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최근 편집: 2023년 5월 9일 (화) 15:00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면서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초계문신으로

다산 정약용
본명정약용
출생1762년
사망1836년
국적조선
정보 수정

규장각에 근무하였다.

1789년 식년 문과 갑과에 합격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은 뒤 남인이었던 정약용과 둘째형 손암 정약전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한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당했다. 천주교를 고수했던 셋째형 정약종은 아들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신유박해는 서학인 천주교 박해이기도 했지만, 권력을 잡은 노론 벽파가 정조가 발탁했던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정치적 박해 성격이 강했다.

1801년 10월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맏사위 황사영이 천주교 박해 실상을 알리고 조선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서신(황사영 백서)을 중국의 천주교 신부에게 보내려다가 붙잡히면서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다시 서울로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황사영 백서와 관계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정치적으로 미운털이 박힌 형제는 각각 흑산도강진으로 다시 유배당했다. 황사영은 처형되었고, 황사영의 부인이자 정약현의 맏딸 정난주는 관노가 되어 제주로 보내졌다. 제주로 가던 길에 두 살짜리 아들 황경헌을 추자도에 남겨두었으며, 오씨 집안에서 자라난 경헌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818년까지 이어진 유배 기간 동안 막내아들(농아)과 조카 학초(정약전의 아들), 그리고 형 정약전이 모두 죽는 등 사적으로는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에 정진하면서 많은 제자를 기르고 초의선사 등 많은 학자와 교류하는 시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