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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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한문: 金活蘭, 일본식 이름: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자는 기득(己得). 호는 우월(又月). 세례명 헬렌(Hellen), 1899년 1월 18일 ~ 1970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일제 여성운동가, 언론인이자 교육자이다.

한국여협 초대회장이었던 김활란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제정되었다.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은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과 양성평등 실현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 지도자에게 수여된다.

사실 김활란은 조선의 농촌 계몽과 여성인권 개선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페미니즘에 반대되는 군사주의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징병에 대한 독려와 정신대 모집을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같이 있다.

물론 후자의 행적으로 인하여 친일인명사진에 등재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화여대에서도 철거 시위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순결 강요,종교 엄숙주의,게임 등 하위문화 검열과 같이 YWCA,YMCA등을 위시한 보수주의 페미니즘이 주류 페미니스트(특히 래디컬 페미니스트 계열)들에게 까이는 이유이기도 한다. 물론 김활란의 여성인권 개선은 아주 높게 평가하고 옹호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페미니즘은 구한말 대한민국에 들어온 기독교계가 주장한 리버럴 페미니즘이 신사참배와 해방 이후 우경화된 것으로 시작되었고, 반면 1970년대에 생겨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권위주의등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 68운동 이후 신좌파 운동으로 생겨났고 여기에 래디컬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철폐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공동체(교회,가족) 등을 해체해야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둘 사이는 대립 관계였다.

물론 여성 인권 신장 문제에선 공동으로 단합을 했지만, 이건 페미니즘이 여성 인권 신장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지, 두 페미니즘의 사상이 유사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대표적인 보수주의 페미니즘 단체인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이 어느정도 있고 진보 성향을 띄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활동 현황과 논평을 보면 차이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건 보수주의 페미니즘래디컬 페미니즘 문서를 보면 된다.)

생애

1910년대 ~ 1920년대 : 여성인권 개선의 선구자이자 농촌교육의 일원

사실 중일전쟁 이전만 해도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사실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생긴 의미도 바로 이런 행위 때문이다.

실제로 김활란은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직후부터 이화 학당 고등 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 학당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얄궂게도 찬송가 345장(개역 개정 기준)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가 3.1 운동 직후 그녀가 작사한 것이다. 1920년 6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교 청년 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융희)가 붕어하자,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로 모여서 망곡(望哭)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그는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전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 학당의 전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고. 그 주모자로 잡혀서 종로경찰서에서 옥에 갇혔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 준비 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이다. 이듬해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현 동구마케팅고등학교,동구여자중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1930년대 후반 ~ 1940대 초반(해방 이전) : 친일 행적

'김활란 박사는 징병·근속·징용·여자근로정신대 등의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 행동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의 안정을 도모해 왔다'
김활란에 대한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강정숙의 비판.[1]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의 징병·징용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지난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또한 김활란은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넘긴 내력이 있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었다. 나이가 많아봤자 20대 후반을 넘지 못했으며, 모두 김활란의 제자이자 이화의 여학생이었다.

애국자녀단은 김활란 휘하의(김활란이 최고 직급인 단장이었다.) 친일 단체로, 실상은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이화 여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일제의 말을 따르는 애국자녀단 단장 김활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 나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김활란은 죽을때까지 일본군의 위안부에 팔려나간 그녀의 제자에게 사과는 커녕 일말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과거 개신교나 이화여대는 김활란을 포장하느라 이런 행적에 대해 열심히 변론했었으나, 그런 포장은 아래 문단의 친일청산 기획단의 경우처럼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물론 현재는 개신교계도 이화여대도 김활란의 공을 띄어주지, 과를 변호하진 않는다. 물론 석상은 치워지지 않았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즉 광복한지 얼마 안되어서 당시 미군정청의 한국 교육 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담하고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한국 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참고로 YWCA에서 시작된 단체가 바로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이다. 실제로 여긴 이들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고, 그래서 보수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

1946년 4월, 문교부(현 교육부의 전신)로부터 인가를 받아 전문대학이였던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했다. 당시 이화여전 교장이던 김활란은 이화 여대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1947년 3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자, 강사를 맡았다.

실제로 건국 실천원 양성소는 우익진영(김구,이승만 등)이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건국 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 기관이다. 김활란 이외에도 이인, 조소앙, 김학규, 지청천, 안재홍, 신익희, 박순천, 이은상, 양주동, 정인보 등등 이 있었다. 매 기수마다 1개월의 단기 교육 형태로 운영되던 양성소는 1949년 김구가 안대희에게 피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 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해 5월 제헌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또한 1950년 4월 중앙 교육 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즈(korea times) 사장을 맡았는데, 1953년 말에 경영권을 장기영 조선일보 사장에게 넘겼다.

1955년에는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 아시아 반공 연맹 부이사장과 한국 여학사 협회 회장을 맡았고,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 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동구학원 이사장에서도 물러났다.

1961년 금란 전도 협회를 조직해 농촌 기독교 전도 활동을 전개했고, 대한 기독교 교육자 협회 회장, 전국 복음화 운동 명예 회장, 한국 기독화 운동 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63년 8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 부문상과 미국 감리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저지르자 한경직 목사 등과 더불어 도미하여 당시 美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며 한국의 군사 정변을 인정하며 군사 정권을 지원해달라는 탄원을 하였다가 美 정부에 의하여 자진 출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강제 출국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사실 한경직 목사도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사업에 치중하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인물이였는데, 광복 이후엔 오히려 보수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즉 김활란과 같이 개신교계가 우경화가 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다. 유언은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유언이었다. 참고로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

옹호

여성인권 신장

농촌계몽

비판

친일 행위

광복 후 박정희의 독재 옹호

관련 사건

이화여대 친일청산 기획단

이화여자대학교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이하 기획단) 소속 학생 10여명은 서울 이화여대 정문에서 ‘김활란 친일행적 알림팻말 세우기 선포식’을 열어 “민족을 배신한 사람은 이화의 ‘큰 스승’이 아니다”라며 “김활란의 친일 행적을 이화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친일행적을 적은 알림 팻말을 동상 앞에 세우겠다”고 밝혔으며[2] 2017년 11월 13일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는 제목의 팻말을 세웠다.[3] 그러나 이 팻말은 27일 담화문 발표와 함께 학교측에 의해 철거되었다.[3] 이에 대해 정어진 이화여대 친일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장은 “학교가 담화문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학생들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 인사의 동상이 학교에 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인데, 동상을 철거하고 싶지 않은 학교가 논리적이지 못한 해명을 내놓고 있다”고 반박했다.[3]

생애

상훈

  • 교육 부문 대한민국장 - 1963년 8월
  • 일등수교훈장 - 사후인 1970년에 추서되었다.

출처

  • (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김활란 문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김활란, 엇갈리는 평가속 바로보는 눈 필요”. 《이대학보》. 1999년 6월 1일. 
  2. 이대 학생들, ‘초대 총장’ 김활란 친일행적 알리기 나선다
  3. 3.0 3.1 3.2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46.html
  4. 4.0 4.1 4.2 4.3 4.4 4.5 4.6 4.7 “인물사전 / 김활란(金活蘭, 1899. 2. 27~1970. 2. 10)”.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자료 DB》.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5. “역사”. 《한국YM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6. “주요연혁”. 《한국YM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