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許貞淑, 1902년 7월 16일 ~ 1991년 6월 5일)은 페미니스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이다. 동아일보 최초의 여성 기자였다.[1] 광복 후 북한부수상 등을 지냈다.[2]
생애
일제 강점기에 변호사였던 어머니 정보영과 아버지 허헌의 딸로 1902년 태어났다.[3] 부친과 끈끈한 신뢰를 바탕으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사회활동에서 아버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어머니의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봉건적인 가족구조의 폐단을 발견했다고 한다.[4] 특히 딸 하나만 낳고 가문의 대가 끊어질까 고통받는 어머니의 모습에 많은 연민을 느꼈다.[4][주 1]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전통적 여성의 미덕들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3] 1918년 아버지의 뜻에 의해 일본 고베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수녀원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1920년 중도에 뛰쳐나왔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3][4]
1924년 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5] 주도했고 경성여자청년동맹 등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를 주도하고 신문과 잡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이론과 활동을 펼쳤다.[4] 1924년 8월 1일 같은 동아일보 기자인 임원근과 결혼식을 올렸다.[6]
동아일보의 기자, 잡지 «신여성»의 편집장 등으로 번 월급의 대부분을 활동비로 사용하였다. 그래도 모자라면 부친의 도움을 받거나 집안의 골동품을 팔아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전해진다.
1926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 생활을 하였다.
근우회 운동의 가장 큰 의의가 한국여성의 대중적 참가라고 밝히면서 여학생의 조직화와 여성운동가의 양성에 주력했다.[4] 이런 고민을 담은 1930년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으로 인해 허정숙은 투옥되고 근우회는 해소의 길을 걷고 말았다.[4]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4]
아버지의 경제적 사회적 뒷받침이 보태져서 동지들의 지지를 받아 해방 후에도 북한에서 활동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7]
남성 지식인들의 조롱
당대 남성 지식인들은 허정숙의 민족적·사회적 활동보다 스캔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8] 1932년 7월 잡지 별건곤에 발표된 '경성 명인물 신체 대검사'라는 글에는 허정숙이 이혼할 때 남편에게 맞아 얼굴에 큰 상처가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허○숙과 남편이 '서로 권투시합을 했다'고 희화화하고 그 상처를 '기념'이라 표현하는데, 당시 가장 주체적인 여성 지식인조차 남편에게 받는 폭행과 이를 조소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기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8] 허정숙은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절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허위"라며 반박했다.[3]
약력
- 1924년 5월 - 여성동우회 창립 발기인 및 집행위원[5]
-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3]
- 1959년 최고재판소 소장[3]
- 1972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3]
- 1984년 조국선전중앙위원회 의장[3]
부연 설명
출처
- ↑ The Bigissue Korea 174, 2018 3월 1일 간행, 38p
- ↑ 2.0 2.1 “경수로 착공식 북한대표 허종은 허헌의 아들로 확인”. 《중앙일보》. 1997년 8월 27일.
- ↑ 3.0 3.1 3.2 3.3 3.4 3.5 3.6 3.7 이상록/여성사연구모임 길밖세상 (2002년 1월 28일). “금욕·순정…전통적 여성성 반기”. 《한겨레》. 2019년 12월 24일에 확인함.
- ↑ 4.0 4.1 4.2 4.3 4.4 4.5 4.6 “신여성이야기 허정숙”. 《한국콘텐츠진흥원》.
- ↑ 5.0 5.1 “女性同友會 發起會 미구에”. 《동아일보》. 1924년 5월 5일.
- ↑ “신랑신부”. 《동아일보》. 1924년 8월 1일.
- ↑ 김경애,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여성의 삶과 남성들", 젠더연구/-(16), 2011., 131-150, 동덕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
- ↑ 8.0 8.1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2012년 11월 26일). “[이영아의 여론 女論] 허정숙에게 남은 가정폭력의 상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