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죽(한문: 朱世竹, 1901년 6월 2일 ~ 1953년)은 신여성 중 한 명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독립운동가다.
생애[1]
1901년 함경남도 함흥의 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함흥의 영생여학교를 2년 다닌 뒤 서울로 올라와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중등학교 시절 기미년 3.1운동 참가를 이유로 함흥경찰서에 체포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됐다. 함흥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21년 4월 중국 상해 음악학교에 입학해 피아노 공부를 하던 중 사회주의를 접하고, 6월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상해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22년 귀국 후 박원희, 정종명, 김필애, 정칠성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설립했다. 1924년 11월 7일 박헌영과 결혼했다. 1925년 1월 허정숙, 박원희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2월에는 '화요회' 주도로 열린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고,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의 중국집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의 주최로 열린 조선공산당 창당준비대회에 참여한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에서 신만청년회 회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지고, 김재봉, 박헌영 등과 함께 체포됭었다. 주세죽은 약 3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남편이 1927년 병보석으로 출소한 뒤 러시아로 탈출하던 도중 1928년 9월 1일 청진 함경선 기차 안에서 딸 비비안나를 낳았다. 두 사람은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탈출했고, 이 사연을 노래로 만든 것이 '눈물 젖은 두만강'이다.
1928년 11월 5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주세죽은 고명자가 다니는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하고, '코레예바'라는 가명으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박헌영이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그가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주세죽은 1937년 김단야와 재혼했다. 1937년 11월 5일 주세죽과 김단야는 화요파 인물들과 함께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체포된 뒤 김단야는 일본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고, 주세죽은 카자흐스탄으로 5년 유배형을 받았다. 1943년 형기가 만료되었으나 3년 더 연장되었고, 1945년 8월 광복 후에도 고국에 귀환하지 못 했다.
해방 후 좌익정당활동을 하다가 월북했던 박헌영은 1953년 3월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를 듣고 모스크바에서 발레리나로 활동하는 딸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했으나 도중 폐렴이 걸려 도착 직후 사망했다. 모스크바 시내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89년에 소련은 주세죽의 명예를 회복하고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의 납골당에 러시아명 '한베라'로 안치하였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