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청년연합

최근 편집: 2019년 5월 6일 (월) 15:48
Yonghokim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5월 6일 (월) 15:48 판

한국청년연합5·18 민중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1984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전역, 그리고 캐나다, 호주, 유럽 등지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활동을 펼친 조직이다. 줄여서 한청련 또는 한청으로도 불렀으며, 영문명은 Young Koreans United (YKU)이다. 해외 한청련 지부를 설립 한 이후는 구분과 해외 지부 존중을 위해 미국 내 조직을 재미한국청년연합으로 부르기도 했다.

2008년에 5·18 민중 항쟁 28주년을 기념하여 [이주·이민자의 인권현황 및 사회적 권리보장 모색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을 열어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책자를 펴낸 후 장년층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으로 재조직을 거쳤다. 한청련의 회원들은 NAKASEC 소속 각 지역 마당집의 일원으로, 마당집이 없는 경우 지역 연락책으로 활약하고 있다.

5.18과 해외운동: 주체적인 해외운동의 거름, 5.18

5.18 민중항쟁은 윤한봉이라는 조직운동가를 통해 해외운동의 꽃을 피우게 한다. 밀항 후 5.18의 마지막 수배자는 빚진 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1983년 나성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동포 청년들을 교육 및 조직하여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1984년 나성한국청년연합 결성으로 미주 8개 지역 회원 단체를 연합하는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 미국 외 캐나다, 호주, 유럽의 동포 청년이 주축이 된 해외한국청년연합 결성으로 조직력을 확대했다. 또한 장년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한겨레)이 창립되어 세대, 지역을 뛰어 넘는 해외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은 해외운동이 남북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고, 남한(남부조국)과 북한(북부조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해외동포의 주체적인 운동으로 발전 시키려 했다.

해외동포대회: 꾸준한 학습, 운동의 생활화

한청련의 강한 조직력과 활동력은 꾸준한 학습을 통한 정세분석과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구체적 실천을 중시하는 운동의 생활화로 뒷받침되었다. 1985년 8월 상항 재미동포대회를 시작으로 정기적인 전국 대회를 갖고 주제 발표와 토론, 학습을 통해 인식의 통일을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청련, 한겨레 장단기 활동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였다.

조국운동 연대: 조국의 자주와 민주화를 위하여

1980년 5.18 민중항쟁 이후 더욱 더 뜨거워진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군사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한청련은 많은 조국운동 지원활동을 하였다. 당당한 해외운동 세력으로서 조국운동과의 든든한 연대를 쌓아가는 한편 미국, 해/내외 동포들은 물론 타민족 진보세력들과도 함께 미국정부를 대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미주평화대행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10만명의 서명운동

1988년 4월부터 14개월 동안 한청련, 한겨레는 Korea Support Network (한국지원연락망) 단체들과 함께 한반도에 배치된 주한 미군 핵무기 철거 서명운동을 벌여 귀중한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 서명용지를 뉴욕 유엔 본부 앞 광장에서부터 필라 연방청사까지 차량 행진, 그리고 워싱턴 디씨까지 장장 150 여 마일을 7일 간의 평화대행진을 통해 1989년 7월 27일 미 연방 의회에 전달하였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기 위해 한청련과 한겨레는 30만 명 이상의 미국 시민과 동포들을 만나 주한 미군 핵무기 철거의 당위성에 대해 알렸다.

국제평화대행진: 백두에서 한라까지 평화를

1989년 8월 세계 평화운동가들과 연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한청련회원 120여명과 외국인 30여명이 참여했고 전국대학생협의회 대표 임수경과 전국정의평화사제단 대표 문규현 신부가 합류한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킨 대행사였다. 또한 15일과 22일의 단식을 통해 한반도의 군사 긴장완화 및 평화협정 체결을 UN에 촉구하였다. 1989년 10월 UN 앞 22일간의 단식운동은 UN 창립 이래 최장기간의 단식 농성으로 기록되었다.

인권옹호: 인권존중을 위하여

일제의 잔재가 군사독재정권까지 이어져 내려온 국가보안법은 반공, 반정부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민주운동열사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갔다. 체제의 유지를 위해 인권이 무시되고 국제인권위원회에서조차 폐지를 권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이데올로기 유지의 보조자로 존재하고 있다.

교육, 문화: 교육을 통한 조직

모든 활동의 뿌리는 교육에 있다. 폭넓은 지지와 참여를 이끌기 위해 동포들에게 교육자료를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이러한 꾸준한 교육활동을 통해 조직의 뿌리가 더욱 깊어졌고, 풍물을 중심으로 마당극, 풍물공연, 강습 등 우리 문화를 계승 발전 시킨 홍보활동을 개발했다. 아울러 각종 시위에서는 반드시 풍물패를 동원해 활동을 효과적으로 타민족들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전쟁반대: 총성없는 세상에서

우리민족은 한국전쟁을 통해 누구보다 전쟁의 고통과 이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한청련/한겨레는 평화정착운동의 일환으로 모든 군사패권정책과 전쟁을 반대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특히 9.11 이후 부시정권의 선제공격 정책을 비판해왔다.

북녁동포돕기: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밑거름

1996년 북부조국의 대홍수 이후 식량위기에 처한 우리의 반쪽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청련과 한겨레는 “북한수재동포돕기 쌀 한 포대 보내기 운동 추진위원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했다. 또한 유엔 산하 세계식량기구와 함께 “북한어린이 점심용 영양과자 보내기 캠페인”을 펼쳤고 4년의 가두 모금활동을 통해 모아진 총 30여 만 달러의 성금을 세계식량기구에 전달했다.

동포사회운동: 한 손에는 조국을 한 손에는 동포사회를

1992년 나성사태를 통해 재미동포들은 경제적 부조리와 인종차별의 어두운 현실을 잿더미 속에서 지켜보았다. 또한 90년 중반부터 미 전국에서 불기 시작한 반이민 공세는 재미동포 이민자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에 1994년 한청련, 한겨레의 지원으로 지역사회에서 20년 넘게 활동한 나성 민족학교,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뉴욕 청년학교, 필라 청년마당집들이 연합하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를 결성했다. 이후 미교협은 전국의 재미동포들을 대변하여 본격적으로 이민자 권익옹호 운동, 소수민족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