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최근 편집: 2017년 8월 2일 (수) 01:35
Larodi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8월 2일 (수) 01:35 판
주의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사고에 대해 담고 있습니다. 비하적인 표현, 유머성 서술, 과도한 피해자 신상 노출을 금해주시고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에 해당하는 위법한 내용이 담기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개요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경 소련의 체르노빌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사고 발생

사고 이전

체르노빌은 4개 원자로를 동시에 가동하는 원자력 발전소였다. 그 중 4호 원자로는 완공된 지 3년 된 새 시설이었다. [주 1]

4월 25일, 사고 전날의 실험 준비

1986년 4월 25일 오전 1시에 원자로 4호기가 검사를 위해 작동이 중지될 예정이었다. 이 검사는 비상시에 예비 디젤 발전기 투입 전까지 발전소가 작동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원자력 발전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수가 꼭 필요한데, 냉각수 펌프는 원자로에 의해 돌아가는 터빈의 에너지로 작동했다. 따라서 원자로가 모종의 이유로 작동중지되었을 때 원자로가 폭발하지 않게 냉각수 펌프가 작동하려면 터빈이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터빈은 원자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에, 예비 발전기가 투입되기 전까지 발전소가 이를 버틸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4호기에는 예비 디젤 발전기가 3대 있었지만[1], 이 발전기는 발전소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출력에 다다르기까지 1분이나 걸렸다.

따라서 이날 실험의 요지는 원자로 작동중지 직전까지 공급된 에너지로 돌아가는 터빈의 관성이, 예비 발전기 작동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을 것인가?였다. 실험은 4월 26일 새벽 1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예정되어 있었고, 원자로의 열 출력을 정격 열 출력의 20~30%인 700MW(메가와트)로 낮추어 실시될 것이었다.

기술자들은 실험 준비를 위해 4월 25일 오전 1시부터 4호기의 출력을 강하하기 시작했다.

오전 3시 47분, 정상 출력의 50%인 1,600MW까지 출력이 낮추어져 이 상태가 오후 2시까지 유지되었고 4호기에 연결된 터빈 발전기 중 7호와 8호가 분리되었다. 오후 2시, 기술자들은 실험 도중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ECCS(비상 노심 냉각 장치)[주 2]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이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이날 오후 11시 10분까지 전력을 공급해줄 것을 발전소에 요청하였기 때문에, 출력 강하가 정지되고 실험은 중지되었다. 원자로의 낮은 출력 상태가 지속되자 노심의 중성자 수는 감소하였고, 정상 상태에서 중성자를 흡수하여 안정해지는 제논-135(135Xe)가 안정하지 못한 상태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키예프로의 전력 공급이 끝난 이후 원래 목표했던 출력인 700~1,000MW로 강하가 시작되어 자정 직후에 목표 수준인 720MW까지 출력이 내려갔다.

4월 26일, 사고 당일

유리 카르네프와 냉각수 펌프 관리자인 보리스 스톨리아추크를 비롯한 이날의 야간 근무자들은 평소와 달리 안전 검사를 시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사실 검사는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상주하는 낮에 실시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원자로 가동이 중지되어 원전 인근 키예프[주 3]로의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발전소 전력 공급량이 최소인 밤까지 검사는 연기되었고, 주임 과학자들이 모두 퇴근했기 때문에 하급팀이 4호기의 검사를 맡게 된 것이다.

유리 카르네프는 터빈실에서 터빈을 살피고 수치를 읽은 뒤 검사 개시를 기다렸다. 보리스 스톨리아추크는 원자로에서 300m 떨어진 통제실에 있었고, 레오니드 토프투노프는 원자로 통제를 맡았다.

