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진 여성 항일운동
- <암살>의 전지현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 1900명 넘는다
- 1919년 3.1운동 직후인 3월 중순에 정신여학교 동창인 오현주, 오현관, 장선희 등이 '혈성단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4월에 기독교계통의 여학교 출신인 최숙자, 김희옥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1]
- 1919년 6월 한영신 등이 조직한 평양장로교계 부인회와 박승일 등이 조직한 감리교계 부인회가 임시정부의 권유로 11월에 연합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대한애국부인회'가 결성되었다.
- '대한애국부인회'는 통합된 후 각 지방에 지회를 두고 군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1920년 10월에 군자금을 송치하던 회원들이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1~3년의 형을 선고받고 해체되었다.
- 그외 3.1운동 이후 1920년대까지 조직된 여성항일단체: 대한부인청년단(평남 사천), 대한국민부인향촌회(평남 순천), 부인관찰단(평남 안주), 대한독립부인청년단(평남 대동), 여자복음회(평남 개천), 의용단과학생구국단(부산)
- 1927년 5월에 민족주의 여성운동계인 김활란, 유영준, 유각경 등과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인 박원민, 정종명 등이 '근우회'를 창립하였다.
- '근우회'는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실시, 문맹퇴치, 여공파업의 진상조사, 고아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일제의 탄압과 여성운동자들과의 사상적 차이로 1931년에 해체되었다.
- '근우회'가 해체된 후, 여성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국내항일비밀단체 또는 동북항일유격대,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등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 1905년 4월 일본에서 김정화, 나혜석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2.8독립선언에 적극 참가하였다.
- 1919년 9월 훈춘에서 김숙경 등 여성 200여 명이 '훈춘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 1919년 10월 상해에서 이화숙, 김원경, 이선실 등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조하였으나,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의 활동이 축소되면서 부인회의 활동 또한 줄어들었다.
- 1943년 2월 충칭에서 각계 여성 50여 명이 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가진후 김순애를 주석으로 방순희를 부주석으로 선임하여 군인위문, 여성 계몽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항일 운동가
남성 항일 운동가
참조
-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년 12월 14일). 《6.25 전쟁 여군 참전사》. ISBN 978-89-89768-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