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돌아와서(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23년 6월 16일 (금) 13:21


12년 만의 귀국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베르롤트 브레히트, 나의 어머니

93년 5월 12일의 늦은 오후 서울의 모 신문사 기자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영상 대통령의 특별담화 내용 중에 나의 수배해제와 귀국허용 조치가 들어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다. 나는 한참 동안을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원수 같은 전화는 그때부터 귀국하는 순간까지 내게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을 잠시도 주지 않았다. 정말로 빗발치듯했다. 시간차를 모르는 듯 한밤중에도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축하 전화, 인터뷰 요청 전화,내일이라도 당장 귀국하라는 광주로부터의 독촉 전화,가족들 전화,각 지역의 회원들 전화…

나는 92년 말부터 조국에서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 귀국을 허용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공안정국 때문에 일시 활동이 중단되었던 나의 ‘귀국 추진위원회’가 92년 3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은 말할 것도 없고,(진정추)가 앞장서서 나의 귀국 허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전개해서 7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다는 소식,광주의 재야와 5.18 관련 단체들도 5.18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나의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소식,YS 정권에서도 5.18 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 등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늦어도 연말에는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정부 당국이 나의 귀국을 허용하더라도 사전에 귀국 허용 조건으로 미국 내에서의 활동을 반성한다느니 YS 정권을 지지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각서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그럴 경우에는 5월 영령들과 해외한청련,한겨레와 각 지역 마당집과 우리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각오까지 단단히 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 대한 수배해제와 귀국 허용조치가 나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대통령의 담화를 통해서 내려져 버린 것이다.

나는 전화에 시달리면서도 순간순간 생각을 정리해 ‘내가 귀국하면 공항에서 구속될 가능성이 높다.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언제 다시 볼지 모를 회원들과 후원자들,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살펴 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린 후 귀국하자. 각 지역을 돌며 인사하고 뒷정리를 하는 데는 두 달 정도가 필요하다. 7월 중순경에 귀국하자.’라고 결정했다.

나는 광주에 나의 결정 내용을 알리고 언론과 인터뷰할 때도 그렇게 밝혔다. 그랬더니 광주에서는 5월 행사 주간에 꼭 귀국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바꿔 ‘일단 귀국하자. 구속이 안 되면 2주간만 있다가 나와 인사를 하자. 구속되면 법정과 옥중에서 계속 싸우자.’라고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국무총리 앞으로 “나의 귀국 허용이 5.18 민중항쟁의 정당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재미한청련을 이적 단체로 몰았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내린 조치인가 아니면 해외운동을 와해시키고 나를 구속하기 위한 음모에서 비롯된 조치인가?”라는 내용의 공개질의서를 발송했다. 내가 그런 공개질의서를 보낸 까닭은 재미한청련의 목에 걸린 올가미를 나의 귀국을 통해 확실히 풀어버리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빨리 귀국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회원들과 후원자들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윤한봉 선생 안전귀국을 위한 해외 대책위원회’를 꾸려서 내가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 생활 12년 만에 처음으로 영사관에 찾아가 임시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해외 각지에서 정치적 이유로 귀국을 못하고 있는 분들과 도와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각 지역 회원들과 마당집 식구들에게 대충대충 전화 인사를 하고 내가 거처하던 민족학교 자료실을 청소하고 재미한청련연합 회장인 정민 씨에게 이것저것 당부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 쁘게 움직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회원들이 급히 구입해 놓은 양복과 구두를 거절하고 평소 입던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으로 골라 입고 평소 신던 운동화를 신고 똥가방을 맨 채 마지막으로 민족학교를 구석구석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민족학교,나의 혼이 스며있는 민족학교는 날더러 가지 말라며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눈물을 감추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똥가방 속에는 조국에서는 면으로 만든 옷값이 비싸다며 회원들이 사준 하얀 속옷 10여 벌과,회원들이 비행기 안에서 먹으라며 비닐봉지에 담아 준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과, 민족학교 뒤뜰에서 내가 직접 가꾸었던 풋고추가 들어 있었다. 나는 동행하기로 한 최진환 박사님,강완모 한청련 부회장과 함께 눈물로 배웅해 주는 회원들을 뒤로 하고 샘솟듯 눈물이 솟구쳤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며 LA국제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조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배웅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곳을 통과해서 비행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갈까?’하고 생각하며 수없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던 바로 그 검색대를 통과해서 묵직한 납덩이를 매단 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탑승구를 지나 비행기에 올랐다.

1993년 5월 19일 LA발 서울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오른 후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국길에 오르고서야 내가 우리 회원들과 얼마나 정이 깊이 들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추억 속에 명멸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비행기가 이룩한 후 두 시간 동안이나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리고 12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서른네 살에 왔다가 마흔 여섯 살이 되어 돌아가는구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중년이 되어 돌아가는구나.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원없이 뛰다가 이제 돌아가는구나. 캄캄한 밤에 외항선에 숨어 타고 떠나온 조국에 백주 대낮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구나. 떠나올 때는 36일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12시간이구나. 떠나올 때는 화장실 바닥에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동행자들과 함께 좋은 의자에 편히 앉아 가는구나. 떠나올 때는 칫솔 하나 찬 빈털터리였는데 지금은 똥가방도 있고 회원들이 급히 모아준 몇 천 불의 돈도 있는 부자가 되어 돌아가는구나.

그래 구속해 봐라,덕분에 좀 쉬고 밀린 책도 좀 보자. 그리고 법정과 감옥에서 악착같이 싸워보자.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미국에 도착한 후 다짐했던 대로 살아남은 죄,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가기 위해 편안한 생활하지 않고 부끄러움 없이 살다가 돌아갑니다. 열심히 운동하다 돌아갑니다. 조국운동,광주운동을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운동하다 돌아갑니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고 배울 것은 배우고 갑니다. 세계에는 우리 민족보다 훨씬 더 한 많은 역사,훨씬 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종과 민족과 종족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깨닫고 갑니다.

국제사회와 해외 동포사회에 대해서도 제법 배우고 갑니다. 정세분석 훈련도 열심히 하고 갑니다. 목욕도 한 달에 두 번씩만 하고 운전도 안 배우고 영어도 안 쓰고 침대에서 자지 않고 ‘내 것을 갖지 않고 허리띠 안 풀고 12년을 살다 돌아갑니다. 몸이 좀 쇠약해지고 늙은 것 빼고는 변한 데 없는 촌놈 ‘합수’, 그대로 돌아갑니다.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다 이루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세 분석 훈련을 열심히 하기는 했으나 분명한 한계를 느꼈습니다. 비록 12년 동안 해외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정세 인식을 잘못하거나 정세 전망을 잘못해서 주위 사람들이나 회원들로부터 지탄받거나 책임 추궁을 당한 적은 없었으나 독일의 통일,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를 전망은커녕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니카라과의 대선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차모로에게 패배할 줄은 전망도 못했고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미국이 인구가 10만도 안 되는 그라나다를 침공하고 또 파나마를 침공하여 명색이 한나라 대통령인 노리에가를 잡아와 미국 감옥에 넣는 것은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 도 못했었습니다.