4월 26일 오전 12시 5분, 레오니드는 제어봉[주 4]을 이용해 서서히 출력을 줄여갔다[주 5]. 그러나 12시 28분, 알 수 없는 이유로 출력이 떨어지기 시작해 30MW가 되었다. 이에 안전요원들은 제어봉을 빼서 출력을 증가시켰다. 1시, 레오니드는 원자로가 안정됐다고 판단해 검사 준비 작업을 진행한다. 사실 이때의 전력 상승은 200MW 정도에서 멈추었고, 이는 제어봉을 제거한 상태에서 추가로 발생한 중성자가 전날 잠시 중단된 원자로에 쌓여있던 제논-135에 의해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시 3분, 냉각수를 공급하는 주 펌프를 원자로 고의 정전 중에 멈출 것이기 때문에 펌프 관리자 보리스는 검사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원자로 노심 주변의 물 흐름을 바꾸었다. 그는 평소에는 작동시키지 않던 2개의 보조 펌프를 작동시켜 다른 곳의 물을 4호기로 돌리려 했고, 이 과정에서 물이 원자로에 너무 빨리 주입되었다. 원자로 연료봉 위의 물의 흐름이 너무 빨라지면 물이 터빈을 돌릴 만큼 충분한 양의 수증기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균형이 어긋난다. 물을 더 공급한 뒤 15분이 경과하자 터빈을 돌릴 만큼의 수증기가 충분히 생성되지 않았다.

1시 19분, 작업팀은 원자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보리스는 증기 드럼[주 6]에 물을 공급했다. 그러나 증기 드럼에 찬물을 너무 많이 주입하는 바람에 초과된 물이 노심으로 들어갔고, 또 증기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 증기량이 감소하면 원자로가 자동 정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발전소는 또 인위적으로 ECCS가 작동하지 않게 조작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자로의 출력이 목표치보다 여젼히 낮았기에 제논-135의 축적은 계속되었고, 출력은 높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증기가 더더욱 발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2분 30초(사고 2분 전), 컴퓨터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반응로에서의 제어봉 위치. 숫자는 반응로 안으로 삽입된 깊이를 나타낸 것이며, 센티미터 단위이다. 녹색: 제어봉 (167개) 파란색: 중성자 감지기 (12개) 노란색: 반응로 중심으로부터 나온 짧아진 흡수재 봉 (32개) 회색: 압력관 (1,661개) 붉은색: 자동 제어봉 (12개)

1시 20분, 레오니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료봉을 더 빼 원자로 노심의 출력을 늘렸고, 뜨거워진 원자로는 터빈을 돌릴 수증기를 더 생성했다. 체르노빌 운전 수칙은 제어봉의 수를 최소 26개로 규정[2]하지만, 레오니드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 제어봉을 단 6개만 남겼다.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은 레오니드와 보리스는 검사 준비 작업을 계속했으나, 노심이 과열되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내 통제실은 터빈실의 유리에게 준비가 끝나 검사를 시작한다고 전달했다.

700MW 이하의 낮은 출력 상태에서 장시간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 역시 안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시 23분, 운전원은 계획대로 터빈의 전원을 껐고 1시 24분 4초, 발전용 터빈에 도달하는 증기는 차단되었다. 냉각 펌프에 전달되는 에너지는 감소하였고, 그에 따라 냉각수의 양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35초 후에는 실험을 시작할 때의 10~15%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에 냉각수는 기화하여 노심의 수증기가 되었으며, RBMK 원전보이드 효과에 의해 핵반응 속도까지 증가하였다.

레오니드는 원자로의 노심 온도가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노심 헤드의 압력이 급속히 상승해 통제실에 경고음이 울렸다. 원자로를 담당한 레오니드는 24분 40초 경에 원자로 긴급 정지 시스템(A3-5)을 작동시켰다. 시스템은 제어봉을 다시 삽입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빠져 있던 제어봉이 삽입되기까지 걸리는 18초는 너무 길었다. 심지어 제어봉이 삽입되는 동안, 축적된 제논-135가 다량 발생한 중성자를 흡수하였고, 또다른 중성자 흡수원인 냉각수를 제어봉이 밀어내 버렸다.

