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최근 편집: 2016년 10월 15일 (토) 06:10
탕수육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0월 15일 (토) 06:10 판 (국가 대상 소송 및 국제 사회의 주목)

백남기(1947년 10월 8일~2016년 9월 25일)는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생애

그의 생애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 채워진 일생이었다.

  •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출생
  • 1963년 광주서중학교 졸업
  • 1968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
  •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 도중 1차 제적
  • 1973년 10월 교내 유신 철폐 시위 주도[1]
  • 1974년~1975년 – 수배 중 명동성당에 피신
  • 1975년 –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갈멜 수녀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 수도원 수도사 3년
  • 1981년 귀향 [2]
  • 1980년 3월 – 복교
  • 1980년 – 어용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 역임
  • 1980년 5월 8일 –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신현확)’ 장례식 주도
  •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 주도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
  • 1980년 5월 17일 –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
  • 1980년 7월 30일 –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 1980년 8월 20일 –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 1981년 3월 3일 – 3‧1절특사로 가석방
  • 1981년 – 고향 보성으로 귀향(수도작, 낙농업, 밭농사 등)
  • 1981년 11월 – 박경숙(율리아나) 씨와 결혼
  • 1983년 –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
  • 1986년 – 가톨릭농민회 가입
  • 1987년 –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
  • 1989년~1991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 1992년~1993년 –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 1992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 1994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 2014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 2015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
  • 2015년 11월 14일 – 민중초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의식불명
  • 2016년 9월 25일 오후 1시 58분 – 중환자실 입원 317일 끝에 사망

(따로 각주가 없는 이력의 출처는 가톨릭농민회)

활동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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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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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 사건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이 분사한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3],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되었다.[4] 당시 오마이뉴스는 단독 기사를 통해 경찰의 물대포가 백씨의 머리를 노린 정황을 보여주는 영상을 공개하였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살수차는 인권보호장비"[6], "(시위대의) 폭력 행위를 끝까지 추적하겠다"[7] 등 강경 발언 일색이었다.

2015년 11월 17일, 경찰의 살수 강도 시연

논란이 계속되자 2015 11월 17일 서울 신당동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에서는 집회 때 사용되는 살수차의 구조 등을 설명하고 살수 강도를 시연하는 자리가 마련하였다. 연합뉴스의 기사에 따르면 "화면이 너무 작아 시위대가 잘 보이지 않고 야간에는 조명을 비춘다고 해도 사물 식별이 쉽지 않을듯"했으며, 기자단이 표적지나 마네킹을 세워두고 rpm에 따른 충격을 시험해 볼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이를 거부했다.[8]

2015년 11월 22일, 지속되는 비난 여론에 따른 경찰총장의 "인간적 사과"

시연 이후에도 살수차를 제작한 업체에서 근무하던 전직 직원이 "물대포 직사는 살상 행위에 가깝다. 그걸 사람에 대고 쏘는 것은 죽이려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 인터뷰가 공개되고[9] 더불어민주당문재인 전대표가 병원을 방문하는 등[10] 여론이 잠잠해지지 않자 "인간적으로는 제가 오늘 충분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사과를 했다"고 하면서도 법률적 책임이 뒤따르는 차원의 사과는 거부했다.[11]

2015년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주관하는 2차 민중총궐기에 대해 경찰은 집시법 12조를 근거로 집회 금지 조치를 내렸으나[12], 법원은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하여 집회 주관자가 낸 옥외집회 금지통고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고[13] 경찰이 이를 수용하여[14] 예정대로 집회가 진행되었다.

경찰의 우려와 달리 집회는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15][16]

2015년 12월 19일, 3차 민중총궐기

2015년 12월 19일에는 '제3차민중총궐기 노동개악 저지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소요(소란스럽고 요란한) 문화제'가 열렸다. 지난달 열린 1차 집회 참가자들에 대해 소요죄를 적용하려는 것에 대한 반발의 의미로 참가자들이 소리가 큰 악기를 연주하는 등 이른바 '소요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17]

경찰은 문화제가 불법집회로 변질될 경우 현장에서 해산절차를 진행하고 불법으로 차로를 점거해 행진을 시도하면 현장 검거로 엄정 대응하겠다며, 69개 중대 5400여명을 광화문광장 인근 등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집회는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18]

2015년 12월~2016년 2월, 사건 발생 100일 등

2015년 12월 25일 박원순 서울시장[19], 2016년 1월 28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20], 2월 9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21]가 각각 병문안에 나섰다.

