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베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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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베이유
Simone et Antoine Veil
프랑스 프랑스 입헌위원회 위원
임기1974년 5월 28일 - 1979년 7월 4일
임명르네 모노리
유럽의회 의장
임기1979년 7월 17일 - 1982년 1월 18일
프랑스 프랑스 유럽의회 의원
임기1917년 7월 17일 - 1993년 3월 30일
프랑스 프랑스 보건부장관
임기1974년 5월 28일 - 1979년 7월 4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
등급그랑크루아(1등급)
대영제국 훈장 수훈자
등급사령관 여기사(2등급)
샤를마뉴상 수상자
연도1982년
개인정보
원어이름Simone et Antoine Veil
결혼 전 이름시몬느 애니 제이콥
Simone Annie Jacob
출생일1927년 07월 13일(1927-07-13) (프랑스 프랑스 니스)
사망일2017년 06월 30일 () (프랑스 프랑스 파리)
국적프랑스 프랑스
학력국립사법관학교
파리 정치대학
파리대학교
정당프랑스 민주연합(1979, 1995–1997)
민주당-무소속 연합(2012–2017)
가족관계어머니 이본느 스타인메츠
아버지 앙드레 제이콥
3녀 1남 중 막내
배우자앙투앙 베이유
자녀피에르 프랑수아 베이유
장 베이유
클로드-니콜라스 베이유
“과거에 대한 충분한 수용 없이 가능한 화해란 없다.”

생애

유년 시절

시몬느 베이유는 1927년 프랑스 동남부의 항만도시인 니스에서 유대인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1] 아버지 앙드레 제이콥은 로레인 출신의 건축가였으며 어머니는 벨기에와 라인란드[주 1] 출신의 이본느 스타인메츠로 부부가 결혼한 1922년 당시 바칼로레아[주 2]를 통과하고 화학을 공부할 참이었다.

가족은 아버지의 건축 커리어를 위해 1924년에 니스로 이사했고 3년 뒤 시몬느가 태어났다. 위로 두 명의 언니와 한 명의 오빠가 있었으며 나이순으로 매들린, 드니스, 장이다.

홀로코스트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고 프랑스의 나치 괴뢰정권이었던 비시 정부가 1940년 6월 출범했다. 그러나 시몬느의 가족이 살았던 니스 지방은 이탈리아령으로 편입되어 가까스로 비시 정권을 피할 수 있었다. 남매들은 학교에 갈 수 없어 집에서 공부해야 했다. 유대인 수색이 심해지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드니스는 저항군에 합류하기 위해 리옹으로 떠났다.

시몬느는 17세이던 1944년 3월에 바칼로레아를 통과했고, 중등과정을 수료한 것을 축하하려고 친구와 만나러 가는 길에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같은 해 4월 7일 드랑시 수송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4월 13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송되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발트 해 연안으로 보내졌고 그 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언니 드니스는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로 끌려갔다. 시몬느는 4월 15일 나이를 속임으로써 간신히 가스실을 피했고 수용소에서 노동을 했다.

이듬해 1월 베르겐-벨겐 수용소로 보내졌고 어머니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들렌은 병에 걸렸지만 4월 15일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까지 살아남았다. 드니스도 살아남아 결과적으로 시몬느 자매는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를 잃게 되었다.

그의 팔목엔 독일인이 새긴 수인번호 ‘78651’가 문신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시몬느가 유럽 통합에 앞장서고 온갖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된 원동력이 됐다.[2]

법조계 활동과 결혼 생활

시몬느는 수용소 해방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했으며, 국립사법관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변호사로 일했다. 국립사법관학교에서 배우자인 앙투앙 베이유를 만났으며 이들은 1946년 10월 26일에 결혼했다. 시몬느는 세 아들 피에르 프랑수아와 장, 클로드-니콜라스를 낳았다. 이들 가족은 독일의 미국 점령 지역[주 3]으로 이사했다. 1952년, 언니 매들린이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시몬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

정계 활동

법관

시몬느는 파리정치대학원에서 법 학위를 딴 후 법 연구에 전념했다. 1954년 치안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해 1956년 판사가 되었다. 그는 법무부 산하 국립교도소 관리국에 취임해 사법 업무와 여성수감자의 감옥 상태 개선, 처우 개선을 맡았다. 1964년, 민사부 지휘자가 되었다.

시몬느는 법관으로 일하면서 가족 법률 문제에 대한 양부모의 통제권과 여성을 위한 입양권을 획득하는 등 프랑스 여성의 일반적인 권리와 지위를 향상시키는 위업을 남겼다. 1970년에는 치안판사 최고위원회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보건부 장관

그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보건부장관을 지냈다. 정확히는 1974년 5월 28일부터 1977년 3월 29일까지 보건부 장관, 1977년 3월 29일부터 1978년 4월 3일까지 보건부 및 사회보장제도 장관, 1978년 4월 3일부터 7월 4일까지 보건가족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프랑스 데스탱 대통령이 항공산업에 종사한 베이유의 남편 앙투앙 베이유를 내각에 들이려고 자택에 방문했다가, 시몬느 베이유와 대화한 뒤 그를 보건부 장관으로 발탁한 건 유명한 일화다.[2]

보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시몬느 베이유는 피임약 판매와 일부 공공장소 흡연 금지 등의 법안을 추진해 통과시켰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자발적 임신중단(IVG) 합법화다.

장관 재직 시절 사회보장제도 개혁, 금연 캠페인, 연구를 빌미로 한 의사들의 공공연한 환자 장기 적출 금지, 시골 지역의 의료서비스 부족 문제 개선 등 전반적인 인권 개선에도 힘썼다고 가디언은 전했다.[2]

유럽의회

시몬느 베이유는 1979년에 직선제 최초이자 여성 최초로 유럽의회 의장으로 당선되어 3년간 활동했다.

그는 유럽연합(EU) 만들기에 앞장서면서[2] 유럽통합의 어머니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이후

2007년, 자서전 '삶'을 출간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다.[2][1]

2013년 남편 앙투앙이 사망했다.[2]

사망

2017년 6월 30일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져 프랑스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먼저 사망한 남편도 그를 따라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일 트위터에 “베이유는 프랑스인에게 사표(師表)였다”고 애도했고, 데스탱 전 대통령은 “그는 인생 최고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 특별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2]

업적

자발적 임신중단 합법화 운동

보건부 장관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1974년 11월, 낙태 합법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법안이 통과하기까지 두 달간 베이유는 언론을 비롯해 가톨릭 사제들, 법안에 반대하는 여성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2]

수년 간 찬반 논쟁이 지속된 이슈인데다 당시만해도 프랑스는 보수적인 사회였다. 자크 시라크 당시 국무총리는 법안을 외면했고, 법무부 장관마저도 반대했다. 베이유를 지지하는 이는 그를 발탁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정도에 불과했다.[2]

하지만 베이유는 “지금도 상당수 의사와 시민들이 임신중절을 행하고 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의원 한 명, 한 명을 설득했다. 특유의 추진력과 끈기로 결국 법안은 통과됐고, 베이유는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됐다.[2]


출처

참고문헌

부연 설명

  1.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가 만나는 국경지대.
  2. 프랑스의 대학교 입학 자격시험.
  3.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영국, 소련, 프랑스, 미국에게 통치를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