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우리의 삶, 우리의 꿈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3일 (화) 15:47

미국의 여성운동가 헬렌 버제스가 쓴 『소비에트 여성은 말한다, 우리의 삶, 우리의 꿈』은 작가가 직접 3개월 동안 두 차례에 소비에트 연방을 여행하면서 각기 다른 인종적 배경을 가진 거의 100명에 달하는 소비에트 여성을 만나 그들의 일과 생활을 관찰하고 그들과 인터뷰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모스크바에서 1988년에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1989년에 번역되었다. 소련해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소련의 모습을, 70년 동안 걸어온 사회주의를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책이었다. 『소비에트카』를 쓴 이리나 말렌코의 인터뷰는 그 이후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기에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이 책과 이리나 말렌코의 인터뷰는 잘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만 요약·인용해 보았다.


제 1장, 또 하나의 삶, 또 하나의 문화

레닌페드로그라드(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으나 1991년 이후 다시 페드로그라드로 불리게 됨)의 스몰리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천명한 직후, 처음으로 채택한 두 개의 법령은 러시아의 참전 중단과 농부에게의 토지분배였다. 그 다음 법령은 여성에게 법적인 동등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혁명은 러시아 제국내의 모든 여성들에게 철저한 사회적·경제적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서도 여성들의 지위가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와 같이 극적으로 변화된 곳은 없었다.

키르기지야 공화국의 여성들은 유목생활의 고통과 이슬람의 영향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새로운 정부는 키르기지야 여성의 법적 지위에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곧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봉건적인 정신 상태는 아직도 모든 삶이 신에 의하여 정해져 있고 그러므로 변경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회적 지위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 지워져 있고, 그 지위를 함부로 고치는 것은 신성한 법칙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변화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며, 두려워해야 하고 맞서 싸워야 할 어떤 것이었다. 농부들의 희생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슬람의 성직자와 세리들, 타락하고 부패한 러시아의 지배자들 그리고 농노제도가 붕괴되었는데도 그들의 땅에 농노를 부리고 있는 부유한 농부들-에게는 새로운 정부는 현실적인 경제적 위협이었다. 이들 중에 바스마치 혹은 산적떼라고 불리는 집단들은 무지한 농부들의 공포에 편승하여 내란을 조장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키르기지야와 중앙아시아의 모든 여성들을 봉건제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도적들은 내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위원인 자밀라는 키르기지야의 여성들이 깊게 뿌리박힌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싸우고 죽었는지 설명했다. 자밀라의 이모는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하여 여성의 새로운 권리 즉, 재산소유권, 교육받을 권리, 포악한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권리, 직업을 가질 권리 등을 알려주다가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28년 마을 소비에트 지도자로 선출된 여성 살리바는 여성으로서 전통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자밀라의 이모는 새정부의 특수학교를 거쳐 당의 일꾼으로서 여성을 위한 특별부서에서 일을 계속하였다. 자밀라는 내년이 혁명 70년이 되는 시점이며, 키르기지야를 비롯한 소비에트 어디에도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키르기지야와 인접한 우즈베크도 19세기에 이르러 제정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모슬렘 여성에게 인권은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노예였다. 성적 노리개감이었고, 일하는 동물이었으며, 많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는 남자들에 의해 매매되는 물건이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기본 법규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짜르 행정부는 모슬렘 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관용적이었다. 1927년에 베일을 벗어던지는 행위로 상징되는 후점운동이라는 여성운동이 시작되었다. 후점운동은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도 모든 개인에게 부여되어 있는 권리를 지닌 완전한 인간임을 믿게 하고자 시도한 운동이었다. 1927년 3월 8일 레지스탄 광장에 모인 수 천 명의 시위대는 불기둥에 베일을 벗어던졌다. 그 후로 그들은 학교에 가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공장에 나가 일을 하였다.

예상한 바대로 여성해방운동은 남편들이나, 아버지, 형제들에 의한 반발과 폭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역할을 거부하는 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아주 극단적이었고, 당시 영국 원조를 받던 바스마치가 이러한 반응에 편승하였다. 그 도적떼에게 붙잡힌 여성들은 죽거나 몸이 망가진 채로 돌아왔다. 뉴로브칸이란 여배우는 베일을 벗고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지시를 받은 오빠에게 살해당했다.

