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최근 편집: 2023년 3월 11일 (토) 23:34
수동문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11일 (토) 23:34 판

1986년 6월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이 운동권의 권인숙을 구금하여 성추행을 동반한 고문을 하고, 전두환 정부가 사건 축소은폐 및 용공조작을 시도한 사건. 당시에는 "부천서 사건", "부천서 권 양 사건" 정도로 불렸다.

전말

전두환 정부 시기에는 대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 등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이 흔히 말하는 "운동권"이다. 이 때 고학력자는 노동운동, 반정부활동에 가담할 우려가 크다 하여 생산직에서 대학 출신자를 채용하기를 꺼려했으므로 학력이 낮은 다른 사람의 명의로 위장취업하곤 했다.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생이던 권인숙은 1985년 4월경 경기도 부천시의 <주식회사 성신>에 "허명숙"이라는 가명을 써서 위장취업을 했다가, 1986년 6월 4일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권인숙은 관련 사실을 모두 시인하였으나, 부천경찰서 조사계 문귀동 형사는 86년 5월의 인천 민주화시위 관련자의 행방을 추궁하며 6~7일 양일간 뒷수갑을 채운 채 성추행을 동반한 고문을 하며 수배자의 소재를 추궁했다.

16일 교도소로 옮겨진 권인숙은 다른 재소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28일부터 단식투쟁을 개시, 조영래, 홍성우, 이상수 변호사 등의 도움을 얻어 1986년 7월 3일에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날 권인숙은 공문서변조 및 동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가해자인 문귀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자신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며 권인숙을 명예훼손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발했다. 이에 7월 5일에 권인숙의 변호인단 9명은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독직, 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고, 문귀동은 권인숙을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수사과정

수사를 맡은 인천지검의 김경회 검사장은 김성기 법무부장관에게서 "원칙대로 파헤치라"는 호언장담을 받았으나, 7월 15일 오전 김경회 검사장은 검찰총장 서동권에게 불려가 '안기부에서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하나회 회원으로 전두환 정부 실세 중 하나였던 장세동이었다. 7월 16일 아침에는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가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는 검사장실로 들어와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김경회는 검사장이 직접 수사결과를 발표하라는 대검찰청의 지시를 거부했다. 다음날 검찰총장의 유선상 내리갈굼이 있었고, 문귀동에 대해 기소유예처분을 내리자 장관이 간부들에게 나눠주라며 격려금을 보냈다고 한다.

언론통제

1986년 7월 17일 공안당국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권인숙을 "權의 성모욕주장은 급진세력 등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투쟁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구명은 물론 사회일반의 반정부·반공권력 투쟁을 확산하려는 선동적 조작으로 분석된다", "이들 좌경의식화 세력은 성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내던져버림으로써 투쟁과 혁명을 위해서는 어떤 가치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등으로 호도했다.[1] 조선일보는 7월 17일자 기사에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 폭행만 했다'(86년 7월17일치)는 검찰 발표문을 제목으로 뽑았고, 편집국 내에선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며 `보호해 줄 가치가 없다'는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검찰출입기자들은 뒷돈을 받아 챙겼다고 한다.[2] 집권여당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김중위는 "권인숙의 정신감정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공보부(現 문화체육관광부)는 언론에 해당 사건에 대한 보도지침을 내렸다.

  • 오늘 16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할 것
  •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 시중에 나도는 반체제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이 보도지침은 안기부장 장세동이 지시한 것으로, 1986년 9월 6일 시사 월간지 《월간 말》 특집호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정부는 이를 폭로한 김태홍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구속했다.

재정신청

검찰이 문귀동을 기소유예처분하자 권인숙 측 변호인단은 9월 1일 불복하여 재정신청하였고, 무려 166명의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했는데,[주 1] 사흘 후 기각되어 서울고검으로 송치되고, 9월 30일에 기각되었다.

10월 1일에 변호인단이 서울고법에도 재정신청을 내고 법관기피신청을 내었으나 기피신청이 기각,[3] 31일에 서울고법은 "권인숙의 일방적인 진술만으로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다"며 재정신청을 기각했고, "피의자 문귀동은 직무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수사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파면되고 비등한 여론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기소유예 처분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11월 7일에 변호인단이 낸 대법원 재항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월 4일 인천지법의 선고공판은 “비록 목적이 근로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심정에서 위장 취업했다고 하나 남의 주민등록증을 훔쳐 사진을 갈아붙이고 기타 인적사항을 도용해 이력서를 작성한 행위는 그 방법에 있어 지나치다”며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7일 후 신청한 항소도 기각된 후 4월에 변호인단이 대법원에 상고포기서를 제출하며 형이 확정되었다.

결말

6.29. 민주화 직후인 1987년 7월 8일 권인숙가석방되고, 1988년 1월 29일 대법원이 재정신청을 수용했다.[4] 문귀동에 대한 기소유예처분이 취소되었고,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을 받아 수감되었다. 권인숙의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받아들여졌다.

부연설명

  1. 이 변호인단 중에는 박원순도 있었다. 이 변호인단은 훗날 민변으로 발전한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