걸프전 때도 미국이 그렇게 신속하게 그렇게 엄청난 병력과 무기를 투입해 이라크를 공격할 줄은 예상도,상상도 못했고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순순히 전쟁 비용을 분담해 내놓을 줄 또 한 예상도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정세 분석과 전망에서 한계를 느끼고 정세의 변화에 충격만 받았던 이유는 저에게 지식과 정보와 자료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와 서독과 스위스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곳도 가본 적이 없는 제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분석 전망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욕심이었던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한 정세 분석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훈련해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고 정확한 지식과 정보,자료를 얻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못난 저는 82년 말에 세운 해외 운동 10년 계획 중 몇 가지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해외한청련을 만들기는 했으나 일본의 청년 운동은 참여시키지 못했습니다. 2세 운동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10년 계획에는 안 들어 있었지만 세 가지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 국제 외교 연대 마당집을 설립하려다 실패했고 LA 한인회를 개혁하려다 실패했습니다. 면목 없고 부끄럽습니다!

어느덧 비행기는 조국의 하늘로 들어섰다. 광대하고 거친 그래서 귀신마저 머물 곳이 없는 미국의 산천과는 전혀 다른, 꿈에 그리던 아늑하고 부드러운 조국 산천을 내려다보며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승무원들이 다른 손님들이 내리는 것을 막고 우리 일행을 먼저 내리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구속하기 위해 그런 줄 알고 마음을 다잡은 뒤 최진환 박사,강완모 씨와 함께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많은 카메라의 섬광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카메라 앞에 서 본 적이 없던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앞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사진 기자들은 날더러 두 팔을 번쩍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침묵으로 거절해 버렸다. LA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할 때 밝힌 것처럼 나는 도망자이지 개선장군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자들과 환영객들 사이를 정신없이 밀려다니고 끌려 다니다가 어느 응접실 같은 곳에 들어가 수많은 기자들 앞에 앉았다. 기자들로부터 귀국성명서 발표 요청을 받고 나서야 나는 구속될 것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만 하고 왔지 언론들과 마주할 경우에 대비한 준비는 하나도 안하고 온 나를 발견하고 어색해서 머리를 긁었다. 대충 기자회견을 마친 나는 환영 나온 일가친척들과 정상용, 정용화 등의 옛 동지들,그리고 죽마고우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광주에서 올라온 버스를 탔다. 차창 밖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버스에 함께 탄 옛 동지들과 친지들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보면 볼수록 흐뭇했다.

“기어코 우리는 다시 만나고야 말았구나!”

나는 그날 밤을 광주의 둘째형 광장 형님 집에서 자고 다음 날 21일 아침에 망월동으로 가 5월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죽지 못하고 도망간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명복을 빌며 큰절을 올렸다.

13년! 그 13년 만에 나는 광주로 돌아와 영령들 앞에 사죄를 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국내 도피생활 1년,망명생활 12년을 합한 그 13년 동안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 왔던가! 마침내 나는 망월동 영령들 앞에서 사죄를 하고 명복을 빈 것이다. 영령들 앞에서 용서를 빌고 나니 13년 동안 나를 그렇게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과 가슴의 응어리가 많이 녹아내려 나는 무척 홀가분한 마음으로 망월동을 떠나왔다.

그 후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죽은 자식 살아난 듯 울며 기뻐하시는 늙으신 어머님을 뵙고 선영을 찾아 인사 올렸다. 그리고 나를 숨겨주신 것 때문에 고초를 겪으셨던 강진의 김용근 선생님 묘소와 오송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신 군산의 이광웅 선생님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80년 5월 27일 새벽,전남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체포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나주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영철을 괴로운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괴로운 마음으로 떠나왔다.

광주에서 환영식,전국연합의 서울 환영식,민청학련사건 관련 동지들의 환영식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참석해서 부담스러운 꽃다발을 받았고, 그때마다 짧은 인사말만 되풀이했다.

“명예가 아닌 멍에로 알고 살아가겠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열심히 살아가겠다.”

조국의 하늘은 변함이 없었고 고향산천도 여전히 아늑했다. 그러나 설자리가 아닌 곳에 이상하게 수많은 아파트들과 늘어진 차량들과 혼탁한 공기와 한참을 보아야 옛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벗들과 동지들의 얼굴에서 나는 12년 세월의 무상함을 조금씩 느껴가기 시작했다.

 망명생활의 청산과 영구 귀국

5월 19일 꿈만 같은 2주 동안의 조국 방문을 마치고 나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회원들과 만나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민족학교에 들어가 앉으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어디 멀리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 왔을 때 느껴는 아늑함과 편안함이 나를 감싸 깜짝 놀랐다.

“큰일 났구나,LA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2의 고향이 되어버렸구나.”

한청련,한겨례 회원들은 그 사이에 북부조국과 미국이 핵문제를 가지고 제네바에서 직접 협상하기로 함에 따라 추진 중이던 UN 본부 앞 단식농성을 취소했다. 대신 오스트리아 비엔나 에서 열리는 제30차 세계인권대회에 해외한청련 대표단을 파견할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약 두 달 반 동안 미국 각 지역과 캐나다, 호주를 방문하여 개인적으로 도와주신 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지역 별로 마지막 수련회를 가졌다. 나는 수련회장에서 회원들에게 운동의 생활화,꾸준한 학습, 동포사회에 뿌리내리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통일단결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앞으로 북부 조국과 미국,일본,캐나다,호주,유럽 각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것,그렇게 되면 일본에서처럼 해외 각국의 동포사회 에서도 남•북간의 치열한 세력 경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그렇게 될 경우 한청련,한겨레는 강령에 따라 남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말고 이제까지 해 왔던 것처럼 민족적 관점과 입장을 지키며 운동을 해 나가야 하고 동포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나는 환송식장에서 ‘해외운동이 나를 조국 운동권에 파견한 것으로 생각하고 항시 여러분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겠다는 내용의 인사말을 했다. 각 지역의 수련회와 환송식을 마치고 우편을 통해 미 국무성에 감사의 뜻과 함께 영주권 탈퇴서를 각각 제출한 나는 12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정든 회원들 곁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꿈에 그리던 조국과 현실의 조국이 얼마나 다른지 짐작도 못한 채 속없는 나는 들뜬 마음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1993년 8월 18일이었다.

정치의 충격

냉전 구조가 무너진 후 서유럽과 미 • 일 등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 확장하는 방향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한편 중장기적인 계획 하에 자국의 냉전 잔재를 청산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총체적인 내부 정비와 개혁을 위력적으로 추진하고 있고, 미 • 일• 중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과 영향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 들씌워진 냉전의 저주는 풀렸다. 우리 민족은 냉전으로 인한 고통을 반세기 동안이나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빨리 냉전 잔재 청산에 나섰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러시아,중국,동구 각국 등과 관계 개선을 하는 것으로 냉전 잔재 청산을 다 마치기라도 한 것처럼 세계화,선진조국,국가 경쟁력,21세기 노래만 부르고 있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부 정비와 개혁 차원에서 냉전 잔재 청산을 서둘러야 한다. 냉전 잔재 청산을 위한 총 체적인 중•장기 계획을 세운 후 점진적 단계적으로 그러나 위력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청산해야 할 냉전 잔재는 적대적인 남북 관계,굴욕적인 미국과의 불평등 관계,부패하고 타락한 저질 정치,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독재 잔재,비정상적인 자원 배분 등이다.

적대적인 남북 관계를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한다. 현재 남이나 북이 적대하고 있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 없다. 오직 서로 적대하고 있을 뿐이다. 남북의 병력을 합하면 1위인 중국 다음으로 많고 군사비를 합하면 세계 9위나 된다. 남이나 북이나 더 이상 고통과 손실만을 안겨주는 대결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서둘러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 다. 동시에 휴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고 상호 군비를 감축해 나가야 한다.