전형적인 농민들은 “암탉이 새가 아니듯 여자도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로 여성을 바라보았다. 러시아에서 문맹은 1930년대에 없어졌다. 여성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에서 출발해서 문자해독학교와 전문행정학교에 갔다. 다른 여성들을 가르치고 지방정부와 노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은 세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여성에게 권리가 주어져야 하며, 또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이 권리의 사용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 물질적 조건은 이러한 권리의 사용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마련되어져야 한다. 셋째, 그 조건들은 남성들의 정신 상태를 포함한 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 상태를 변화시키기 위해 마련되어져야 한다.

현대의 여성들은 그들의 권리를 알고 있고,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권리를 완전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을 발전시키고자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이제 자유롭고 동등한 교육에의 접근기회와 똑 같은 노동에 똑 같은 임금, 광범위한 탁아시설, 기숙학교와 여름캠프, 자유로운 소아과 병원, 확장된 산전 산후휴가, 그리고 이미 확대된 가사서비스체계 등을 누리고 있다.

제2장, 당당한 목소리

혁명 초에 당은 오늘날 여성평의회의 전신인 제노텔을 설치해서 여성을 위한 권익옹호 활동을 벌였다. 제노텔 조직자들은 우선적으로 여성들의 문맹퇴치운동을 조직하고 새로운 정부 하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알려주는 일에 전념했다. 어떤 남성이 여성에게 불법적인 행동을 고집하면 제노텔은 그를 체포할 권한이 있었다. 예컨대 중앙아시아에서 제노텔은 남성에게 팔려가지 않도록 여성들을 보호했고 그런 짓을 하려는 부모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일할 수 있고 시장보다 싼 가격으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협동농장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해주고 그것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했다. 1929년에 제노텔은 해체되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깨닫게 되었고 일, 교육, 사회적 활동 등에 완벽하게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여성평의회는 제노텔처럼 당의 일부가 아니지만 그들은 당과 그리고 변화를 추구하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일한다. 어떤 여성이 문제를 갖고 평의회에 오면 그녀의 주장은 노동조합, 행정부, 당 위원회, 혹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기관에 전달된다. 또 다른 형태의 조직인 여성위원회는 지방에서 국가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정부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여성들의 작업조건 및 생활조건을 위한 위원회, 그리고 어머니와 아이들을 위한 위원회라고 불린다.

여성평의회와 여성위원회 외에 소비에트 여성위원회가 있다. 그것은 모든 공화국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구성된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2차 대전 전에 파시즘에 대항하여 여성들을 국제적으로 결속하려는 시도 속에서 출발했다. 전후에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평화와 군비철폐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국제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젊은 여성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1986년에 소련 내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에 입학하고 있는 66개국 1,000명 이상의 여성에게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소비에트 여성위원회는 국내적으로 여성들을 위해 일한다. 그곳에는 전국에서 들어오는 편지들을 읽고 답하는 특별부서가 있다. 일 년에 약 20만 통의 편지가 온다고 한다. 일단 문제가 분석되고 조사단이 해결책을 제시하면 위원회는 고위 입법부서에 그 제안의 심의를 의뢰한다. 일례로 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편지에 대해 국가의 양육보조를 건의했다. 그러한 기금은 만들어졌고 남성들이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자녀 양육비가 제공되었다. 여성들이 그들의 권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주요한 수단은 사회단체인 여성평의회, 정부기관인 여성위원회, 그리고 소비에트 여성위원회 이고, 그 속에서 함께 노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도 여성위원회가 있다.

