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한문: 金活蘭, 일본식 이름: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자는 기득(己得). 호는 우월(又月). 세례명 헬렌(Hellen), 1899년 1월 18일 ~ 1970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일제 여성운동가, 언론인이자 교육자이다.
한국여협 초대회장이었던 김활란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제정되었다.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은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과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 지도자에게 수여된다.
그러나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의 징병·징용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친일 명단들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친일 행적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의 징병·징용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지난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또한 김활란은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넘긴 내력이 있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었다. 나이가 많아봤자 20대 후반을 넘지 못했으며, 모두 김활란의 제자이자 이화의 여학생이었다.
애국자녀단은 김활란 휘하의(김활란이 최고 직급인 단장이었다.) 친일 단체로, 실상은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이화 여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일제의 말을 따르는 애국자녀단 단장 김활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 나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김활란은 죽을때까지 일본군의 위안부에 팔려나간 그녀의 제자에게 사과는 커녕 일말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과거 개신교나 이화여대는 김활란을 포장하느라 이런 행적에 대해 열심히 변론했었으나, 그런 포장은 아래 문단의 친일청산 기획단의 경우처럼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화여대 친일청산 기획단
‘이화여자대학교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이하 기획단) 소속 학생 10여명은 서울 이화여대 정문에서 ‘김활란 친일행적 알림팻말 세우기 선포식’을 열어 “민족을 배신한 사람은 이화의 ‘큰 스승’이 아니다”라며 “김활란의 친일 행적을 이화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친일행적을 적은 알림 팻말을 동상 앞에 세우겠다”고 밝혔으며[2] 2017년 11월 13일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는 제목의 팻말을 세웠다.[3] 그러나 이 팻말은 27일 담화문 발표와 함께 학교측에 의해 철거되었다.[3] 이에 대해 정어진 이화여대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장은 “학교가 담화문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학생들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 인사의 동상이 학교에 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인데, 동상을 철거하고 싶지 않은 학교가 논리적이지 못한 해명을 내놓고 있다”고 반박했다.[3]
생애
- 1899년 1월 18일 경기도 인천에서 김진윤과 박또라 사이에서 태어났다.[4]
- 1907년 인천 영화여학교에 입학[4]
- 1908년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여 이화학당에 전학하고 고등과에 진학[4]
- 1918년 제5회로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4]
- 1920년 6월 이화 7인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강연을 하였다.[4]
- 1922년 4월 22일 김필례, 유각경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창립[5][6]
-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4]
- 1930년~ 미국 유학[4]
-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4]
- 1945년 9월, 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재건하고 회장 취임, 한국여학사회를 창설하고 회장 취임
- 1945년 12월, 대한독립촉성부인회 조직
-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 1950년, 여학사 협회 창립위원, 초대 위원장
- 1951년, 전시 국민 홍보 외교 동맹 전체 위원장
- 1951년 4월, 대한민국 민간 외교사절
- 1952~54년,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
- 1953년,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집행위원
-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 1960년, 금란여자중,금란여자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 1961년, 금란전도협회 조직
- 1961년 9월, 이화여대 정년퇴직, 명예총장 취임. 이화학원 재단 이사장
- 1965~70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 1969년 3월, 영란여자중,여자상업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 1970년 2월 10일, 당뇨병과 동맥경화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
상훈
- 교육 부문 대한민국장 - 1963년 8월
- 일등수교훈장 - 사후인 1970년에 추서되었다.
출처
- (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김활란 문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 “김활란, 엇갈리는 평가속 바로보는 눈 필요”. 《이대학보》. 1999년 6월 1일.
- ↑ 이대 학생들, ‘초대 총장’ 김활란 친일행적 알리기 나선다
- ↑ 3.0 3.1 3.2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46.html
- ↑ 4.0 4.1 4.2 4.3 4.4 4.5 4.6 4.7 “인물사전 / 김활란(金活蘭, 1899. 2. 27~1970. 2. 10)”.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자료 DB》.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 ↑ “역사”. 《한국YM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 ↑ “주요연혁”. 《한국YM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