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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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문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10일 (금) 13:26 판 (새 문서: 1986년 6월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이 운동권이 권인숙을 구금하여 성추행을 동반한 고문을 하고, 전두환 정부가 사건 축소은폐 및 용공조작을 시도한 사건. 당시에는 "부천서 사건", "부천서 권 양 사건" 정도로 불렸다. == 전말 == 전두환 정부 시기에는 대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 등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이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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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이 운동권이 권인숙을 구금하여 성추행을 동반한 고문을 하고, 전두환 정부가 사건 축소은폐 및 용공조작을 시도한 사건. 당시에는 "부천서 사건", "부천서 권 양 사건" 정도로 불렸다.

전말

전두환 정부 시기에는 대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 등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이 흔히 말하는 "운동권"이다. 이 때 고학력자는 노동운동, 반정부활동에 가담할 우려가 크다 하여 생산직에서 대학 출신자를 채용하기를 꺼려했으므로 학력이 낮은 다른 사람의 명의로 위장취업하곤 했다.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생이던 권인숙은 1985년 4월경 경기도 부천시의 <주식회사 성신>에 "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써서 위장취업을 했다가, 1986년 6월 4일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권인숙은 관련 사실을 모두 시인하였으나, 부천경찰서 조사계 문귀동 형사는 86년 5월의 인천 민주화시위 관련자의 행방을 추궁하며 6~7일 양일간 뒷수갑을 채운 채 성추행을 동반한 고문을 하며 수배자의 소재를 추궁했다.

16일 교도소로 옮겨진 권인숙은 다른 재소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28일부터 단식투쟁을 개시,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변호사 등의 도움을 얻어 1986년 7월 3일에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날 권인숙은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가해자인 문귀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며 권인숙을 명예훼손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이에 7월 5일에 권인숙의 변호인단 9명은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고, 문귀동은 권인숙을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그런 와중에 변호인의 입을 통해 이 성고문 사건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언론통제

1986년 7월 17일 경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권인숙을 “급진 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한 가출자",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성적 수치심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라고 호도했으며, 문화공보부(現 문화체육관광부)는 언론에 해당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을 내렸다.

  • 오늘 16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이 보도지침은 1986년 9월 6일 시사 월간지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정부는 이를 폭로한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구속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