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최근 편집: 2024년 5월 7일 (화)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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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자룡이다. 상산 출신이어서, '상산 조자룡'이라고도 일컬어지기도 한다.

본명인 조운보다도 성과 자를 합친 '조자룡'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형주에서 유비가 조조군에게 쫓길 때, 유비의 아들 아두(후주 유선)를 구하는 공을 세웠다.

==기타==1955년, 일본공산당일본 공산당 제 6회 전국 협의회(약칭 6전협)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일본 공산당은 이전의 일본 공산당 제 5회 전국 협의회(약칭 5전협)에서 결정되었던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하게 된다. 6전협은 이 전까지 일본에서 일어났던 무장투쟁 노선은 시기상조이자 극좌 모험주의로 평가했고, 이로서 분열되어 있던 당 내부 상황을 통합하기 위함이었다.[주 1]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당시 무장투쟁을 주로 담당하고 있던 급진파 학생들에게 심각한 동요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또한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의 강력한 개인숭배 대상이었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스탈린 격하운동), 같은 해에 소련이 사회주의의 국가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은 충격에 빠진다. 결국 일본 공산주의자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스탈린주의 비판에 참여하게 되고, 일본 공산당의 독단적인 방식과 소련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애초부터 소련은 일본 공산당에게 무장투쟁을 재촉한 주체였지만, 무장투쟁이 실패로 끝났을 때 일본 공산당도, 소련도, 그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일본 공산당을 대체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활동가들 사이에서 터져나왔고, 일본 공산당에서 이탈한 인원들이 모여서 1957년 1월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을 결성했고,[주 2] 같은해 12월 이를 모체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일본)을 결성하게 된다.

혁공동은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반스탈린주의를 기반으로 결성되었지만, 트로츠키를 어느정도까지 받아들일 것이냐를 두고 처음부터 이견이 많았다. 이로 인해 혁공동은 처음부터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애초부터 제 4 인터내셔널 통일서기국(당시에는 제4인터 국제서기국)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스트파(니시 쿄우지西京司, 오타 류太田竜)와 "트로츠키주의를 극복한다"고 주장하는 반스탈린주의파(구로다 간이치黒田寛一, 혼다 노부요시本多 延嘉)로 갈라져 있었고, 이들 사이의 내부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초기 혁공동은 주로 학생 중심이었고, 소수의 노동자가 참여한 이념서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급진적인 학생 활동가들은 공산당에서 탈당 또는 제명된 뒤 공산주의자 동맹(일본)[주 3] 결성하고 전학련 집행부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초기 혁공동이 급진적인 학생 멤버들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역량을 성장시키기 어려웠던 원인이 되었다.[주 4]

분열의 역사

혁공동 제1차 분열

1958년 7월, 제4 인터내셔널 5회 대회에 참석하고 귀국한 오타 류는 당시 제4 인터내셔널의 각국 지부가 행하고 있던 가입 전술일본 사회당에 시전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이 안건은 거부당했고 오타 류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도쿄 학예대학히비야 고등학교의 그룹을 이끌고 탈퇴한다. 이후 오타 류는 일본 트로츠키스트 동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그리고 이 조직은 원하던 대로 사회당에 가입 전술을 시행, 다수가 사회당에 입당한다.

혁공동 제2차 분열

1959년 1월,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를 공식화 한 구로다 간이치는 스스로 경시청 공안부에 일본 민주청년 동맹(약칭 민청)의 정보를 제공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각된다. 같은 해 8월 혁공동 제 1회 대회에서 "간첩행위라는 계급적 배신 행위"를 이유로, 구로다는 제명된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구로다와 함께 혁공동에서 혁명적 맑스주의자 그룹(RMG)을 형성하고 있던 혼다 노부요시(本多 延嘉) 일파가 구로다를 따라서 혁공동을 탈퇴한다. 이후 구로다 일파와 혼다 일파는 새롭게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를 결성한다.[주 5]

혁공동 제3차 분열

1963년 2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에서 "당 건설"과 "노동운동"에 관한 정책을 두고 또다시 분열이 시작된다. 결국 구로다파는 혁공동 전국위원회를 탈퇴하여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 주의파(약칭 혁마루, 카쿠마루파)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 혼다 노부요시를 위시한 세력은 혁공동 전국위원회의 조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중핵파라고 불리게 된다.

제4 인터내셔널

1965년 2월, 혁공동 중앙서기국 명의로 남아있던 니시 쿄우지파(혁공동 간사이파)는 오타 류의 파벌[주 6][주 7]과 통합하여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제4 인터내셔널 일본지부)를 결성한다. 그러나 오타 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치카와 미군 기지 돌입 투쟁"과[주 8] "한일 조약 비준 반대 투쟁"을 독단적으로 지도한 것으로 인해 총괄을 하게 되고, 결국 탈퇴하게 된다.


특징

* 일본에서 트로츠키주의는 1950년대가 될 때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1922년 일본 공산당이 창당했고, 이후 트로츠키의 저작이 약간 번역되어 출간되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은 치안유지법군국주의로 인해 공산주의 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은 일본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방식을 따르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에 트로츠키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가 되고,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실패가 계속되기 시작하면서, 또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트로츠키주의가 급 부상한 면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트로츠키주의는 시작부터 외국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외국의 트로츠키주의는 대부분 반코민테른 투쟁을 통해 성장했는데, 일본은 그런거 없이 소규모 서클로부터 출발했다.
* 이렇게 사상적, 활동상의 전통이 빈약해서인지, 혁공동은 결성부터 지금까지 우치게바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우치게바 항목을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조운을 자신의 첫사랑으로 꼽았다. 2014년 7월 4일 한국을 찾은 시진핑은 박근혜에게 조운 족자를 선물하였다.[1]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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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주경제(2014. 7. 6.). 시진핑, 박근혜 대통령에 조자룡 족자 선물한 이유 들어보니. (http://www.ajunews.com/view/20140706175438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