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최근 편집: 2017년 7월 28일 (금) 17:01
Larodi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7월 28일 (금) 17:01 판 (→‎사고 발생)

개요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경 소련의 체르노빌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사고 발생

사고 이전

체르노빌은 4개 원자로를 동시에 가동하는 원자력 발전소였다. 그 중 4호 원자로는 완공된 지 3년 된 새 시설이었다. 원자로는 우라늄 연료봉이 물을 데우면 그때 나온 수증기가 터빈을 돌려 전력이 생산되는 화석연료와 같은 원리를 취한다. 우라늄 1kg이 석탄 3000톤에 버금가는 에너지를 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986년 4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 유리 카르네프와 냉각수 펌프 관리자인 보리스 스톨리아추크는 자정부터 근무 교대에 들어갔다. 이날, 둘을 비롯한 야간 근무자들은 평소와는 다른 임무를 하달 받는다. 안전 검사를 시행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 이 검사는 비상시에 예비 디젤 발전기 투입 전까지 발전소가 작동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전에 이 검사를 진행하였을 때에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원자력 발전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수가 꼭 필요한데, 체르노빌의 냉각수 펌프는 원자로에 의해 돌아가는 터빈의 에너지로 작동했다. 따라서 원자로가 모종의 이유로 작동중지되었을 때 원자로가 폭발하지 않게 냉각수 펌프가 작동하려면 터빈이 돌아가야 했다. 예비 디젤 발전기는 발전소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출력에 다다르기까지 1분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터빈은 원자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에, 이날 실험의 요지는 원자로 작동중지 직전까지 공급된 에너지로 돌아가는 터빈의 관성이, 예비 발전기 작동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을 것인가?였다.

유리는 터빈실로 가 터빈을 살피고 수치를 읽은 뒤 검사 개시를 기다렸다. 보리스는 원자로에서 300m 떨어진 통제실에 있었고, 레오니드 토프투노프는 원자로 통제를 맡았다. 4월 26일 오전 12시 5분, 레오니드는 서서히 출력을 줄여갔다. 다음 20분간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2시 28분, 알 수 없는 이유로 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레오니드는 문제를 해결한다. 1시, 레오니드는 원자로가 안정됐다고 판단해 검사 준비 작업을 진행한다. 3분 뒤, 펌프를 관리하는 보리스의 차례가 왔다. 그가 두 보조펌프를 작동시키자 물이 원자로에 너무 빨리 주입된다. 이러면 물이 터빈을 돌릴 만큼 충분한 양의 수증기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균형이 어긋난다. 1시 19분, 레오니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자로 노심의 출력을 늘렸고, 뜨거워진 원자로는 터빈을 돌릴 수증기를 더 생성했다.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은 레오니드와 보리스는 검사 준비 작업을 계속했지만, 노심이 과열되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내 통제실은 터빈실의 유리에게 준비가 끝나 검사를 시작한다고 전달했다. 1시 23분, 운전원은 계획대로 터빈의 전원을 껐다. 그때 레오니드는 원자로의 노심 온도가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노심 헤드의 압력이 급속이 상승해 통제실에 경고음이 울렸다. 원자로를 담당한 레오니드는 원자로 비상 중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원자로 열 출력이 보통 수치의 100배(300,000MW) 이상 올라갔고 엄청난 열은 노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사고 발생

1시 24분, 4호기가 폭발한다. 2,000톤의 강철 지붕이 날아가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고방사성 연료 8톤이 하늘로 솟구쳤고, 이 어마어마한 방사성 물질은 대기 중에 퍼졌다. 터빈실의 지붕이 무너져내렸고 유리는 조종대 옆에 주저앉았다. 4호기 인근 운하에서 낚시를 하다가 폭발을 목격한 낚시꾼 표트르 톨스티아코프는 훗날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폭발이라는 말은 부정확하다. 꼭 화산폭발 같았다"고 회상했다.

