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최근 편집: 2020년 9월 7일 (월) 12:20

안중근(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남성 항일운동가이다. 독립군에서의 직책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초대 통감으로서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뤼순 감옥으로 압송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자 하였으나, 형 집행으로 인해 완성하지 못하고 뤼순에서 사망했다.

안중근의 허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다. 안중근은 한국이 독립되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에 묻어주기를 바랐으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묘로 남아 있다.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군인으로서의 행동이라고 말하였다. 생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유묵을 써서 간수(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남겼다. 훗날 이는 대한민국 보물 569-23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의 소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이 '위국헌신 군인본분' 문구를 많이 강하하고 있다.

생애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목에서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때 등에 일곱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아이라며 응칠 이라고 불렸다.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인해 일본 유학을 할수 없게 되자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로 숨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16살인 안중근은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 감사의 지원요청을 받아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해 박석골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가톨릭교인이었으며 세례명은 토마스였다. 도마 안중근의 도마가 바로 이것이다.

하얼빈 의거(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제정 러시아와의 회담을 갖기 위해 온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장군이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군중들과 섞여있던 이토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부 군중이 이토를 부르자 이토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고 이 자가 이토임을 확신한 안중근은 품 속에 있던 권총으로 저격하였다. 첫 발은 이토를 관통하였고 계속하여 3발을 발포하였다.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토를 보호하려 나온 일부 일행에게도 발포하였고 안중근이 발포한 모든 탄은 모두 명중하였다.

의거 이후 즉시 청나라와 러시아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후라"라 외쳤다.

사형 선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원래대로라면 제정 러시아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으나 일제의 압력 때문에 뤼순에 있는 일본 법원으로 송치되었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많은 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하였으나 선임이 불허되었고, 일제의 관선 변호사가 변론을 맡게 되었다.

결국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3월 26일 교수형을 당했다.

사형당하기 전 가톨릭교 한국 교구를 관할하던 뮈텔에게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행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니콜라 빌렘 신부가 개인적으로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듣고 병자성사를 주었다.

안중근의 여성혐오 논란

안중근 장군이 뤼순 감옥에서 작성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안응칠 역사의 원본은 유실되었고, 일역판과 중역판만 있었기 때문에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여러분 이거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주작작 주주작

기방에서 놀기도 하며, 기방에서는 기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야단치기도 하였다. "너희는 뛰어난 자태와 얼굴을 가졌으니 호걸 남자와 짝을 지어 같이 늙는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돈소리만 들으면 침 흘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염치불구하고 오늘은 장씨, 내일은 이씨에게 붙어 금수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냐." 계집들이 내 말을 수긍하지 않고 나를 몹시 미워하거나 공손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면, 나는 욕을 퍼붓기도 하고 매질도 하였다. 이 때문에 친구들은 나에게 '전구'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안중근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中

사실 이건 페미위키 작자가 일뽕이라 무시하면 된다

워마드의 남성 독립운동가 모욕 사건

워마드 유저들은 안중근 등 남성 독립 운동가들을 모욕했는데 이유는 70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독립운동가들의 행동에 대한 여혐 논란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미러링이라고 하며, 혹자는 '워마드는 자신들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지 않기에 미러링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워마드는 남성 난민을 반대하고 남성 성소수자를 혐오하여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