병력과 군사비를 줄여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통일 협상은 협력의 성과를 봐 가면서 그때 가서 상호 존중의 자세와 상호 합의의 방법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가지고 시작하면 된다. 지금은 남이나 북이나 통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준비가 안 된 채 통일이 되면 민족 파멸적 혼란과 재앙이 온다.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미국과의 관계를 하루 빨리 정상화시 켜야 한다. 우선 군사 주권을 되찾아 민족의 존엄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미 상호방위조약과 한• 미 행정협정을 개정하여 군비 감축을 위한 권한과 전시 작전 지휘권을 회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군 기지의 면적과 사용 기간을 제한하고 꼬박꼬박 기지 사용료를 받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단계적으로 미군을 철수시켜 나가야 한다.

냉전과 남북대결을 빙자해 유지되어 온 비정상적인 자원배분도 서둘러 정상화시켜야 한다. 22%나 차지하고 있는 국방예산을 대폭 줄여서 복지수준에서 세계120등인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복지예산을 대폭 늘리고 재정투자가 절실히 요구되는 환경,교육, 인구,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등에 적절하게 배정해야 한다.

곳곳에 남아 있는 독재 잔재의 청산도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권을 유린해 온 국가보안법과 노동자 권익을 유린해 온 노동 악법을 폐기해야 한다. 또한 역대의 독재 정권들에 의해 자행된 각종 범죄의 진상을 규명하여 책임자를 처벌하고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적절한 배상을 해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는 군사 문화도 남김없이 청산해야 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저질 정치,권위주의 정치,지역주의 정치, 금권 정치,붕당 정치의 개혁은 가장 절박한 시대적 요구이다. 살벌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다른 모든 냉전 잔재의 청산을 위해서도,갈 데까지 간 지역주의 문제와 악독하고 타락한 사회 문제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최우선적으로 정치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 그러 나 정부와 여야 각 당과 정치인들은 냉전 잔재의 청산과 정치 개혁 추진에는 별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원칙도 명분도 없는 이합집산과 이전투구로 세월을 보내고 있어 충격을 받았다.

“12년 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구나. 아니 못된 방향으로만 더 세련되어 버렸구나. 확고한 정책 정당,투명한 민주 정당,분명한 책임 정당,진실한 도덕 정당,기본적인 운영비를 당원들의 당비로 해결하는 튼튼한 자립 정당,지역주의를 배격하고 20〜30대와 여성과 노동자-농민이 절반씩을 차지하고 장애인들이 10%를 차지하는 각지 각계각층의 국민정당,노동자-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창조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며 노동조합,공무원,언론인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평화군축을 추진하는 진보정당, 모든 국민들이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정신적, 문화적 안정과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하는 녹색문화정당,민족의 위대한 미래상을 마련하고 진로를 제시하며 냉전잔재청산을 위해 적대적인 대북관계를 협력과 공존의 관계로 바꿔 평화통일을 준비해 나가고 불평등한 대미관계를 대등한 우방관계로 정상화시켜 민족의 존엄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치열한 국제경쟁과 동북아 주도권을 둘러싼 미-중-일의 대결에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민족정당,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고 세 계 각지의 울부짖음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국제정당이 이 땅에 창립되어 꿈과 감동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나라,이 겨레와 국제사회에 은하수 같은 꿈과 아지랑이 같은 감동을 21세기 맞이 선물로 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이런가?”

사회의 충격

12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온 사회에 에너지가 꽉 차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기분 좋은 에너지가 아니라 무언가 어지럽고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에너지였다. 나는 그 에너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끝에 1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그 에너지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질서와 혼란 속의 탐욕과 경쟁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였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일당에 의해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를 앞세운 경제제일주의 정책, 경제성장 정책은 정권이 몇 차례 바뀌고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 일류’로 구호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 30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수많은 노동자,농민, 빈민,여성,운동가들의 피눈물과 자연 환경의 오염과 파 괴를 대가로 해서 그리고 90년대부터는 가난한 나라들의 환경을 파괴하고 노동자들의 피눈물까지 짜온 덕분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계속해서 이제는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내세울 만큼의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30년간을 죽자 살자 돈 벌기에만 매달려 온,그리고 매달린 만큼 성과를 거둔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조급 해졌고 극성스러워졌고 탐욕스러워졌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게 되었고 부패 타락하게 되었다. 또한 그렇게 30년을 살다 보니 탐욕과 경쟁은 이 나라의 문화로 정착되었고 돈은 최고의 가치와 목표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귀국 후 나는 변화된 조국 사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엄청나게 돈이 많은 사회,그러나 정신도 혼도 원칙도 질서도 없고 꿈과 감동도 없는 사회,악독하고 살벌한 사회,허세와 과시와 쾌락이 넘치는 사회…

사람의 생명은 별것이 아닌 사회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위험에 빠졌을 때 남의 도움을 청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람 살려 !” 하고 외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요즈음 주택가에서 폭행당하는 사람 아무리 “사람 살려!”하고 외쳐도,성폭행 당할 위기에 처한 사람이 그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사람 살려 !”하고 외쳐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세상,교통사고로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있어도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사람의 흩어진 돈만 주워 가 버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남의 목숨,남의 고통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국회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준 사람에게는 도움 을 받은 사람 또는 그 보호자가 재산의 10분의 1을 주어야 한다’ 와 같은 내용의 법을 만들고, 국민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 살려!” 대신 자신의 재산 정도에 따라 “1억 벌어!”,이천만 원 벌어!”라고 자연스럽게 외칠 수 있도록 평소에 연습을 부지런히 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위기에 처한 사람이 다급한 김에 너무 큰 액수의 돈을 벌라고 외치면 너도나도 돈 벌려고 우르르 몰려드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고 그런 소동 속에서 밟혀 죽는 사람,물에 빠져 죽는 사람,차에 치어 죽는 사람도 가끔 나오고 서로 먼저 구하려 고 치고 박고 찌르고 조르는 폭행 사건과 살인 사건도 자주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했던 사람은 그런 광경을 보 고 사람들이 자신을 서로 먼저 구하기 위해 다투는 것으로 착각하여 생애 최초,최대,최후의 큰 감동을 안고 성폭행을 당하 거나 숨을 거두게 되겠지만….

무서운 경쟁 사회가 되어 버렸다. 문화와 정신은 도외시한 채 제한된 부와 권력과 명예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한도 끝도 없이 경쟁하는 사회,그것도 최고와 일류와 일등을 목표로 한 무한 경쟁,극한 경쟁을 시도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더불어 살 줄도 모르고 자족할 줄도 모르고 참다운 긍지도 모르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TV에서 “당신의 경쟁 상대는 어느 나라의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동시에 그런 미친 경쟁 무모한 경쟁을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며 조장하는 정부와 재벌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악독한 사회, 살벌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기는커녕 도리어 짓밟아 버리는 소름끼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돈 좀 벌어보려고 온 가난한 타민족 노동자들이나 중국 동포들에게 하는 짓들을 전해들을 때마다,피눈물 속에서 이를 갈며 살아가는 그 분들,한을 품고 진저리를 치며 돌아가는 그분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때마다 나는 부끄러 웠고 괴로웠다. 그리고 조국이 무서워졌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돈 벌기 위해 불법 체류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이렇게까지 악독한 취급은 당하지 않는데...

