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최근 편집: 2018년 6월 7일 (목) 17:19
Yonghokim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6월 7일 (목) 17:19 판 (태평양 전쟁)

칠레는 남미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이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을 두고 북쪽 페루 국경부터 남극해까지 약 4,000km 에 달하는 긴 길이에 동서로는 150km를 넘지 않는 짧은 너비의 특이한 형태의 국토를 가졌다.

수도는 산티아고, 화폐는 페소이며 인구는 1,700만명이다. 남미에서 전통적으로 멕시코, 브라질, 아르젠티나와 함께 경제가 활성화 된 축에 속하고, 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안정 되어있으며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독재자 피노체트 시절부터 소위 "시카고 보이즈"로 불리는 시카고 신자유주의 학파를 적극 수용하여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비롯한 각종 산업의 민영화가 진행되었다.

거의 3,000명의 한인이 칠레에 살고 있으며 상당수가 의류 도매, 소매업에 종사한다. (의류업 이야기는 1990년대 정보) 절반이 넘는 수가 수도 산티아고에 거주하고 있으며, 산티아고의 Comuna Recoleta 내에 위치한 Patronato 동네에 가면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 식당들과 교회, 성당 등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

칠레의 역사는 크게 스페인 조우 이전, 식민지 시대, 독립, 공화국, 피노체트 독재, 민주화 이후로 구분 할 수 있다.

식민지

스페인 침략자들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지역별로 다양한 원주민 사회가 정착 해 살고 있었다. 1500년대에 스페인의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발견 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현 산티아고의 위치에 처음 정착촌을 세운다. 이후 칠레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체제를 설립하지만, 황금 노다지인 북쪽 페루 부왕국령과 비교해 금, 은이 많지 않은 편이었기에 정복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편이었다. 칠레 남부 일대에 살고 있던 마푸체족은 북쪽 부족들보다 더 강경하게 항전했으며, 기습적인 스페인 촌락 습격 및 방화 등의 전술로 300년 넘게 스페인을 괴롭혔다. 칠레 남부의 콘셉시온, 치쟌 등의 도시는 수 차례 마푸체의 기습 공격에 당해 방화 된 후 다시 재건되는 일을 반복했으며, 스페인은 칠레가 독립 할 때까지 콘셉시온 이남을 지배하지 못했다. 마푸체는 지휘 체계가 분산되어 있어 잉카제국을 정복 할 때 처럼 황제를 잡는다고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고,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말이나 철기 등의 무기를 빠르게 습득해서 전투에 활용했다. 마푸체의 항전을 이끈 리더 중 Caupolicán, Lautaro, Colo-Colo 가 유명했다. (Colo-Colo 는 오늘날 칠레 국내 축구 리그에서 1위를 다투는 팀의 이름이 되었고, Caupolicán 은 상당 수 도시에서 큰 도로의 이름이 되었다.)

300년이 넘는 식민 시대를 거치며 이 지역에는 타 남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몇가지의 인종-계급적 계층이 자리잡게 된다. 스페인 출신 백인들은 독립이 무르익은 시점에서는 스페인 본토 출생 Peninsulares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생했다는.. 약간 비하적 뉘앙스도 포함), 칠레 출생 Criollos 으로 나뉘고, 그리고 백인-원주민 혼혈인 Mestizo, 원주민으로 구성되게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흑인 비율은 낮은 편이라 흑인과 나머지 혼혈 그룹인 Mulato (흑인-원주민 혼혈), Zambo (흑인-백인 혼혈)에 대한 인식은 많지 않다.

독립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으로 세우자 아직 프랑스의 군사력이 닿지 않던 식민지들은 일대에 시끄러워졌다. 독립 정국에서 다양한 계파와 영향력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했는데, 이 중에는 criollos 를 낮춰보는 peninsulares 들의 차별적 행보, 유럽 발 계몽주의의 영향, 프랑스 혁명의 경험을 통한 공화국에 대한 갈망, 미국 독립의 선례(그리고 미국과 영국 양국 스페인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남미의 독립운동을 물밑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세운 왕을 거부하며 망명중이던 왕족을 다시 왕정에 복귀하고자 하는 등 일부 서로 모순되는 세력들이 포함된다. (왕족 복귀를 표면적으로 내세우며 내부적으로는 독립을 꾀하던 일부 끄리오요들은 마지막까지 왕족 복귀를 표방하며 나폴레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스페인 본국과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칠레를 비롯하여 스페인 식민지 각지에서는 이런 다양한 성향의 끄리오요 백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선언을 하고, 이후 나폴레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스페인 본국에 식민지로의 복귀를 거부한다. 그후 스페인이 군대를 보내 칠레와 페루 등은 재정복당해 3년의 기간 동안 다시 식민지로 기능하게 된다. 칠레의 독립파는 스페인의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군대와 함께 다시 안데스 산맥을 넘어와 칠레, 페루, 볼리비아를 해방한다. 이후 독립파의 수장격인 베르다르도 오히긴스가 칠레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칠레는 1810년의 첫 독립과 재정복 이후 1818년의 두번째 독립이 있는 셈인데, 독립 기념 행사는 1818년의 독립일인 9월 18일에 열고 있다.

공화국 초기

칠레 정부는 이후 백인 끄리오요들이 지도층이 되어 여러 정당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개혁을 거듭하게 된다.

19세기 말엽 페루 남부 및 볼리비아 해안 일대의 해변과 섬들에 수백년간 쌓인 새 똥(구아노)이 고효율의 비료로 쓰일 수 있으며 아울러 인근에서 화약 제작에 쓰이는 초석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이를 둘러싸고 페루·볼리비아 연합과 칠레 사이의 영토 분쟁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당사국들은 이 전쟁을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른다. 침략 전쟁을 시작하고 승리한 칠레는 현재의 제1주, 제2주, 제3주에 해당하는 영토를 페루와 볼리비아에게서 빼앗았다. 이 전쟁을 통해 볼리비아는 유일한 해안 지역을 잃고 내륙국이 되었으며, 칠레는 구아노와 초석의 수출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이후 독일에서 대체제인 암모니아를 화학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하면서 구아노의 인기는 시들해졌으나, 이 일대에서 다시 대규모의 구리가 발견 되 당시 태동하던 전기의 도입과 맞물려, 전선의 재료인 구리 수출을 기반으로 다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칠레의 경제는 이후 구리 수출을 중심으로 개편되었으며, 구리 관련 산업이 국가 경제의 80%에 달했던 때도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악감정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전쟁 이후 빈국으로 전락하고 해안마저 박탈당한 볼리비아는 현재까지 바다에 맞닿는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피노체트

민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