그러자 원자로 열 출력이 보통 수치의 100배(300,000MW) 이상 올라갔고 엄청난 열은 노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사고 발생

1시 24분이 끝나가는 시점, 4호기가 폭발한다. 2,000톤의 원자로 강철 뚜껑이 날아가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고방사성 연료 8톤이 하늘로 솟구쳤고[주 7], 이 어마어마한 방사성 물질은 대기 중에 퍼졌다. 터빈실의 지붕이 무너져내렸다. 4호기 인근 운하에서 낚시를 하다가 폭발을 목격한 낚시꾼 표트르 톨스티아코프는 훗날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폭발이라는 말은 부정확하다. 꼭 화산폭발 같았다"고 회상했다.

사고 대처

사고 대처: 직후

폭발 4분만에 소방관 14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4호기의 화재를 막는 데에 14명은 역부족이었고, 이후 지원요청을 받고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휘하의 체르노빌 소방대가 더 도착했다. 전 세계적으로 회자될 핵 재앙 한 가운데에 자신들이 내던져졌다는 것을 아는 소방관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당연히 피폭을 막을 만한 장비는 전무했다. 결국 소방관들은 속속 이상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 역시 사력을 다해 화재를 진압했다.

새벽 5시경 화재는 진압된 듯 보였으나 이때 사용된 물은 4호기에서 기화되었고 화학반응을 일으켜 가연성 물질을 대량으로 발생시켰다. 이에 4월 26일 오후 9시 41분, 다시금 폭발이 일어났다.

개박살이 난 원자로가 계속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 동안, 소련 당국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당시는 소련과 서방세계가 대치하는 냉전 시기의 끝을 향해 가는 시기였기에[주 8] 고르바초프 총리는 재난을 숨겼다. 한편 소련 당국은 폭발 직후 자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소집한다. 사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융해되고 있는 노심 속으로 들어가는 미친 짓을 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사고 현장에서 104km 떨어진 키예프의 주민들은 이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과학자들은 노심이 식수원이 있는 지하수면에 도달할까 봐 우려했다. 노심이 녹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베냐민 프라이나슈니코프가 폭 80cm 터널을 기어 통과했다. 이후 고백했지만, 심지어 그는 자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심이 지하수면에 녹아들지 않았다고 베냐민이 확인해주지만 당국은 원자로 밑에 거대한 콘크리트 판을 깔기로 하였다. 이후 접속 터널을 짓기 위해 400명의 광부가 낮밤으로 땅을 파서 15일 만에 168m 길이의 터널을 완성하였고 콘크리트 판도 설치할 수 있었다.

사고 대처: 대피

발전소 직원 가족의 많은 수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리피야트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5만 명에 육박하는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비밀리에 대피시키기 위해 군을 소집하고 1,200대의 버스 수송대를 구성했다. 사고 발생 36시간 뒤, 프리피야트 주민들에게 안내 방송을 통해 첫 공식 정보가 전달된다.

동무들은 들으십시오
부적절한 방사능 문제가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일어나 임시 예방 차원에서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대피시킬 것입니다

부적절한 방사능 문제이긴 한데..

주민들은 짐과 식량, 신분증과 현금을 챙겨 버스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는다. 원전 직원인 가족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도 예외는 없었다. 오후 2시, 대피가 시작되고 3시간 후 프리피야트는 텅 빈 유령도시가 되었다.3시간 만에 5만 명을 이송해 버리다니 이때의 버스와 트럭의 행렬이 15km나 되었다고 한다.

사고 대처: 대피 이후

프리피야트 주민들의 대피 이후 6일간 헬기 1,800대가 동원되어 5,000톤의 약품[주 9]을 4호기 상공에 뿌려 방사능을 흡수하려 노력했지만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았으므로 원자로 위에 헬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헬기들은 4호기 상공을 지나가며 약품을 뿌려야만 했고, 흙이 4호기 주변에 뿌려져 열에너지를 지켜주는 바람에 중단하였다.