마야와 같은 방송작가이면서 당원인 여성은 여러 여성조직과 클럽을 통해 활동한다. 이 외에도 여성들은 정부의 공식기관과 공산당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1984년에 선출된 최고회의에는 여성이 1/3(32.8%)이다. 최고회의는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연방의회로서 똑같은 인구를 가진 선거구에서 선출되며, 다른 하나는 국민의회로서 소수민족의 이익을 위해 각각의 공화국, 자치구나 자치지역에서 온 특정 대표들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각 의회는 750명씩으로 전체 1,500명의 선출 대표들로 이루어진다. 전체적으로 4만 6,582개의 소비에트들이 소련 내의 모든 수준들에 있다. 1982년 현재 지역 소비에트에는 여러 공화국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의 50%, 혹은 114만 6,000명이 여성이었다.

여성참여의 측면에서 보면 당내의 여성의 비율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역대 당대회 대표 중에서 여성의 비율을 보면 1952년에 19%, 1973년에 23%, 1981년에 26.1%였다. 공산청년동맹의 경우 회원의 50%가 여성이다. 공산청년동맹에 비해 당에서 여성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지역 내의 평균 자녀수가 다섯이고,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은 시간을 자녀양육에 보내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의 최고 지도층에 여성의 수가 적다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70년이나 계속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낡은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여성들은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면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제3장, 부엌살림

벨소리가 나타샤를 침대에서 흔들어 깨운다. 나타샤는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걸치면서 그날 할 일을 생각한다. 남편인 빅토르는 벌써 일어나서 한 시간 전부터 책을 읽고 있다. 빅토르는 아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 차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직장에 있는 간이식당에 산 둥근 빵을 데우려고 오븐에 집어넣는다. 막 옷을 입고 일할 준비를 끝낸 나타샤는 12살 난 아들 유리를 깨우고 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부엌으로 가기 전 나타샤는 걸레를 꺼내서 거실 가구를 닦는다. 파란 영 파이오니어 유니폼을 입은 유리가 방에서 공책을 찾느라고 엉망진창 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 그녀는 막 일을 끝낸다. 약간 귀찮아 하면서 그녀는 유리가 찾는 것을 도와준다. 공책을 찾자 둘은 부엌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빅토르에게 간다. 나타샤와 빅토르는 지하철 정거장까지 함께 걸어가서 시내의 직장으로 가는 전철을 탄다. 나타샤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슈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그리고 진공청소기로 거실과 침실, 유리의 방을 청소한다. 세 식구가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는 빅토르가 한다. 빅토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나타샤는 테이블을 닦고, 유리에게 가서 다음날 학교 갈 준비를 도와 준다. 나타샤와 빅토르는 함께 tv를 보다가 칫솔질을 하고 침대에서 독서를 하다가 잠이 든다. 이것이 소비에트 여성의 하루 생활이다.

소련 헌법 35조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입법부에서는 결혼관계에 있어서 배우자들의 완전한 평등을 설정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권리를 찾고 행사했다. 사랑하지 않는 남편들과는 헤어졌으며, 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그들은 재산을 갖게 되었고, 낙태를 했다. 그들은 교육받게 되었고, 지역 정부와 산업의 요직으로 진출했다.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공식적, 법적인 평등은 그들의 생활실태와 부합하지만, 가사부문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이 대부분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각종의 사회학적 자료에 의하면 비교적 젊은 남성들은 가사일과 양육에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했다.

소련에서 여성을 육아에서 해방시켜주는 기본 제도는 탁아소이다. 전형적인 탁아소는 120명의 아이들과 35명의 직원들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의사, 간호원, 치과의사 및 기타 전문가들이 포함된다. 모스크바의 탁아소 내에 있는 실내수영장 수영선생과 같은 전문교사들은 제외된 것이다.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일 년에 두 번 신체검사를 받으며, 신경과 전문의 등 많은 전문의들로부터 진찰을 받는다. 어떤 이상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지방 종합병원으로 보내진다. 대규모 탁아소에는 의사가 한 명 있지만, 소규모 탁아소에는 보통 2명의 풀타임 간호원과 일주일에 두 번씩 오는 의사가 한 명 있다. 지진아는 원인이 시력장애인지 발육부진인지 아니면 어떤 복잡한 문제 때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에게로 보내진다. 만약 문제점이 교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아이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특수 탁아소로 보내진다. 그곳에는 특수아동들을 대상으로 일하도록 훈련된 직원들이 있고, 거기서 특수 아동들은 좀더 개별적인 배려를 받는다. 소년 소녀들은 같은 프로그램으로 같은 반에서 공부한다. 소년 소녀들은 함께 차시중 놀이를 하며 함께 식탁을 꾸몄다.