도덕적 타락과 무질서와 환경 파괴와 오염은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충격적인 사건이 터질 때를 빼고는 모두들 잊고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장애인들은 날아다니는 초인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지상에는 그들의 불편을 고려한 시설과 배려가 거의 없었다.

꿈과 감동이 없어져 버렸다.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꿈과 감동이 많아야 할 청소년들에게도 그것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세탁기 속의 빨래처럼, 자동차 바퀴 속의 공기처럼 학교 공부와 과외 공부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 청소년들에게 꿈이나 감동이 있을 턱이 없다. 풍요와 쾌락의 삶이 그들의 꿈이고 유명 연예인,유명 선수를 향한 환호와 괴성이 그들의 감동이었다.

모든 평가가 원칙적이지 않고 비교적이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옷이 없다.’면서 ‘작은 부정,작은 범죄는 큰 부정,큰 범죄 앞에서 상대적으로 도덕적이고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에게 원리 원칙을 말했다가는 적대적,냉소적 반발을 당한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물이 너무 썩어서 맑은 물에서 사는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흐린 물에서도 잘 사는 고기들마저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느냐’ 고 따졌다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놈,한심한 놈,이상한 놈 취급을 당한다. ,

거의 모두가 들떠 있고 조급해 있었다. 장기적 안목과 안정과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두들 오줌 맞은 개미떼 같이 갈피를 못 잡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거의 모두가 ‘날 좀 보소’ 체질로 변해 버렸다. 정신적 허무와 황폐를 감추기 위한 사치 허영 허세 과시가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심해져 버렸다. 거의 모두가 ‘돈만 벌어’ 체질, ‘놀고 보세’ 체질로 변해 버렸다. 돈과 쾌락이 최고의 가치,영원한 가치가 되어 버렸고 가난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거의 모두가 ‘나 혼자만이’ 체질로 변해 버렸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최고의 가치,영원한 가치가 되어 버려서 우직하면서도 성실하고 신의 있는, 그래서 남 괴롭힐 줄 모르는 곰바우는 만나 보기가 어려웠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해관계로 변해 버렸다. ‘선하고 훌륭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은 ‘가까이 해야 할 사람’으로 분류하여 쓰다듬거나 꼬리 치고,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은 ‘이용해야 할 도구’로 분류하여 틈틈이 챙기거나 관리하고,자기에게 이익이 안 되는 사람은 ‘영양가 없는 식품’으로 분류하여 외면하거나 멀리하고,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사람은 ‘제거해야 할 악당’으로 분류하여 중상 모략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나는 72년부터 조국의 정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운동을 해 왔다. 사회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2년 만에 돌아와 보니 조국의 사회 문제는 정치 문제 뺨칠 만큼 심각해져 있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악독해지고 타락해 버렸을까? 나는 귀국 후 1년 정도가 지나서야 80년대 말부터 조국을 방문하고 오거나,영구 귀국할 목적으로 조국에 나갔다가 못 살고 다시 나와 버린 재미동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했던 말들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무서운 사회가 되었어.”

“사람 살 곳이 못돼.”

“사람들이 다 변해 버렸다니까.”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버렸어.”

지역주의의 충격

나는 해외에 있을 때에도 조국에서 지역감정 지역갈등이 심해졌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줄은 귀국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 정치 발전의 최대 장애물이라는 것과 망국적인 암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95년 6.27 지자체 선거와 96년 4.11 총선 때였다.

나는 6.27 지자체 선거 때 DJ가 지역등권론을 주장하며 지역주의를 조장하자 그에 분노하여 지역등권론을 규탄하는 공개 질의서를 작성하여 서명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예상외로 호응이 적은 데 충격을 받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두 차례의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지역감정은 이미 감정 차원을 넘어서 ‘주의’로 틀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지역주의는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갈등에 토대한 것도 아니고 특정지역 세력이 다른 지역인들에 대해 법과 물리력을 동원해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하고 그에 저항해,당하는 지역인들이 분리, 독립, 해방운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또 그럴 가능성도 없는 지역주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역주의는 그것이 패권적 지역주의건 대항적 지역주의건 간에 몇 개 지역에 강력하고도 배타적인 정치세력(정당)을 형성하여 합법적인 정권 쟁탈전을 벌이는 단계로까지 접어들었다.

나는 6.27 지자체 선거 때부터 그러한 지역주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지역주의가 심한 호남 지역,그 가운데서도 광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고통은 더욱 심했다. 나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이 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정치의 개혁과 발전을 이룰 수 없고 국민통합과 민족의 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기회만 있으면 지역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호소했다. 나는 소신을 가지고 강연과 토론과 언론과의 대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석에서의 대화,죽마고우들이나 옛 동지들과의 논쟁을 통해서도 그러한 노력을 되풀이 했다.

그런 활동을 통해서 지역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 만큼 나는 지역주의 타파 노력을 더 강화해 나갔고 그럴수록 주위 사람들과의 토론이나 논쟁의 빈도나 강도도 높아 갔고 주위와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 되어갔다. 말도 잘 안 통하고 논리도 잘 안 통하는 사람들과 토론과 논쟁을 할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몸부림을 쳤다.

내가 그동안 주장하고 호소해 왔던 내용들과 하고 싶은 말들 을 호지(가명)라는 후배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을 빌려 밝혀 보겠다.

호지!

며칠간 고향에 다녀온다더니 잘 다녀왔는지?

옆 좌석 손님들의 눈총을 맞아가며 서너 시간 동안 토론 아닌 논쟁을 하고 돌아온 그날 밤,나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네. 그날 밤 치미는 화를 못 참고 찻집을 나온 나는 늦은 밤거리를 한 시간 가량 무작정 걷다가 화가 조금 가라앉기에 집으로 돌아 왔다네. 자네를 다시 만나 그날 밤 일에 대해 사과도 하고 못 다한 이야기도 계속하고 싶기는 하지만 얼굴을 붉히며 헤어질 것이 두려워 대신 이렇게 편지를 통해 이야기하기로 했네.

그날 밤 자네는 날더러 호남인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그렇게 지역차별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느냐고,어떻게 그렇게 제삼자처럼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따졌고 그 말에 화가 난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 버렸지.

나라고 왜 지역차별에 대해 분노하지 않겠는가? 나도 5.16 쿠데타 이후 역대 정권에 의해 유지, 강화되어 온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고 반민주적인 패권적 지역주의와 비열하고 추악한 지역차별과 소외에 대해서 분노해 왔고 마찬가지로 현 YS 정권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그에 따른 지역차별과 소외에 대해서도 분노하고 있다네. 나도 가장 심한 차별과 소외를 당하고 있는 가난한 호남인의 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것들을 용납하고 용서 할 수가 있겠는가?

나도 이 저주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지역차별과 소외를 없애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자네와 마찬가지 입장이고 또 자네처럼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네. 그러나 그런 목표를 달성하려 면 올바르고 과학적인 방도와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노력해야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방도를 가지고 무원칙하게 해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네.

그날 밤 자네와 나는 방도를 가지고 충돌했었지. 나는 지역주의 타파와 지역차별과 소외의 근절은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정부 수립을 통해서 점진적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네는 호남 출신인 DJ의 집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또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지. 그날 밤 내가 깨달은 것은 자네와 나의 방도가 다른 것은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네. 자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하나하나 지적해 가며 설명해 보겠네.

