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와 똥가방
- 밀항 탈출
- 급히 마산으로 내려가다 | 성공 확률 5%, 작전 계획을 세우다 | 암호를 정하다 | 잠입을 시도하다 | 비상식량을 확보하다 | 드디어 출항하다 | 영해를 벗어나다
- 부마항쟁에서 5.18까지
- 부마항쟁의 충격 | 항쟁을 예감하다 | 최선을 다해 대비하자 | 모두 내 말을 웃어 넘기다 | 혼자서 준비해 나가다 | 호소에 반응이 나타나다 | 기습을 당하다 | 비겁하게 피신하다 | 회한의 서울 도피 생활 | 가증스러운 적들의 조작 | 독일 망명을 시도하다 | 광주 운동권의 걱정 | 망명 결심과 준비
- 밀항선 속에서
- 살인적인 더위와 굶주림 | 토끼, 용궁에 갔다 오다 | 배멀미에 녹초가 되다 | 지루한 나날들 | 정찬대와 최동현의 밀항 협조 전말 | 상륙 준비 | 요트가 안 보이다 |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다
- 미국 상륙과 정치 망명
- 마침내 미국땅을 밟다 | 암호명 봉선화와 진달래 | 풀리는 의문들 | 이민국 출두 명령의 거부 | 망명생활을 위한 각오와 다짐 | 망명 생활의 수칙을 정하다 | 이민국 출두와 정치망명 신청 | 6년간 끌어버린 망명재판
- 해외운동을 준비하다
- 동양식품점에서 일하다 | 해외운동에 대한 학습 | L.A로 옮기다 | L.A의 김상원 | 광주 수난자 돕기회를 만들다 | 박관현의 옥사와 10일 간의 항의 단식 | 미주운동의 역사와 현황 | 망명 사실이 탄로나다
- 민족학교 설립
- 해외 운동 10년 계획을 세우다 | 민족학교의 설립 | 사면팔방의 중상모략 | 신분을 밝히다 | 초미니 데모 | 민족학교 초기의 어려움 | 평화시위장의 충격 | 인종차별 규탄 시위장의 충격 | DJ의 LA강연 | 망월 묘역의 흙과 꼬방동네의 흙
- 해외 활동 1
- 재미한국청년연합의 결성 | 미국의 중남미 개입 규탄시위장의 충격 | 각 지역의 마당집 설립 | “임금님 사위 항쟁이 뭡니까? | 터닦기와 틀잡기 – 문화운동(1) | 운동의 생활화 – 문화 운동(2)
- 해외 활동 2
- 국제 외교 연대운동 | 6년 만의 망명 허가 | LA 한인회장 선거의 승리와 패배
- 해외 활동 3
- 한겨레운동 재미동포 연합(한겨레) 결성 | 87년 대선과 절망 |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 시도와 실패 | 전두환, 노태우 방미 규탄시위 | 5.18 기념행사 개최 | 건강이 나빠지다 | 조국 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원 | "거지들 모임 같다"
- 해외 활동 4
- FBI의 교묘한 탄압 | 운동화와 똥가방 | 여행증명서와 영주권을 받다 | 핵무기 철거요청 10만 명 서명운동 | 윤한봉 선생 귀국 추진위원회의 결성 | 광주 청문회와 헛된 귀국의 꿈 | 어머님이 찾아 오시다
- 국제평화대행진과 미주평화행진
- 해외 활동 6
- 노태우 일당의 악랄한 중상모략 | DJ의 추악한 중상모략 | 22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 해외 활동 7
- 「범민련」과의 갈등 | 일본지역 운동과의 갈등 | 15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 해외한국청년운동연합(해외한청련)의 결성 | 제2차 국제 대행진의 포기 | 4.29 LA 폭동을 겪다
- 미국에서 보고 느낀 것들
- 해외 활동 8
- 남-북 UN 분리가입과 눈물 | 정세변화와 강령 개정 | 재미한국청년연합 강령 | 정만수 이주영 장학금 | 재미 동포사회의 문제점 | 민족적 수치 | 마음 고생 | 위로, 격려해주신 방미 인사들 | 조국의 전쟁 위기에 대응하다
- 조국에 돌아와서
- 12년 만의 귀국 | 망명생활의 청산과 영구 귀국 | 정치의 충격 | 사회의 충격 | 지역주의의 충격 | 광주의 충격 |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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