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주

최근 편집: 2023년 5월 9일 (화) 15:26
정난주
본명정명련(丁命連)
출생1773년
사망1838년 음력 2월
국적조선
다른이름세례명 마리아
정보 수정

1773년 정약현과 경주 이씨의 맏딸로 태어나 아래로 두 여동생을 두었는데,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이기도 그녀는 18살 때 두 살 아래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다.

정난주는 혼인 전 이미 숙부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에게 서학을 접하였으며, 외숙부 이벽의 부인 유한당 권씨가 언문으로 번역한 <천주실의>, <칠극>, 유교지식을 천주교리로 해석한 <언행실록> 등을 배웠으며, 고모부 이승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황사영은 부인의 영향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29살의 나이로 제주 대정읍의 관비(官婢)에 부쳐져 37년을 살았다. 승정원일기 1801년 11월 7일자 기록에 보면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황사영의 어미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의 관비로 삼고, 처 정명련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삼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인 까닭에 법에 의해 교형을 면제하여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관노로 삼는다.”라고 되어 있다. 정난주는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언덕 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추자도에 남은 아들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장성하게 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됐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직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난주라는 이름은 관비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38년 음력 2월 병환으로 숨을 거두고 이웃들은 그 유해를 바로 이곳 모슬포 뒷산에 묻었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