첫째,영남에 대한 우대와 호남에 대한 차별과 소외는 영남 출신 역대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지, 영남인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네. 영남인들 중에는 호남에 대한 차별과 영남에 대한 우대를 주장하거나 동조 지지하는 못된 지역주의자들도 많이 있지만 역대의 부패,독재 정권과 학살 정권을 지지해 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망국적인 지역주의와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에 대해 분노하고 호남의 빈곤을 개탄하며 호남인들에게 미안해하는 사람들,패권적 지역주의 정권,독재 정권 하에서 피해를 보고 고통을 겪은 사람들,우대를 받기는커녕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네. 호남인이라고 해서 전부다 차별과 소외와 빈곤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절대로 영남인들을 적대시하거나 가해자로 취급해서는 안 되네. 그렇게 하면 도리어 지역주의를 유지 강화시키고 패권적 지역주의 정권과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못된 정당들과 정치인들을 이롭게 해주는 셈이 된다네.

둘째, 우리나라에는 영남인들과 호남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네. 출신 지역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서울 거주자들도 있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출신들도 많이 있지 않은가?

셋째, 지역주의의 피해자,지역차별과 소외의 피해자가 호남인들 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네. 자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지역인들도 모두 다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은가? 지역주의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절대 다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네.

넷째,지역주의와 지역차별과 소외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네. 지역차별과 소외의 구체적인 내용은 크게 보아 거의 제도화된 각 분야의 핵심 요 직에 대한 특정지역 출신 인사 중심의 충원과 특정 지역 우대를 내용으로 하는 물적 자원의 지속적 불균등 배분이 아닌가? 그런 차별과 소외가 30년 이상 지속된 결과 부와 권력이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버렸기 때문에 만약 단기간에 무리해서 바로 잡게 되면 혼란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 역차별이니,또 다른 패권적 지역주의이니 하며 반발하고 나설 것일세. 지역주의 또한 설사 지역 간 불균등이 해소된다 하더라도 지역감정과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인 정당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단 기간에 소멸되지는 않을 걸세. 자네는 길게 보고 점진적 단계적으로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호지!

자네의 기본적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위와 같은 나의 지적에 대해 수긍하는가? 그날 밤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자네는 수긍하지 않을 것이네. 좋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 하고 방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겠네.

나는 ‘호남 출신인 DJ의 집권을 통해서만이 지역주의와 지역차별과 소외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DJ 임기 내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자네의 방도가 이 나라에는 영호남인들 밖에 없고 영남인들은 모두 다 가해자이고 호남인들만 피해자이며 지역주의와 지역차별과 소외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영호남인들 간에 입장과 처지를 한번 바꾸어 보자는 한풀이식 감정적 방도라고 결론지었다네.

호지!

어떤가? 자네가 감정을 좀 가라앉히고 ‘지역주의의 타파와 지역차별과 소외의 근절은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정부 수립을 통해서 점진적,단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나의 방도를 받아 들이고,그 대신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서는 DJ가 집권해야 한다. 왜냐하면 DJ가 자격과 역량 면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덧붙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네가 만약 그런 태도로 나오기만 하면 나와 자네간의 논쟁은 한 고비를 넘기고 생산적인 토론과 대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네. 왜냐하면 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DJ가 가장 훌륭한 정치인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자네와 논쟁할 생각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고 있으니까 말일세. 이제 나는 DJ에 대한 자네의 평가를 존중하여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겠네.

그날 밤 나는 자네와 논쟁하면서 또 하나 느낀 것이 있다네 . 자네는 호남인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차별과 소외에 대해서만 흥분하여 떠들었지,타 지역인들이 호남인들을 비웃거나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여하튼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네. 자네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나는 타지역인들의 비웃음과 경멸이 우리 호남인들에게는 못된 정권들의 차별과 소외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네. 내가 타 지역 사람들과 만나 확인해 본 비웃음과 경멸의 이유는 아주 단순했네. 호남인들은 DJ와 그의 당이 잘하건 잘 못하건 맹목적으로 무조건 지지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네.

호지!

자네는 호남인들을 그렇게 비웃고 경멸하는 타지역인들에게 도리어 욕을 퍼붓겠지만 나는 부끄러움 속에서 그분들의 경멸과 비웃음과 그 이유 모두를 겸손하게 받아들였다네. 할 말이 없었다네. 그분들이 밝힌 야유가 틀렸는가? 사실이 아닌가?

DJ와 그의 당은 가도 호남인들은 여전히 호남인들로 남는다네. 나는 어떤 분이 “지금은 DJ에 대한 비판을 하지 말고 97년의 대선이 끝나면 호남인들도 이성을 되찾을 것이니 그때 가서 하라.”고 해서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린 적이 있었다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DJ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해 왔다네. 여러 잡지들과 대담 때도 그랬고 강연을 할 때나 토론회에 토론자로 나갔을 때도 그랬다네. 95년의 어느 날 일부 전남대 교수들과 토론을 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네.

“…우리들은 97년 대선 이후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DJ가 97년의 선거에서 승리해도 패배해도 역사는 계속됩니다. DJ가 선거에서 승리하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집권기간 내내 건강한 비판을 계속해야 하고 패배하면 서둘러 이 지역의 절망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전통과 긍지를 되살려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DJ 사후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DJ 사후에는 계승논리와 극복논리가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후광 기념사업회’니 ‘후광정신계승위원회’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DJ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DJ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자.’, ‘DJ의 한을 풀자.’라고 떠들며 호남인들의 DJ에 대한 정서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려고 날뛰는 정치인들이 계승논리를 펼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력을 키우자고,이는 훌륭했으나 이러 저러한 단점과 과오가 있었다고,극복할 것은 극복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하자고 주장하는 극복론자들은 계승론자들로부터 ‘비열한 놈들,후광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는 입 다물고 있던 놈들이 이제 와서는 송장에 칼질한다고 공격받을 것이고 그러한 계승론자들의 공격 논리는 호남인들의 정서로 보아 상당한 호소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DJ 사후 몇 년간은 계승논리가 득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송장에 칼질하는 놈, 비열한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DJ 살아생전에 공개적인 비판을 계속할 것입니다. 타지역인들로부터 경멸과 조소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판을 계속할 것입니다.”


호지!

호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그렇게 DJ에 대한 비판을 열심히 해 왔겠는가? 자네는 왜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은 모르고 남에게 분노할 줄만 아는가? 호남인들을 경멸하고 비웃었던 타지역인들도 호남인들이 왜 그렇게 DJ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는가를 알고는 있었네. 그들도 호남인들이 박 정권의 탄압과 차별에 따른 고통과 저항 속에서 DJ와 일체감을 형성하였다는 것, 그 일체감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도덕적이고 뛰어난 경륜을 가진 이에 대한 존경심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그렇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네.

호지!

맹목적 지지,무조건적인 지지는 지지가 아니라 맹종이네. 지지는 주체성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네. 주체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맹목적 무조건적인 지지를 할 수 있겠는가?

호지!

찢어버리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기 바라네. 이번에는 자네를 포함한 호남인들의 원칙과 자세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네. 그동안의 두 차례 대선에서 호남인들이 그렇게 똘똘 뭉쳐 밀어주었어도 DJ와 그의 당은 계속 패배했네. 그런 패배의 경험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해 보았으면 자네는 냉정한 자세로 과학적인 원인 분석을 하고 올바른 대책을 세웠어야 했네. 자네는 여러 가지 원인을 대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상보다 적은 타지역인들의 지지가 아니었는가? 자네는 타지역인들의 지지가 왜 적었다고 생각 하는가?

