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페미니스트

최근 편집: 2016년 10월 30일 (일) 08:55
탕수육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0월 30일 (일) 08:55 판 (→‎'반성하는 가해자' 지침: 문장 내 중복 제거)

남성 페미니스트란 젠더권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페미니스트인 사람을 이른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남성이지만, 모든 남성이 포함되거나 남성이 아닌 사람이 모두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행동 지침

MPOV 이 주제에는 상이한 여러 관점이 있으며, 페미위키는 다양한 관점을 동등하게 소개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각 관점이 소개된 순서는 특정 관점의 중요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반성하는 가해자' 지침

'초월적/객관적 제3자', '특권층임에도 불구하고 약자를 위해 나서는 훌륭한 자(노블레스 오블리주)' 등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다음 항목에 모두 동의하는 사람을 편의상 반성하는 가해자라 부르자.

  • 자신이 그동안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편승하여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약자들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젠더권력을 누려왔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페미니즘에 기여하길 원한다.
  • 자칭 페미니스트인 남성들이 사적인 자리에서는 다수의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해왔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의심과 불신에는 상당한 합리성이 있다고 여긴다. (성폭력 피해 공론화 참고)
  • 신뢰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 진정성을 의심받기 쉬우며, 이는 페미니즘에 기여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라고 여긴다.

다음 지침은 반성하는 가해자적 태도를 가진 이들이 스스로 고민하여 선택할 것을 전제로 작성되었으며, 다른 이들에게 따르기를 강요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 말하기보다 듣기. 남성들의 발언은 이미 과도하게 많은 매체들을 통해 편향되게 잦은 빈도로 인용되고 있다. 이 편향을 가중시키지 말자.
  • 말을 하더라도 장황한 설명, 설득, 과시 대신 간결한 동의와 지지 표명 위주로. 장황한 설명이나 설득을 하려면 되도록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특히 권력 관계에서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자. 그래야 맨스플레인이 아니다.
  • 상황 판단이 애매한 경우 다음 질문을 던져보자. 내가 하려는 말이나 행동이 실질적 비용(시간, 노력, 재화 등)을 치르되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익(평판, 명예)을 최대한 피하는 행동인가? 그렇다면 실행, 그렇지 않다면 보류하자. (값비싼 신호 이론 참고)

'반성하는 가해자' 지침에 대한 반론

위의 가이드 라인은 대체로 기계적 중립, 혹은 합리적 태도를 가장한 채 여성을 공격하는 발언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논점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발화와 주체적인 사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

  • 남성을 절대적 특권층으로 분류하는 관점은 사회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와 성정체성은 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에 남성/여성의 구도로 단순화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 남성은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갖는가? 만약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있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젠더에 따른 기득권과 폭력은 일관되게 유지되는가? 그렇게 보기 어렵다. 사회구조가 젠더와 계급으로만 나누어진다고 볼 수는 없지만[1] 상황에 따라 젠더권력이 계급권력을 압도하기도 하며, 계급권력이 젠더권력을 압도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 위와 같은 시각은 때때로 "젠더보다 계급문제가 중요하다"는 주장들로 이어지는 한계를 갖는다.[2] 그렇다면 위와 같은 논지는 굳이 주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물학적인 성별이 발화의 자격으로 작동해서는 안된다. 페미니즘에서 남성, 특히 이성애자 남성은 영원한 타자일까?
  • '당사자성'은 모든 형태의 당사자 운동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당사자성'에 입각한 가치판단이 당사자나 진영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당사자 운동에서 '당사자성'에 대한 맹목적 옹호는 담론의 빈곤을 초래한다. 노동운동의 예를 들면,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양상들을 띄는 노동계급 남성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기보다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합리적인 주장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서 이 논리가 노동운동 내에서의 성폭력 가해에 면죄부를 제공했다. 한 편으로 이러한 논리는 노동담론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 해당 가이드라인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에서 다양한 양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남성 페미니스트들도 그 존재가 매우 다양하며 지향점 또한 상이하다. 누군가는 가부장적, 남성적 권력의 억압 받는 주체로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었을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여성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라는 개인적 욕심에 의해 운동에 투신하는 경우도 있다.[3] 가이드라인에서 언급된 '선의를 갖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수많은 유형들을 무시하고 있다.
  • 이러한 양상들은 적지 않은 운동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성을 가치판단의 중심에 놓는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운동에 단일한 노선만이 존재한다면, 동일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단체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떠한 노선들이나 한계를 갖고 있고, 그 한계에 대한 비판과 토론이 필요할 뿐이다. 특정한 노선과 유형에 대해 발화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억압에 불과하다.
  1.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 권력'도 적잖게 작용한다.
  2. 실제로 정의당 문예위 논평 철회 사건에서 논평을 비난하던 측에서 내세운 논리였기도 했다.
  3.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운동에서 이렇게 운동을 시작한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심상정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