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순희

방순희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1904년 1월 30일, 함경남도 원산부
사망1979년 5월 4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본관온양 방씨
학력정신여자고등학교 (졸업)
직업독립운동가, 교육자
경력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부회장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종교개신교
정당無
웹사이트국가보훈처 - 방순희

방순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을 지냈던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190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방도경과 김복녀의 맏딸로 태어났다. 7살이던 1911년 일가족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트크로 이주하였다. 방순희는 블리디보스트코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한인기독교회에서 운영하는 삼일여학교에 진학했고, 15살 되던 해인 1918년 귀국하여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고, 3.1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의 백산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나,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 당국이 민족교육을 인정하지 않아 2년 만에 학교가 폐쇄되자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상해 망명 후 임시정부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러시아영사관에 통역으로 고용되었으나 1 달여 만에 그만두고 재일한국인사회주의단체인 북성회의 국내 지부인 북풍회에 가입하였다. 일경은 러시아 영사관 출입이 잦은 방순희를 친러 공산주의자로 보고 감시를 하였고, 만주를 거쳐 상해로 탈출하였다. 1931년 독립운동가 현익철과 결혼하였으나, 1938년 5월 8일 남목청 사건으로 남편이 사망하였다

1938년 임시의정원 함경남도 대의원에 선임된 이래 1945년 광복될 때까지 7년 동안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유일한 여성의원이다. 방순희는 소련 담당으로 선정되어 중경 주재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고, 광복군 창설, 대일대독 선전포고, 조소앙의 건국강령 채택문제,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 등 광범위한 활동으로 업적을 남겼다. 이 무렵 김관오와 재혼했다.

1940년 6월 16일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하는데 기여하였고, 1943년 2월 23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열고 부주석으로 선임되었다. 방순희는 임시정부 선전과 과원으로 일제 학도병을 대상으로 한국어 방송을 하면서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본군 포로소용소를 찾아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였다. 애국부인회 회원들과 중국군으로부터 인계받은 한국 출신 위안부 여성들을 돌보며 교육을 하기도 했다.

광복 후 임시정부 국내선전 연락원으로 임명돼 중국에 남아 선무공작을 펼쳤다. 1946년 4월 26일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과 귀국 후 1948년에는 한국독립당 부인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 1979년 5월 4일 타계한 후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2]

  1. ↑ 여성독립운동가사전. 심옥주. 천지당(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2. ↑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