사고 대처

사고 대처: 직후

폭발 4분만에 소방관 14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4호기의 화재를 막는 데에 14명은 역부족이었고, 이후 지원요청을 받고 100명이 더 도착했다. 전 세계적으로 회자될 핵 재앙 한 가운데에 자신들이 내던져졌다는 것을 아는 소방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소방관들은 속속 이상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개박살이 난 원자로가 계속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 동안, 소련 당국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당시는 소련과 서방세계가 대치하는 냉전 시기의 끝을 향해 가는 시기였기에[주 1] 고르바초프 서장은 재난을 숨겼다. 한편 소련 당국은 폭발 직후 자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소집한다. 사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융해되고 있는 노심 속으로 들어가는 미친 짓을 해야 했던 것이다.

사고 대처: 대피

발전소 직원 가족의 많은 수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리피야트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5만 명에 육박하는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비밀리에 대피시키기 위해 군을 소집하고 1,200대의 버스 수송대를 구성했다. 사고 발생 36시간 뒤, 프리피야트 주민들에게 안내 방송을 통해 첫 공식 정보가 전달된다.

동무들은 들으십시오
부적절한 방사능 문제가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일어나 임시 예방 차원에서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대피시킬 것입니다

주민들은 짐과 식량, 신분증과 현금을 챙겨 버스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는다. 원전 직원인 가족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도 예외는 없었다. 오후 2시, 대피가 시작되고 3시간 후 프리피야트는 텅 빈 유령도시가 되었다.3시간 만에 5만 명을 이송해 버리다니.. 이때의 버스와 트럭의 행렬이 15km나 되었다고 한다.

사고 대처

다음 6일간 헬기 1,800대가 5,000톤의 약품을 4호기 상공에 뿌려 방사능을 흡수하려 한다.

대외적 상황

냉전 시기의 미국 위성은 소련을 감시 중이었는데, 이 위성이 마침 폭발 28초 후 체르노빌 위를 지나가며 사진을 찍었다. 미 정보부는 처음 사진을 보고 소련이 핵미사일을 쏘았다고 생각했으나, 강한 열을 뜻하는 붉은색이 체르노빌 원전을 물들인 것을 보고 이내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취임 1년째였던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이 사실을 미국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미국이 이 정보를 통해 소련 핵 기술을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으며 국제적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 그러나 대기 중으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은 가히 엄청났고, 당연히 소련은 이 사고를 은폐할 수 없었다. 방사능 낙진은 이웃의 유럽 국가까지 이미 도달해 있었다.

사건발생 후 이틀이 지난 4월 28일 월요일, 스웨덴의 원자력 공학자 클리프 로빈슨은 체르노빌로부터 1,600km 떨어져 있는 스웨덴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했다. 원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사능 모니터를 통과해야 했다. 그는 모니터를 통과하여 평소처럼 일상을 시작하려 했지만, 모니터는 그가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 말해주었다. 통제구역에 발도 디디지 않았던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계속 통과해보아도 경고음이 울리자 그는 기기 오작동이라 여겼는데, 뒤이어 출근한 다른 직원들도 기계에 의해 출입을 통제받기 시작했다. 기계 안내에 따라 신발이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클리프는 검출기에 자신의 신발을 넣고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신발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하게 오염되었던 것이다. 직원들은 방사능 낙진의 근원이 포스막 원전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오염원을 추적하던 스웨덴 과학자들은 그날 오후, 소련을 지목했다. 스웨덴은 소련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압박에 못이긴 소련은 사고를 시인했다.

사고는 다음 날부터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사건발생 이후 3일이 지난 시각이었다. [주 2] 곧이어 유럽 전역에 출현하기 시작한 낙진은 10일 뒤, 미국과 일본에까지 도달한다.

피해

인명 피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단연 폭발 직후 방호복도 없이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이었다. 소방관들은 자신들이 진화하고 있는 시설이 원자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때 출동했던 표트르 크멜 서장은 "그것이 원자로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소방관들은 90여분 간 화재를 진압하려 노력하다가 하나둘씩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는다. 새벽 5시, 겨우 불이 진압되고 소방관들은 긴급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69명의 소방관 중 31명이 피폭으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목숨을 부지한 대신 급성 방사선 증후군[주 3]에 시달린다.

각주

  1.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소련의 해체에 큰 역할을 하기는 했다
  2. 전세계 신문의 1면을 체르노빌 원전이 장식했지만, 정작 소련 내부에서는 사건이 축소 보도된다.
  3. 화학 화상, 심장병, 폐와 면역계 손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