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튼실링

최근 편집: 2023년 1월 6일 (금) 19:06

트랜스젠더에 대한 성차별혐오에 기인한, 트랜스젠더들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지 않았을 때는 연애를 잘하다가, 커밍아웃하면 연인에게 바로 차이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애인의 면팬티를 넘지 못한다(섹스 혹은 연애를 못한다)[주 1]고 해서 코튼 실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리 천장이나 대나무 천장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온 용어이기도 하다.

해당 용어의 문제점

유리천장대나무천장이라는 단어는 여성이거나 특정인종으로 인해 고위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남성사회의 구조적 억압을 뜻하는 반면, 코튼 실링은 트랜스젠더가 겪는 사회의 구조적 억압이 아닌 성적 관계에서의 차별만을 주목한다.

사회의 구조적 억압에 바탕을 둔 트랜스젠더 차별에서 사적 영역인 섹슈얼/로맨틱 관계를 한정하여 조명하고, 이를 "면팬티를 넘지 못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닌다.

  1. 성적 관계를 연애에 당연히 수반되는 것으로 여기는 유성애 중심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으며, 연애를 성취해야할 대상이자 권리로 보는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2. 트랜스젠더임을 커밍아웃할 경우 겪을 수 있는 광범위한 관계폭력-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 데이트폭력 등-을 축소한다.
  3. 해당 단어가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의 원인을 사회의 차별적 인식이 아닌 개인(상대)으로 환원시키며, '성적 관계에서의 거절'을 불이익으로 표현한다.

'성적 관계에서 거절됨'을 피해사례로 보는 서술은 페미니즘의 중심의제이자 기본권인 성적 자기결정권과도 상충한다.

반론

연인간 사적 관계에서의 차별이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시스젠더였다면 겪지 않았을 부당한 대우에 기인한다면 이는 트랜스젠더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구조적 억압이 아니라 할 수 없으며, 유리천장 등의 용어에 빗대어 '면팬티를 넘지 못한다'는 표현 역시 부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또한, 코튼실링이라는 말이 유성애 중심적 사고에 기반한다는 비판은 논점일탈의 오류일뿐더러,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상당부분 공적, 사적 영역에서 '실패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불균등한 기회 부여'에 근거한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무성애, 무로맨틱, 반성애적인 삶은 시스젠더라는 이유로 강요받을 수 없듯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도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본 용어는 어디까지나 트랜스젠더들이 연애와 같은 사적 대인관계에서조차 시스젠더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차별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불평등을 지적하는 용어임에도 트랜스젠더들이 트랜스젠더란 이유로 성행위를 비롯한 인간관계 일체를 거절당하는 현상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정당한 행사라 주장하며 유성애규범적 사회에서 배제하려 드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근거로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므로 모순이다.

그리고, 면팬티를 넘지 못한다는 표현이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으로 환원시킨다는 혐의는 오히려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와의 대인 관계를 '성적 자기결정권'을 이유로 거부하는 '파트너' 측에게 있다. 자신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과 시스젠더와는 다른 신체를 '불쾌'하게 여기고, 연인이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젠더였더라면, 자신이 연인의 평범치 않은 성별 정체성에 대해 몰랐더라면 자신은 연인과의 교제를 계속했을 것임은 연인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임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핑계삼아 결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내재된 트랜스젠더혐오가 아닌 '매력적이지 않은 상대방'에게만 돌리는 현상은 트랜스젠더들이 차별과 혐오를 자초하였으며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은 정당하다는 논리로 여겨질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자신과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연인이 알고보니 장애인임을 알았다는 이유로 결별을 통보하는 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자신이 연인에게 결별을 통보하거나 연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는 이유가 매력적이지 않은 상대방의 책임이며 자신의 거부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정당한 행사일지라도, 자신이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자신과 처음 만날 때부터 상대방에게 기대했던 몸을 상대방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면 이는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잘못이 아닌 시스젠더 중심적 사고에 기반한 자신의 선입견, 편견 때문임을 거부하는 측에서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사회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커밍아웃한 사람에게 연인이 '성별 정체성', '몸'을 이유로 내세우는 거부는 트랜스젠더 개인을 사기꾼이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연인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이유로 들어야만 하는 이러한 거부 의사는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를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흔히 "클럽에서 여자 만나 정신줄 놓도록 술 먹이고 원나잇하러 모텔 데려가서 벗겨봤는데 여자가 아니어서 그냥 나왔다" 따위의 강간 문화 속 트래쉬 토크는 트랜스포비아에 젖은 시스젠더들에게는 어떤 여성의 성폭력 생존기가 아니라 '여장남자한테 사기당한 썰'로 여겨진다. 당사자가 아니면 쉬이 실감하지 못하는 코튼실링이 실제로 기능하는 가장 추악한 상황을 가정할 때도 트랜스젠더 혐오자들은 '다행'이라고, 심지어는 '강간을 모면하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특권'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렇듯 코튼실링이라는 단어는 그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시스젠더 규범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시스젠더들이 트랜스젠더에게 느끼는 편견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사례

  • HUS X Ban:)ax의 Wonder Man 가사에서는 남성 화자의 입장에서 여자친구가 "그게 있는", "목소리가", "발 치수가" 다른 트랜스젠더 여성임을 알자 "거짓말이야", "반칙이잖아"의 비난을 하고는 "오빠라고 부르지 말아줘 Brother"라는 미스젠더링을 가한다.

부연 설명

  1. 그러나 이 문서에서 소개하는 코튼실링이라는 단어의 배경을 곱씹어보면 이는 '애인의 면팬티를 넘지 못한다'는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면팬티를 넘지 못한다'는, 즉 자의적/타의적 아우팅에 대한 두려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