호지!

자네는 DJ와 그의 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한 호남인들이 도리어 이와 그의 당을 망쳤고 그런 맹목적인 지지가 결과적으로 타지역인들의 지지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자네도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겠지만 유권자들은 후보자만 보고 투표하는 것은 아니라네. 물론 후보자 개인에 대한 평가가 유권자들의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기는 하지만 그 후보자 의 정당,가족,친지,측근 참모, 지지자들의 이모저모 또한 선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네.

그동안 호남인들은 부당하고 억울한 차별을 받아온 것 때문에 차별한 쪽은 무조건 악이고 피해를 본 자신들과 DJ와 그의 당은 무조건 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항상 다른 지역 사람들은 계속 피해만 당해 온 선한 자신들과 DJ와 그의 당의 편에 서줄 것으로 예상하거나 기대했다가 선거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 그때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을 되풀이 해왔네. 그런 과정에서 호남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편협해지고 배타적이 되어버렸으며 또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주관적 사고와 감정적 판단에 빠져들게 되었다네.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호남인들은 자신들의 민주화와 지역 차별 타파와 DJ와 그의 당의 집권을 목표로 한 방도와 원칙과 자세에 대한 올바른 반성을 할 수가 없다네.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정당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동조를 받는 것은 아니라네. 목적이나 목표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와 원칙과 자세 또한 주위의 동조와 지지를 끌어 모으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자네는 잊지 말아야 하네. 방도와 원칙과 자세가 올바를 때만이 참다운 힘도 나오고 강한 설득력과 호소력도 나오는 것이라네. 타지역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 호지 자네는 어떻게 응답하겠는가?

“당신들은 반성할 줄을 모르는 독선적인 사람들이다. 87년 대선 때 대가 신민당을 분열시키고 대선 후보로 나서는 바람에 정권 교체도 못했고 극복해야 할 지역감정도 도리어 심화되었다. 당신들의 지도자인 DJ는 뒤늦게나마 생각이 짧아서 그랬다며 과오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때 열광적으로 DJ를 지지했던 당신들은 조금도 과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반성을 안 했기 때문에 95년 후반기에 DJ가 터무니없이 민주당을 분열시켰을 때도 당신들은 그러한 분열에 대해 또다시 무조건 지지해 버렸고,4.11 총선 패배 이후에도 그러한 자신들의 지지 행위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원칙도 일관성도 없다. 당신들은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DJ가 그렇게 비민주적으로 당을 운영해도 침묵했고, 선거 때마다 그렇게 말 많은 후보 공천을 해도 이의 없이 지지해 주었고, 또 국민회의의 강령을 민주당의 그것보다 더 보수화시켰어도 변함없이 지지해 주었다.

당신들은 학살정권 타도,전-노 일당 처단을 외쳐왔으면서도 DJ가 5공 청산에 합의해 주어도,노태우의 공약이었던 중간평가의 유보에 동의해 주어도 침묵해 버렸고,민주당의 이기택 당수가 12. 12 군사쿠데타 관련자들 기소를 주장하며 강경투쟁을 시도했을 때 DJ가 은근히 방해를 했어도 침묵해 버렸다.

당신들은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면서도 6.27 지자체 선거 때 DJ가 지역등권론을 주장함으로써 지역주의를 자극하고,충청지역의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있던 JP와 그의 당을 이롭게 했어도 침묵해 버렸다. 더 나아가 당신들은 92년 대선 때와 6.27 지자체 선거 때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민주당을  DJ와 그의 추종자들이 분열시키고 나오자마자 언제 지지했었냐는 듯이 민주당을 비난하기 시작했고,심지어는 DJ와 그의 당이 민주당을 신한국당의 2중대로 몰아도 그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해버렸다.

또 당신들은 JP를 그렇게 비난해 왔으면서도 DJ와 JP가 가까워진 듯 싶자  JP에 대한 일체의 비난을 중단해 버렸고,그렇게 5.18 진상 규명과 학살자 처단을 외쳐왔으면서도 DJ가 학살 원흉인 노태우와 야합하여 20억 원을 비밀리에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어도 침묵해버렸다. 또한 당신들은 그렇게 3당야합을 규탄했으면서도 DJ와 그의 당이 4.11총선 이후 쿠데타 원조요,부패 원조요,지역차별 원조일 뿐만 아니라 5.18특별법 제정까지 반대했던 JP와 손잡기 시작해도 침묵하거나 지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당신들이 그동안 줄기차게 쿠데타 원흉이요 학살 원흉이요 독재자요 지역차별주의요 부정부패의 화신이었던 박정희,JP, 전두환, 노태우 일당에 대해 과감하게 저항 비판하고,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정부 수립과 지역주의,지역차별의 타파와 부정부패의 청산과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해 온 데 대해 진심으로 존경해왔다. 그러나 당신들이 DJ와 그의 당의 과오에 대해서 비판은커녕 원칙도 일관성도 내팽개친 채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계속해서 보내는 것을 보고 우리들은 혼란에 빠졌고 더 나아가 DJ와 그의 당 그리고 당신들에 대해 회의와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충청인들은 JP가 충청인들의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시작하자 사회 지도층 인사 2,000여 명의 이름으로 그것을 규탄하는 성명서를발표했고,대구경북인들도 노태우, 전두환의 구속에 대해 일부 TK 지역 인들이 불만을 터트리자 사회지도층 인사 500여 명의 이름으로 그런 언동들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 했으나, 당신들은 DJ의 민주당 분열이나 20억 수수나 JP와의 야합에 대해 아예 침묵해 버렸다.

당신들은 반성할 줄도 모르고 원칙도 일관성도 없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정권에 대한 비판은 가차 없이 하면서도 건강한 내부 비판은 할 줄을 모른다. 당신들의 확고한 원칙과 일관성 은 DJ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지지이고 당신들의 자세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이중적일 뿐만 아니라 편협하고 옹졸하다.

당신들은 그동안 DJ와 그의 당이 과오를 되풀이 해 온 이유가 당신들이 해야 할 건강한 비판과 견제는 않고 해서는 안 될 맹목적 지지만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않는가? 당신들 중의 일부 인사들이 하는 DJ와 그의 당에 대한 건강한 비판마저 배신행위,이적행위라도 되는 것처럼 비난 공격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당신들은 당신들의 아집과 독선 때문에, 잘못된 방도와 원칙 때문에 우리 같은 타 지역 사람들을 설득하여 동조,지지하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지 않는가? 우리 같은 동조 지지자들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 가?

당신들은 정말로 DJ와 그의 당이 원칙을 내 팽개친 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세력을 키우고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면 그리고 그에 대해 당신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지만 하면 집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라도 해서 DJ와 그의 당이 집권해야만 이 나라가 민족적이고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나라가 되고 이 땅에서 지역 차별이 철폐되고 지역주의가 소멸되리라고 믿고 있는가?

맹목적 지지도 정도가 있어야지 , 세상에 DJ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은 데 대해 비판하자 수천억 원을 받은 YS는 공격 않고 왜 20억밖에 안 받은 DJ만 공격하느냐며 도리어 1원도 안 받은 우리들을 비난하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우리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타지역인들은 YS와 그의 당의 대선자금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DJ의 20억 수수만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독선적인 자세,큰 부정은 죄가 되고 작은 부정은 좌가 안 된다는 식으로 강변하고 어떤 사람으로부터 어떤 돈을 받았느냐는 것은 덮어 버린 채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았다는 점만 강조하여 변명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세 때문에 우리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호지!