제4장, 일하는 여성들

에이너는 18세 때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봉제일을 하면서 공장의 공산청년동맹 활동에 참가했다. 공산청년동맹 회원의 자격은 28세까지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녀는 28세를 넘기자 공산청년동맹을 떠나 노동조합에 관여하게 되었다.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은 약 250명으로 구성된 교대조들로 나누어져 있다. 에이너는 이 중 한 교대조의 노동조합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그녀는 그 지위를 계속 지켜오고 있다. 노동조합은 주로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노동자의 대부분(93%)은 소련 내 30개 조합 중 하나에 속해있다. 여성들은 이들 조합의 30개 중앙위원회 중에 9개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전체 노동조합원의 50%가 여성이고,전체 중앙위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4.5%이지만, 전체 위원회에서 지도자격인 여성의 비율은 66.4%에 이른다. 에이너가 이끄는 노동조합의 위원회는 다섯 가지 다른 분야들(주택, 생활조건, 노동안전, 학교와의 연락, 스포츠)을 책임지고 있는 13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조합은 작업장내의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은 혹은 그에 못지않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초과달성을 해야 할 필요성은 서구 여성들이 익히 아는 바이다. 이러한 문제들 중 약간은 소련에도 존재한다. 혁명이 일어난 지 70년이 채 안 지나서, 소비에트 여성들의 지위와 여성 자신들은 급격히 변화했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과 국가와 사회의 업무를 다루고 있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양 분야에서 연구자들의 40%가 여성이고, 전문직의 60%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들은 산업, 통신, 수송과 건설 등에서 고위직의 20%를 점하며, 그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여성들은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을 하고, 의사의 68%, 인민판사의 37%, 예술인의 30%를 차지한다. 소련에서 남녀 임금격차는 차별의 증거가 아니라 육체노동보다 정신노동에 낮은 임금을 주는 사회제도 속에서 여성이 덜 힘든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제5장, 함께 가꾸는 건강생활

종합진료소와 병원에서의 의료 치료는 누구에게나 무료이며, 외국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약값은 대부분 몇 센트로서 아주 적다. 아동과 성인들의 종합진료소 외에 여성진료센터라 불리는 여성진료소가 있는데, 이곳은 산부인과 및 부인과 전문이다. 낙태는 혁명 직후에 합법화 되었다가 1930년대 여성들의 요구에 의해 불법화 되었다. 출산통제책이 필요해 짐에 따라 1955년부터 다시 합법화 되었다. 임신중절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최고 5루블(6.25달러)을 내야하며, 수입이 적은 여성들은 무료이다. 낙태는 여성이 원하면 남편이나 가족과의 상의 없이도 여성진료소를 이용할 수 있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 여성들은 “산원”이라 불리는 임산부 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으로 간다. 임신 후기 단계에 이르면, 여성들은 각기 특별히 마련된 산모용 구급차를 전화로 부를 수 있는 번호를 받는다. 산부인과 의사 한 명과 조산원 한 명으로 구성된 구급차량이 여성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원이나 본인이 원하는 산원으로 운송한다. 그녀는 진료소나 산원에서 특정한 의사를 요청할 수 있지만, 출산 담당 의사는 산전 진료를 담당했던 의사와 다르다. 소련에서는 의료실 직원들이 감염과 청결을 염려해서 방문자들을 임산부 병동에 들여보내지 않는다. 남편이 옆에 있기를 원하는 소련 여성들도 있지만 대부분 출산은 남편 없이 완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소련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상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강간이나 폭행을 걱정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돌아다닌다. 소련에서 배우자학대는 본인이 신고하든 제3자가 신고하든 다 가능하고 형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배우자학대는 일어나기는 하지만 서구에서처럼 널리 만연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환청구를 위한 많은 방법들이 있다. 첫째, 여성은 인민재판소로 갈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여성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이루어진다. 고발된 남자가 당에 속해있다면, 여성은 그렇다고 말해야 하며, 타박상 같은 증거가 있으면, 그는 여성이 자치대에게 호소하지 않더라도 당 조직에 의해 처벌될 것이다. 대개 그 남성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에서 사회적 비난을 불러 일으키고 그를 굴욕적으로 만들며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이 된다. 남성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면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비난을 낳을 것이며 그의 생활은 힘들다는 차원을 넘어 보다 훨씬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비난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았다.

