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칼리파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3:28

칼리파(아랍어: خليفة, khalīfa) 혹은 칼리프는 ‘뒤따르는 자’라는 뜻의 아랍어무함마드가 죽은 후 움마(이슬람 공동체),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 최고 종교 권위자의 칭호이다. 가톨릭의 최고 지위인 교황과 비슷하다.

계승 조건

원래 이슬람의 법학적 해석으로는 '칼리파가 되려면 반드시 이러이러한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라는 규정이 없다. 딱 하나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면 (이단이 아닌) 남자 무슬림이라는 것뿐이다. 이 때문에 초창기 하와지리파에서는 칼리파를 만드는 요소를 신앙심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흑인 노예도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에서 제시하는 이상적 칼리파 상은 존재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정의로움
  2. 이슬람법의 준수
  3. 건강한 시각과 청각과 언어능력
  4. 건강한 사지
  5. 행정 능력
  6. 전장에서의 용기와 능력
  7. 메카 거주민인 쿠라이쉬 부족의 자손


전 무슬림들의 동의 아래 추대받아 칼리파가 될 수 있다면 이상적이긴 하지만, 선대 칼리파로부터 무력으로 칼리파 칭호를 탈취했다고 해도 무효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세습 칼리파제가 부정되지 않은 이유……라기보다는, 반대로 세습 칼리파제를 옹호하기 위한 해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외에 무함마드의 출신이기도 한 쿠라이쉬 부족이어야 한다든가, 용맹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있으나, 이런 것들은 추천사항일 뿐 필수사항은 아니다.

역사

칼리파의 역사는 서기 632년에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제1대 칼리파로 아부 바크르가 선출되어 "알라사도의 대리인"을 칭했던 것에서 시작되며, 제2대 칼리파가 된 우마르 1세는 "신도들의 우두머리(Amīr al-Mu'minīn)"라고 하는 칭호를 채용하여, 칼리파의 칭호와 함께 이용되게 되었다. 제3대는 우스만 이븐 아판, 제4대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로 계승되었으며, 이 4명은 꾸르안순나에 기초하여 '움마'를 통치하였기 때문에 정통 칼리파(Al-Khalifah Ar-Rashid)라고 불린다.

그 후, 우마위야 왕조, 압바스 왕조에 세습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아파가 칼리파의 권위를 부정하고 분파하여, 수니파만이 칼리파를 따르게 되었다.

칼리파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의 교의를 좌우하는 종교적 권한이나 꾸란을 독단적으로 해석해 입법하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고, 대신에 이것들은 울라마들의 합의에 의해서 보충되어 단지 움마의 행정을 통괄하여 신도들에게 이슬람의 의무를 준수시키는 역할 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또 10세기에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가 대(大)아미르에 정권을 맡기게 되면서, 칼리파는 실권을 잃고 아미르나 술탄의 지배권을 승인하는 대신에 그들의 비호를 받았다. 그 후 안달루스 왕조도 칼리파를 칭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마지막 바그다드 칼리파인 알 무스타심1258년일칸국의 건국자인 훌라구에 의해 살해되어 아부 바크르 이래 계속된 칼리파 제도는 여기서 한 번 끊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에 맘루크바이바르스는 살아남은 압바스 왕조의 일원 가운데 한 사람을 카이로로 초대하여 새로운 칼리파로 옹립해, 맘루크(노예 군인) 출신의 술탄에게 지배의 정당성을 주는 존재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1517년,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카이로의 칼리파는 오스만 왕조의 수도 이스탄불로 끌려가 버렸다.

당초 오스만 왕조는 칼리파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실력으로서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서 행동할 수 있었지만,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에 걸쳐, 러시아 제국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군사적 열세가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 내외의 무슬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칼리파의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로부터 칼리파권을 선양받아 술탄과 칼리파를 겸비하는 군주제가 생겨났다(술탄-칼리파제).

현대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이를 이은 터키 공화국에서는 술탄-칼리파제를 폐지함으로써 다시 한 번 칼리파 제도의 역사가 끊어졌다.

유명한 '지하드'에서, 공적인 지하드가 인정받으려면 칼리파, 혹은 해당국가의 수장으로부터 명시적인 인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가 아닌 나라의 수장이 지하드를 인정할 리가 없고, 칼리파는 현대에 들어 폐지되었으므로 현대의 수니 이슬람 세계에서는 공적인 지하드를 표방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슬람 테러 단체들은 칼리파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것도 가능하다면서 자기들의 활동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1세기 만인 2014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칼리파 이브라힘을 자칭하였다. 당연히 테러단체의 수장이라 어느 국가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담하게 "칼리파가 없으면 새로 칼리파를 만들면 되지"라는 발상의 전환이라 이슬람 세계에 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수니 이슬람계에서는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이단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칼리파 자칭을 인정하지 않았다.

수니 이슬람계에서 이슬람 세계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다시 칼리파를 추대하자는 주장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자 수가 수억에 달하는 거대한 이슬람 세계에서 '어떻게 공정하게 추대하느냐' 하고 방법을 합의하고 후보를 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므로 하자는 주장만 있지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칼리파 자칭이 충격을 준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