상실을 뜻한다. 이는 허무주의의 발판이며, 동시에 삶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나치의 의도적인 왜곡으로 파시즘의 선봉이라는 오해를 받았으나, 니체는 자주 집단주의, 대중, 국가와 같은 반개인주의적 요소가 반영되어있거나 그러한 요소가 극단화되기 쉬운 구조들을 여러 차례 비판한 바가 있다.

가족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니체는 남편인 푀르스터의 영향을 받아 극우 파시스트 인종주의자이며, 니체와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심지어 니체는 영원회귀가 아닌 근거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니체가 말한 초인은 당신을 염두해두고 했던 말이라고도 발언했다.

저작

어록

신은 죽었다.

나를 죽게 하지 않은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