찢지 할고 뭐라고 응답할 것인가를 궁리해 보소. 또 호남인 들이 타지역인들로부터 왜 그런 지탄을 받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소. 호지 자네도 잘 알고 있듯이 역사적으로 호남인들은 침략 외세와 폭압적 권력을 상대로 해서 위대한 투쟁정신과 대동정신,그리고 높은 진취성 엄격성 헌신성 도덕성을 발휘하여 선구적이고 대승적인 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왔네. 그런 역사적 전통 때문에 호남인들은 그동안 차별과 소외 속에서도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역사적 정치적 권위와 상징성을 유지 보존해 왔었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러운 전통과 권위와 상징성을 가진 호남인들이 90년대 들어와 보여주고 있는 이 편협성과 배타성과 이중성과 보수성과 정치적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자네는 광주가 빛고을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네. 나는 벽고을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광주가 민 성지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네. 현재는 민주망지네. 자네는 광주가 진보적인 도시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네. 형편없이 보수적인 도시네.

호남인들이 왜 이렇게 자신들의 과오와 실책에 대해 올바른 반성은 하지 않고 무조건 남만 원망하고 모든 책임을 밖으로만 돌리게 되었는가? 왜 이렇게 옹졸해졌는가? 왜 이렇게 긍지와 자존심을 잃고 살아가게 되었는가? 왜 이렇게 냉소와 조소까지 받게 되었는가? 왜 이렇게 5.18까지 외면당하게 만들었는가?

호지!

자네는 광주사회조사연구소에서 96년의 4.11 총선 직후 설문 조사한 결과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것을 찬성하는 비율이 호남에서는 83.3%인데 반해 중부권은 35%,중청권은 32.8%, 부산권은 37.7%, 대구권은 30.7%로 나타났는데 그러한 찬성 비율은 7개월 전인 95년 9월에 같은 연구소에서 같은 내용을 가지고 조사하여 얻은 찬성비율과 비교해 보았을 때 호남권에서는 7.2%가 늘어난데 반해 중부권은19.2%,충청권은 14.2%,부산권은 14.6%,대구권은 10%가 각각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네.

또한 자네는 4.11총선에서 가장 많이 신한국당을 지지한 부산의 신한국당 지지율이 55.8%이고 자민련을 가장 많이 지지한 충남의 자민련 지지율이 51.2%인데 비해 가장 많이 국민회의를 지지한 광주와 전남과 전북의 국민회의 지지율은86.2%,71%,63.7%였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하네.

자네는 그 두 차례의 설문 조사 사이의 7개월 동안에 노태우 전두환의 엄청난 부정축재 사실도 드러났고 12.12와 5.18의 진상도 많이 밝혀졌으며 더 나아가 두 학살 원흉에 대한 재판까지 시작되었는데도 5.18 국가기념일 제정에 대한 타 지역의 찬성비율이 올라가기는커녕 왜 그렇게 큰 폭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그 7개월 사이에 DJ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호남인들이 침묵했을 뿐만 아니라 4.11 총선에서 국민회의에 표를 덜 주기는커녕 92년 14대 총선 때보다 9% 정도가 더 많은, 엄청난 표를 몰아준 데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철저히 반성해야 하네. 그동안의 과오와 실책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네. 그리고 늦었기는 하지만 건강한 내부 비판을 시작해야 하네. 알 것 다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 정서와의 충돌, 그로 인한 소외와 고립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는 호남의 지성인들과 운동가들,그리고 속으로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호남의 대중들부터 설득해 나가야 하네. 그렇게 해서 점차 내부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나가야 하네.

그리고 우리 호남인들부터 타지역 출신 인사나 타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들 중에서도 설사 그 사람과 당이 영남 출신이거나 영남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 할지라도 민족적이고 진보적이고 민주적이라면,그래서 이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지역차별을 타파,근절시킬 수 있는 의지와 자세를 갖춘 사람이고 정당이라면 적극적으로 밀어줄 수 있는 대승적 자세, 열린 자세를 갖도록 해야하네. 우리호남인들이 먼저 주체적 반성을 하여 정당성을 확보한 후 올바른 방도와 원칙과 자세를 가지고 지역주의 타파와 지역차별과 소외의 근절을 위해 싸워 나가야 하네. 그렇게 해야 DJ와 그의 당을 바로 잡을 수 있고 타지역인들의 더 많은 동조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네. 그렇게 해야 우리 호남인들의 권위와 상징성을 회복할 수 있고 긍지와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네. 그렇게 해야 5.18의 명예도 되찾고 5.18의 정신도 제대로 계승하고 5.18의 전국화도 이루어 낼 수 있네. 그렇게 해야 현 YS정권의 옹졸하고도 추악한 패권적 지역주의와 지역차별 정책을 힘있게 비판해 나갈 수 있고 더 나아가 영남, 충청 지역의 지역주의와 영남, 충청 출신 지역주의자들을 당당하게 비판해 나갈 수 있게 되네.

그렇게 호남인들이 앞장서서 지역주의를 극복해나가기만 하면 비록 DJ와 그의 당이 집권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은 있으나 지역주의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줄서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해 정계 일선에서 밀려나거나 정계 입문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한시가 급한 정치개혁과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정부 수립도 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는 이 망국적인 저주의 지역주의,지역차별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게 되네 .

끝으로 몇 가지만 다시 강조하겠네. 지역차별은 영남 출신 역대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지,영남인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네. 절대로 영남인들을 가해자 취급하거나 적대시해서는 안 되네. 그들도 피해자들이네. 우리와 그들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한 핏줄이네 .

영, 호남인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은 지역주의를 권력 유지나 장악을 위해 교묘히 조장 이용하는 못된 정권과 여, 야 정치인들을 도와주는 것이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네. 지역주의를 통해서 지역 간의 계급적 정치적 단결과 연합을 아주 쉽게 막을 수 있는데 어떤 정권이 지역주의를 이용해 먹지 않겠는가? 지역주의를 통해서 특정 지역에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손쉽게 확보 유지할 수 있는데 어떤 정당이 지역주의를 이용해 먹지 않겠는가? 몇 마디의 말로 지역인들의 지역감정을 자극 조장함으로 써 수많은 표를 끌어 모을 수 있는데 어떤 정치인이 지역주의를 이용해 먹지 않겠는가?

자네는 충청지역의 지역주의 발생 과정과 심화 과정을 보지 않았는가? 충청지역의 지역주의가 차별과 소외 때문에 발생 심화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지역주의를 이용하여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절대 다수이네.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못된 정치인들과 각 지역인들은 운명공동체가 아니라네. 자네는 DJ와 그의 당이 지역주의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가? 수혜자요 이용자라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가?

호지!

속지 말아야 하네. 이용당하지 말아야 하네. 망국적인 분열주의인 이 저주의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지역주의를 반대 비판하는 영남 충청인들을 비롯한 타지역인들과 굳게 연합 연대해 나가야 하네. 세계가 비웃는 이 터무니없는 지역주의를 하루 빨리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준비해 나가야 하네. 그리고 드넓은 국제사회로, 무한 경쟁의 국제사회로 눈을 돌려 민족의 존엄과 권익을 지켜 나갈 준비를 해 나가야 하네.

호지!

끝까지 읽어 주어서 고맙네.

자네나 나나 한 열흘 더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만나서 생산적인 토론을 계속해 보세.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하겠네. 잘 자소.