5월 9일, 옆의 3호기에서 액체질소를 끌어와 4호기에 주입하는 방법으로 화재 진압에 성공하였다.

광부를 갈아넣어 만든 터널로 깔아놓은 콘크리트 판이, 노심이 지하수면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긴 했지만, 방사성 용암 200톤이 콘크리트 판 위 원자로 잔해 내에 남아 있어서 그곳의 방사능이 피해를 끼칠 것을 염려한 당국은 원자로 전체를 콘크리트로 둘러싸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폭발 때 나온 방사능 파편이 치사량의 방사선을 발산했고, 당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사능 파편을 치우는 일은 군대에게 맡겨졌다. 소련 전역에서 차출된 수많은 ‘청산인’들을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이 통솔하게 되었다.

정치국 회의에서 절 소집해 제가 가장 능력 있고 용기 있는 장군이니 병사들의 핵연료 제거 작업을 지휘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미쳤냐고, 병사들이 로봇이냐고 했죠.[3]

병사들은 방사능 파편을 파괴된 노심에 퍼넣었다. 부족한 방호복 때문에 우의 등에 납을 부착해 급하게 만든 납옷[주 10]을 입고 한 사람당 돌아가며 3분씩 일하게 하였다. 이중 다수가 이로 인한 피폭으로 몇 년 후 사망하였다. 공산주의가 이룩해낸 인권 착취가 전세계를 구했다고밖에...

당국은 군이 청소 작업을 하는 동안 콘크리트 엄호를 건설했는데, 206일만에 완공되었다. 치명적인 우라늄 200톤과 그보다 더한 플루토늄 1톤이 엄호 안에 남아 있는 상태로.

대외적 상황

취임 1년째였던 소련의 총리 고르바초프는 이 사실을 미국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미국이 이 정보를 통해 소련 핵 기술을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으며 국제적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 그러나 대기 중으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은 가히 엄청났고, 폭발 규모 역시 매우 컸다. 당연히 소련은 이 사고를 은폐할 수 없었다.

사고 발생 28초 후 미국 위성이 포착한 체르노빌
사진의 붉은 색이 원자력 발전소이다.

냉전 시기의 미국 인공위성은 소련을 감시 중이었는데, 이 위성이 마침 폭발 28초 후 체르노빌 위를 지나가며 사진을 찍었다. 미 정보부는 처음 사진을 보고 소련이 핵미사일을 쏘았다고 생각했으나, 강한 열을 뜻하는 붉은색이 체르노빌 원전을 물들인 것을 보고 이내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한편 방사능 낙진은 이웃의 유럽 국가까지 이미 도달해 있었다.

사건발생 후 이틀이 지난 4월 28일 월요일, 스웨덴의 원자력 공학자 클리프 로빈슨은 체르노빌로부터 1,600km 떨어져 있는 스웨덴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했다. 원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사능 모니터를 통과해야 했는데, 모니터는 그가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 말해주었다. 통제구역에 발도 디디지 않았던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뒤이어 출근한 다른 직원들도 기계에 의해 출입을 통제받기 시작했다. 기계 안내에 따라 신발이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클리프는 검출기에 자신의 신발을 넣고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신발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하게 오염되었던 것이다. 직원들은 방사능 낙진의 발원지가 포스막 원전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오염원을 추적하던 스웨덴 과학자들은 그날 오후, 소련을 지목했다. 스웨덴은 소련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압박에 못이긴 소련은 사고를 시인했다.

사고는 다음 날부터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사건발생 이후 3일이 지난 시각이었다. [주 11] 곧이어 유럽 전역에 출현하기 시작한 낙진은 10일 뒤, 북미 대륙과 일본에까지 도달한다.


