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마리아

최근 편집: 2023년 12월 26일 (화) 12:04
박마리아
출생1906년 4월 19일
대한제국 강원도 강릉시
사망1960년 4월 28일(5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무대 별관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밴더빌트 피바디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경력대한민국 자유당 교육행정특보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 대한민국 문교부 특임행정촉탁위원
종교개신교 (감리회)
정보 수정

일제강점기 시기 교육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제1공화국 시기 자유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생애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의 폐지와 금주·금연 등의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 1932년 테네시주 스카릿(Scarlet)대학을 졸업한 후 같은 해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피바디(Peabody) 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

1935년 이기붕(李起鵬)과 혼인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다. 1942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결성, 활동하였다.

해방기에는 한국어를 모르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친목을 형성하며 남편 이기붕을 이승만의 비서로 입직, 정계에 진출시켰다. 이기붕이 자유당 의장의 자리에 오르자 남편의 권력을 기반으로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및 부총장, YWCA 회장에 부임했다.

1957년에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의 관계를 다지고, 1960년의 3·15 부정선거에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으며, 대한부인회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으로 출마한 임영신 후보를 반동행위라며 비난하였다.[1]

4·19 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경무대로 피신, 4월 28일 가족 모두가 권총으로 집단 자살하였다.

대중매체에서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