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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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한문: 金活蘭, 일본식 이름: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자는 기득(己得). 호는 우월(又月). 세례명 헬렌(Hellen), 1899년 1월 18일 ~ 1970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일제 여성운동가, 언론인이자 교육자이다.

한국여협 초대회장이었던 김활란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제정되었다.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은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과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 지도자에게 수여된다.

사실 김활란은 조선의 농촌 계몽과 여성인권 개선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페미니즘에 반대되는 군사주의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징병에 대한 독려와 정신대 모집을 하였다면 부정적인 평가가 같이 있다. 물론 후자의 행적으로 인하여 친일인명사진에 등재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화여대에서도 철거 시위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순결 강요,종교 엄숙주의,게임 등 하위문화 검열과 같이 YWCA,YMCA등을 위시한 보수주의 페미니즘이 주류 페미니스트들에게 까이는 이유이기도 한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 남성에게만 허락되는 성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려고 일부 문화 출판물을 검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를 제외하고는 비판하진 않았다.)

생애

1910년대 ~ 1920년대 : 여성인권 개선의 선구자이자 농촌교육의 일원

사실 중일전쟁 이전만 해도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사실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생긴 의미도 바로 이런 행위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변절을 했고, 결국 이는 이화여대의 철거 시위와 YMCA,YWCA가 까이는 원인을 제공했다.

실제로 김활란은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직후부터 이화 학당 고등 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 학당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얄궂게도 찬송가 345장(개역 개정 기준)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가 3.1 운동 직후 그녀가 작사한 것이다. 1920년 6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교 청년 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융희)가 붕어하자,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로 모여서 망곡(望哭)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전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 학당의 전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고. 그 주모자로 잡혀서 종로경찰서에서 옥에 갇혔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 준비 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이다. 이듬해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를 세웠다.

1930년대 후반 : 친일 행적

'김활란 박사는 징병·근속·징용·여자근로정신대 등의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 행동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의 안정을 도모해 왔다'
김활란에 대한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강정숙의 비판.[1]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의 징병·징용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지난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또한 김활란은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넘긴 내력이 있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었다. 나이가 많아봤자 20대 후반을 넘지 못했으며, 모두 김활란의 제자이자 이화의 여학생이었다.

애국자녀단은 김활란 휘하의(김활란이 최고 직급인 단장이었다.) 친일 단체로, 실상은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이화 여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일제의 말을 따르는 애국자녀단 단장 김활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 나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김활란은 죽을때까지 일본군의 위안부에 팔려나간 그녀의 제자에게 사과는 커녕 일말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과거 개신교나 이화여대는 김활란을 포장하느라 이런 행적에 대해 열심히 변론했었으나, 그런 포장은 아래 문단의 친일청산 기획단의 경우처럼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화여대 친일청산 기획단

이화여자대학교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이하 기획단) 소속 학생 10여명은 서울 이화여대 정문에서 ‘김활란 친일행적 알림팻말 세우기 선포식’을 열어 “민족을 배신한 사람은 이화의 ‘큰 스승’이 아니다”라며 “김활란의 친일 행적을 이화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친일행적을 적은 알림 팻말을 동상 앞에 세우겠다”고 밝혔으며[2] 2017년 11월 13일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는 제목의 팻말을 세웠다.[3] 그러나 이 팻말은 27일 담화문 발표와 함께 학교측에 의해 철거되었다.[3] 이에 대해 정어진 이화여대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장은 “학교가 담화문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학생들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 인사의 동상이 학교에 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인데, 동상을 철거하고 싶지 않은 학교가 논리적이지 못한 해명을 내놓고 있다”고 반박했다.[3]

생애

상훈

  • 교육 부문 대한민국장 - 1963년 8월
  • 일등수교훈장 - 사후인 1970년에 추서되었다.

출처

  • (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김활란 문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김활란, 엇갈리는 평가속 바로보는 눈 필요”. 《이대학보》. 1999년 6월 1일. 
  2. 이대 학생들, ‘초대 총장’ 김활란 친일행적 알리기 나선다
  3. 3.0 3.1 3.2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46.html
  4. 4.0 4.1 4.2 4.3 4.4 4.5 4.6 4.7 “인물사전 / 김활란(金活蘭, 1899. 2. 27~1970. 2. 10)”.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자료 DB》.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5. “역사”. 《한국YM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6. “주요연혁”. 《한국YM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