피해

인명 피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단연 폭발 직후 방호복도 없이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이었다. 소방관들은 자신들이 진화하고 있는 시설이 원자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때 출동했던 표트르 크멜 서장은 "그것이 원자로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소방관들은 90여분 간 화재를 진압하려 노력하다가 하나둘씩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는다. 새벽 5시, 겨우 불이 진압되고 소방관들은 긴급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69명의 소방관 중 31명이 피폭으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목숨을 부지한 대신 급성 방사선 증후군[주 12]에 시달린다. 체르노빌 소방대를 지휘하여 3호기를 지켜낸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은 텔랴트니코프는 2004년, 53세라는 젊은 나이에 으로 사망한다. 그가 당시 살아남은 38명의 소방관 중 한 명임을 감안하면, 결국 피폭으로 인한 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31명보다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프리피야트

주변 지역

세계적인 피해

사고 이후

소련 붕괴

소련의 피해는 엄청났다. 사람을 헐값에 갈아넣었다고는 하지만, 아톰그라드[주 13] 중에서 가장 성공한 편이었던 프리피야트를 포기했어야 함은 물론, 사고를 수습하느라 심각하게 오염된 장비들까지도 현장에 그대로 방치하거나 폐기해야만 했다. 이때 버려진 헬기가 Mi-6. 다음 버전인 세계 최대 헬리콥터 Mi-26도 함께 투입되었다가 이후 수리를 통해 복구했다. 또한 사고 지역 인근에는 단 2대밖에 없는 초대형 핵미사일 감지 레이더 DUGA-3가 위치한 비밀 기지가 있었고, 이 역시 방사능 오염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피야트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에 든 비용도 만만찮았다. 치밀한 눈치 싸움, 군사력이 중요했던 냉전 시기에 막대한 국가 이미지 손상과 더불어 실제 경제적, 군사적인 타격까지 입고 말았던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총리 겸 공산당 서기장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사고 수습을 위해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에 맞먹었을 정도라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구소련의 붕괴를 부른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했다. 이에 대해선, 미국과의 군비 경쟁 비용과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 들인 비용으로 인한 천문학적인 재정적 지출,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방세계 업체 사이의 치킨 게임으로 인한 석유값 폭락에 의한 석유 수출 이익 급감으로 이미 큰 재정적 부담을 진 상태에서, 안 그래도 휘청이던 소련의 경제를 이 사고의 여파가 미국SDI 계획과 손잡고 펑! 터뜨렸다고마치 그 발전소처럼 보는 것이 정설.

관광 산업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수습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각주

  1. 원자로는 연료가 물을 데우면 그때 나온 수증기가 터빈을 돌려 전력이 생산되는 화석연료와 같은 원리를 취한다. 화석연료 대신 핵연료를 사용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참고로 우라늄 1kg은 석탄 3000톤에 버금가는 에너지를 낸다.
  2.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
  3.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4. 체르노빌 원전 4호기의 제어봉은 211개였다.
  5. 긴 우라늄 봉을 이용해 원자로 노심에서 열을 일으키면, 노심에 삽입된 제어봉이 우라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양을 제어한다. 제어봉을 위로 올리면(빼면) 원자로의 출력 속도가 증가하고, 제어봉을 아래로 내리면(넣으면) 원자로의 출력 속도가 감소한다.
  6. 물과 수증기량을 조절하는 중앙 격실. 증기 드럼의 물 부피를 늘리면 증기압은 정상치까지 상승한다.
  7. 조사관들은 이 연료가 지상 1km까지 솟구쳤다고 추정한다.
  8.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소련의 해체에 큰 역할을 했고 냉전 시기는 얼마 못 가 끝이 난다
  9.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
  10. 그 무게가 30kg에 육박했다고 한다.
  11. 전세계 신문의 1면을 체르노빌 원전이 장식했지만, 정작 소련 내부에서는 사건이 축소 보도된다.
  12. 화학 화상, 심장병, 폐와 면역계 손상 등
  13. 원자력 발전소를 가진 기술 도시

출처

  1. 현원복 (1986년 10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진상”. 《과학동아》: 44-47
  2.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상 최악의 사고 체르노빌 원전 편
  3.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상 최악의 참사 체르노빌 원전사고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