물대포 사건 이후 100일째인 2016년 2월 21일에는 '백남기 대책위원회'에서 대전시청 앞에서 백 씨가 사경을 헤맨 지 100일이 됐지만, 정부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사과 한마디도 없다는 내용의 규탄 성명을 냈다.[22]

2016년 1월~2016년 8월, 국가 대상 소송 및 국제 사회의 주목 등

백남기씨의 딸 백도라지씨는 미국판 허핑턴 포스트, 독일의 방송사 등 언론과의 인터뷰, 유엔 특별보고관 면담, 네덜란드에서의 1인 시위 등을 통해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노력을 하였다.[23]

백도라지씨를 면담한 유엔 특별보고관 마이나 키와이는 1월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조사기간 동안 "한국의 평화로운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점진적으로 뒷걸음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응하여 강신명 경찰청장은 2월 1일 오전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엔 보고관의 발표를 반박했다. [23]

백남기씨의 딸 백민주화씨는 2016년 6월 17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32차 유엔인권이사회에 참석하였으며, NGO 구두발언을 통해 "(한국) 정부는 집회가 아니라 범죄라고 하면서 시위를 자의적으로 금지하고 있다"며 "시위가 벌어지기도 전부터 집회에 대해 불법적이고 평화적이지 못하다고 규정짓는다"라고 말했다.[24]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시사IN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물대포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국제앰네스티는 백남기씨의 부상이 상당히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위 도중 이루어진 과도한 공권력의 집행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이는 경찰의 명령 체계에 무책임성이 만연해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위법행위로 인해 백씨에게 부상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책임자들은 반드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25]

백남기씨의 가족은 또한 강신명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12월28일 퇴임), 제4기동단장, 제4기동단 경비계장, 제4기동단 중대장과 물대포를 직접 조종한 경찰관 2명(경장)을 살인미수죄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으로 검찰에 형사고발했다.[23][26]

2016년 8월 25일, 여야가 청문회 개최에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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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5일, 사건 발생 316일만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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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8일 서울대병원의 '병사' 진단 및 부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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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바깥 고리

  1. “민주주의와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고 백남기 농민의 삶”. 《민중의 소리》. 
  2.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 끝내 스러지다”. 《뉴스타파》. 
  3. “김승남 "경찰, 공권력 동원해 폭력..강신명 해임해야". 《뉴시스》. 2015년 11월 15일. 
  4. “물대포 의식불명 농민 가족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한겨레》. 2015년 11월 16일. 
  5. “[단독 영상] 경찰 물대포, 백씨의 머리 노렸다”. 《오마이뉴스》. 2015년 11월 16일. 
  6. “이상원 경찰청 차장 "살수차는 인권보호장비". 《한겨레》. 2015년 11월 16일. 
  7. “강신명 "폭력 행위 끝까지 추적" 시위대 "경찰청장 파면을". 《중앙일보》. 2015년 11월 17일. 
  8. “농민 백씨 넘어뜨린 물줄기 시연..성인 남성도 '휘청'. 《연합뉴스》. 2015년 11월 17일. 
  9. “[단독] 살수차 업체 전 직원 "물대포 조준, 살상행위..백씨 못 봤을리 없다". 《한겨레》. 2015년 11월 19일. 
  10. “[종합]문재인 등 野지도부, 백남기씨 병원 방문”. 《뉴시스》. 2015년 11월 20일. 
  11. “강신명 "인간적으로 사과"..與 '폭력시위' 野 '과잉진압'. 《아시아경제》. 2015년 11월 23일. 
  12. “경찰이 빼든 '집시법 12조'..서울 웬만한 도로 모두 집회 불가”. 《한겨레》. 2015년 12월 2일. 
  13. “법원 "경찰의 '2차 민중총궐기' 집회 금지 부당"(종합)”. 《연합뉴스》. 2015년 12월 3일. 
  14. “법원 "2차 민중총궐기 금지 부당"..경찰 "수용하겠다"(종합2보)”. 《연합뉴스》. 2015년 12월 3일. 
  15. “2차 민중총궐기 대회 서울광장서 개최.."평화집회" 한목소리”. 《머니투데이》. 2015년 12월 5일. 
  16. “꽃을 든 야당 "평화집회 계기로..시민·경찰도 성숙". 《머니투데이》. 2015년 12월 5일. 
  17. “광화문광장에 모인 3차민중총궐기”. 《뉴스1》. 2015년 12월 19일. 
  18. “[종합]3차 민중총궐기 충돌없이 마무리…'소요죄 적용·정부 비판'. 《뉴시스》. 
  19. “박원순 시장, '물대포 부상' 백남기씨 병문안”. 《연합뉴스》. 2015년 12월 25일. 
  20. “문재인, 사퇴 다음날 '물대포 중태' 백남기씨 병문안(종합)”. 《뉴스1》. 2016년 1월 28일. 
  21. “김종인, 백남기씨 병문안.."朴정부에 유감". 《뉴시스》. 2016년 2월 9일. 
  22. “물대포 맞은 농민 중태 100일째..책임자 사과 촉구”. 《YTN》. 2016년 2월 21일. 
  23. 23.0 23.1 23.2 “미국 기자가 깜짝 놀랐어요, 진짜 사과 못 받았냐고”. 《한겨레》. 2016년 2월 6일. 
  24.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씨 딸 유엔에서 "사과도, 조사도, 정의도 없다". 《경향신문》. 2016년 6월 17일. 
  25. “국제앰네스티 "백남기 사건 심각하게 보고 있다". 《시사INLive》. 2016년 7월 22일. 
  26. “민중총궐기 피해자 백남기씨 가족, 국가배상청구소송 제기”. 《머니투데이》. 2016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