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아 코핀(결혼 전 성)은 1793년 1월 3일 매사추세츠 난터켓에서 Anna Folger과 토마스 코핀의 다섯 아이 중 둘 째로 태어났다.[1] 루크레티아의 가족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 등을 특징으로 갖고 있는 퀘이커 교파였다.[1] 루크레티아의 아버지는 자주 그리고 장기간 자리를 비웠고 어머니가 작은 가게의 주인으로 성공하였다.[1]
1802년 루크레티아의 아버지가 은퇴하고 1803년 상인이 되면서 가족은 보스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1] 루크레티아와 자매는 그곳에서 퀘이커 학교인 Nine Partners에 입학했다.[1] 루크레티아는 학교에서 Hicksite[주 1]가 되었다.[2]
루크레티아는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교사가 되어 학교에 남았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 교사들이 받는 봉급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였다.[3] 반면 루크레티아는 나중에 결혼하게 되는 제임스 모핀을 그곳에서 만났다.[3]
1809년 코핀 가족은 필라델피아로 이주했고 토마스 코핀은 그것에서 사업을 시작했다.[1] 1811년 루크레티아는 제임스 모트와 결혼했다.[3] 1815년 루크레티아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루크레티아의 어머니는 커다란 빚더미에 앉았다.[1] 1821년 Society of Friends에서 연설을 시작했고 공식적으로 목사로 인정받았다.[1]
1827년 퀘이커들이 분쟁에 휩쌓였을 때 Society of Friends 사이에서 루크레티아는 Hicksite편에 섰고 논쟁을 피하지 않았다.[1] 루크레티아의 관심은 노예의 폐해에 집중되었고 루크레티아와 남편은 노예 제도하에서 생산된 물품에 대한 보이콧을 하는 등 노예제도 반대 운동을 벌였다.[1] 루크레티아는 연사로서 인기를 끌어 동북지방 곳곳을 두루 돌아다녔다.[1]
1840년, 런던에서 열린 반노예제도 세계 대회에 참석했던 미국 여성들은 남성 동료들이 여성들의 협조에 대하여 보상하고, 대회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할 것을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심지어 미국 여권 운동의 가장 중요한 두 지도자였던 루크레티아 모트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튼조차 대회에서 한마디도 발언하지 못했다. 모트와 스탠튼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침묵하게 한 것에 분노했고 돌아가는 즉시 여권 대회를 개최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이렇게 반노예제도 집회에 입장을 거부당한 루크레티아는 8년 후인 1848년에 스탠튼과 함께 뉴욕에서 여성의 사회적·시민적·종교적 권리를 토의하기 위한 집회를 였었다.[3] 300명의 여성과 남성들은 뉴욕 주의 세네카 폴스에 모여 <입장 선언>과 12개항의 결의안을 내놓았다. 세네카 폴스 선언
1865년의 모트.
모트는 1850년 여성론을 발표하고 그 해에 도주노예법이 통과되고 나서는 도망 노예들에게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제공했다.[3] 이후 각종 집회를 주도하는가 하면 강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3]남북전쟁 후에는 여권 신장과 함께 해방 노예들의 투표권과 교육 기회를 얻으려고 애썼다.[3]
그러던 모트는 1880년 펜실베이니아 주 Chelton Hills에서 87세의 나이로 삶을 끝마쳤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