혁명 직후 당은 제노텔을 통해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완전하고 평등한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점을 인지시켰다. 제노텔이 담당한 일의 한 부분은 아내 구타를 방지시키는 것이었고, 남성들은 그 때문에 감옥소로 갔다. 남성들이 아내를 구타할 권리를 주장하다가 즉시 구속된 많은 사례들이 있다. 새 정부의 법령들과 제노텔은 여성들에게 권력을 부여했고 여성학대는 용납되지 못한다는 분위기를 창출시켰다. 여성학대를 방지하는 중요한 방책들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다. 소련이 아닌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여성학대를 참고 사는 여성들은 구타를 경제적 안정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인다. 소련의 여성들은 좋지 못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성의 93%가 일을 하며, 그들은 고용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기혼 소비에트 여성의 2/3가 자기 남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번다. 기초 필수품의 가격이 저렴하고 집세는 수입의 3%에 불과하고 교육과 의료가 무상이다.

소련에서는 (당시 서구와 달리) 여성 동성애는 불법이 아니다. 외설물은 소련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비에트 여성에게는 외설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비에트 매체에는 성폭력물과 폭력이 전혀 없다. 광고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외설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여행의 전 기간동안 내가 여성이라는 왜소한 생각을 느낀 적이 없다. 이곳 소년들은 소녀들을 성적 노리개감으로 생각하도록 자라지 않는다.

제 6장 삶을 창조하며, 제 7장 희망찬 미래를 위하여

여기서는 여성으로서 화가, 조각가, 작가, 영화감독, 성악가, 발레리나, 비행기 조종사 등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혹함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여성들이 한 일들을 증언하고 있다. 소련의 예술가동맹과 젊은 예술가 동맹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재능있고 의욕있는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는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며 착취당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가 지망생들과 대조를 이룬다.

소비에트 사회에서 사랑은 “죽을지언정 사랑 없는 키스는 하지마라!”라는 유명한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작가인 체르니세프스키에 의해서 표현되었다. 오늘날의 러시아 젊은이들 다수는 열악한 교육과 자본주의 미디어에 세뇌당하여 사실상 소련에서의 삶과 소비에트 가치에 대해 실제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조금씩 오늘날의 비극적 현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소비에트 여성들은 자존감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소년과 소녀들 사이에서 갈등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여전히 러시아에서 축하행사가 개최되고 있는 국제여성의 날은, 서방에서의 어머니의 날과 달랐다. 국제여성의 날은 우리 사회에 대한 여성의 기여와 여성의 평등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평등했지만 특별했는데, 이것이 우리의 남성들 다수가 여성들에게 가지고 있는 인식이었다. 소련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서방사회는 이리나말렌코가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극단적인 성차별을 가했다. 이리나의 꿈은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볼 때까지 오래 사는 것이고, 활발하게 사회주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리나 말렌코는 2013년 8월에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레디앙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 스리랑카에서의 인터뷰와 동일하지만 스탈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소개한다. 질문자가 스탈린 격하사업이후 지지도가 하락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최근 여론조사에서 과반이상으로 지지도가 높게 나왔는데,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이리나 말렌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 작업이 되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스탈린 시대에 소련 사회가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스탈린과 소련 사회가 성취한 것을 연관지어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1920~30년대 문맹률, 실업률이 많이 낮아졌고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바뀌었고 집단농장도 만들어졌고 나치에 맞서 싸워 승리한 성과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스탈린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