96. 8 .10

 광주의 충격

귀국한 직후 나는 몇 사람으로부터 몇 차례 똑같은 당부를 받았다.

“광주에서 편안히 대접받고 살려면 DJ와 모 운동세력과 5월 단체들과 충돌하지 말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라.”

당시에 나는 그런 당부를 웃어넘겨 버렸다.

“내가 편안히 대접받고 살려고 귀국했나? 잘못하고 있으면 비판하고 잘하고 있으면 함께하거나 도와야지.”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DJ측과도 모 운동세력 측과도 일부 5월 단체들과도 부딪치고 말았다. 일부 5월 단체들,일부 운동 세력 측과 내가 부딪치게 된 이유는 나의 환멸과 분노 때문이었다. 영령들에 대한 죄책감과 도망자로서의 죄의식을 안고 10여 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다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5월 관련자 들이나 단체들은 광주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내가 이리저리 알아보았더니 외면당하는 이유는 일부 5월 관련자들과 일부 운동세력 측이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을 위한 투쟁은 훌륭하게 했으나 평상시에 5월 항쟁은 자신들만 했던 것처럼 행세하며 항쟁의 주역이었던 시민들을 5월과 무관한 사람들로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을 자신들의 개인적 명예와 채권과 이권으로 간주하는 듯한 처신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심한 환멸과 배신감을 느꼈고 더 나아가 절망하고 분노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5월 관련자들이 학살정권과 싸우면서도 항상 모든 영광은 영령들께 돌리고 자신들은 한쪽에 비켜서서 예우나 받는 자세를 유지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올바른 5 • 18 정신계승을 위해 노력하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5.18 기념재단 설립 활동에 뛰어들었다. 귀국해서 보니 5.18의 기념과 계승을 위한 재단 설립 문제를 놓고 5월 관련자 들이 둘로 나뉘어져 서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나는 5.18과 정신계승 사업의 주체가 될 재단이 올바르게 설립되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귀국한 지 한 달 만에 그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나는 귀국 후 망월동의 영령들께 찾아가 “저는 앞으로 5 • 18 정신의 계승과 도망자의 빚을 갚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한 대로 앞으로 설립될 재단에서도 어떠한 지위나 직책도 맡지 않겠다고,산파 역할만 하겠다고 선언하고 그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5월 관련 단체들과 상당수의 운동가들,일반 시민들, 해외동포들이 참여한 5 • 18기념재단은 많은 갈등과 진통 끝에 1년이 지난 94년 8월 말에야 창립되었다. 갈등과 진통의 이유는 복잡했다. 5 • 18기념재단 창립선언문 중 일부를 참고로 실어보겠다. (재단 창립선언문은 내가 직접 써서 추진 위원들의 동의를 받아 창립 대회장에서 낭독되었다.)

“5월은 명예가 아니고 멍에이며 채권도 이권도 아니고 채무이고 희생이고 봉사입니다. 5월은 광주의 것도 구속자,부상자,유가족의 것도 아니고 조국의 것이고,전체 시민과 민족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또한 5월이 광주의 5월로 올바로 서야 진정한 전국화,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5월이 다시 섰습니다. 구속자,부상자,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님들을 욕되게하고,광주를 부끄럽게 하고,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님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시민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란히 섰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창립되었습니다. 가신님들이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나는 처음에 선언했던 대로 재단의 어떤 지위나 직책도 맡지 않았다. 그러나 재단 설립 과정에서 나는 추진위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김현장,윤강옥과 마찬가지로 협박 전화를 받고 폭언을 듣고 충격적인 모함 중상도 당했다.

“안기부와 짜고 들어와 광주,전남의 운동을 분열시키려고한다.”

“청와대의 지원을 받아 모 정파와 손잡고 우리를 깨려고 한다.”

“수상한 놈이다.”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 광주에 돌아와 그것도 운동한다는 사람들로부터 협박과 중상을 당한 것이다. 여가 선용 차원에서 운동한답시고 설치는 해외의 일부 못된 사람들이 나와 민족학교,한청련에 대해 중상을 해 왔을 때마다 나는 마당집 식구들이나 회원들에게 “조국 운동권에는 이런 더러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 사람들은 운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 하곤 했는데 돌아와 보니 조국의 운동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운동의 탈을 쓰고 5월을 팔고 조국과 민족을 파는 일부 위선자들이 재단 설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향력과 명예와 권위가 훼손되었다고 판단되자마자 대뜸 그런 모함 중상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런 중상은 미국에서와는 달리 나의 분노만 촉발시켰을 뿐 거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환멸을 느껴 5.18 기념행사장에는 귀국 후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도청 앞에도 망월동에도 행사 때는 가지 않았다. 또 중상을 한 모 운동 세력들이 설쳐대는 행사장에도 아예 가지 않았다. 대신 이곳저곳의 강연회나 토론회의 연사나 토론자로 초청받아 5월 정신의 올바른 계승과 올바른 운동을 강조하고 호소하는 활동만 했다.

나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설립인가를 받은 5.18기념 재단의 사무실 현판식을 3시간 앞두고 5월 영령들께 보고를 드리기 위해 조비오 이사장님을 비롯한 이사님들 그리고 설립 추진위원들과 함께 망월동에 찾아갔다가 재단 설립 과정에 불만을 가진 일부 관련자들로부터 횡포를 당하고 “〇〇〇 팔아서 돈과 명예를 챙기는 놈들”이라는 욕설을 듣고 모두들 분향도 묵념도 못하고 쫓기듯 돌아온 그날의 참담함을!

"나는 80년 이후 오늘까지 5월 영령들을 가슴에 고이 모시고 살아왔는데,5월 정신을 가슴에 안고 해외에서나마 내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해 왔는데,보상금도 받지 않았고 5월에 관련된 어떠한 명예도 챙긴 적이 없는데 이렇게 영령들께 참배도 못하고…’

그런 일이 있고 난 얼마 후에 나는 미국에서 찾아온 한청련 회원들과 함께 망월동에 참배하러 갔다. 참배를 마친 한 여자 회원이 비닐봉지에 묘역의 흙을 하도 많이 퍼 담기에 물었다.

“마당집마다 다 있는데 또 어디다 쓸려고 그렇게 많이 담지?”

여자 회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회원들 결혼 선물로도 주고 아기를 낳을 때마다 축하 선물로 줄려고 그래요.”

“.......”

나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래,5월은 광주만의 것은 아니지 . 5월 정신을 광주에서만 계승하는 것은 아니지. 그래,너무 절망하지 말자.”

뒷이야기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는 바닷가에 나갈 때마다 바다더러 “나도 네 신세처럼 되어버렸단다. 나에게도 너와 비슷한 그리움이 있단다. 굽이쳐가다 내 조국강산을 만나거든 나의 이 그리움을 전해주라.”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아직도 그리움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바다와 달리 그리운 조국,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국은 내가 그리던 조국은 아니었다.

귀국한 지 3년이 된 지금도 나는 조국생활에 적응을 못해 고통을 겪고 있다. 조국생활에 적응하기가 미국생활에 적응하기보다 훨씬 힘들었다. 적응이 힘든 까닭은 사회가 너무 악독해 졌고 사람들의 가치관,사고방식,생활방식 등이 너무 많이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I2년 세월의 벽이 너무 높고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 첫봄에 나는 해외에 있을 때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진달래를 보기 위해 시골로 찾아갔다. 그리고 묘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고 돌아왔다. 진달래마저 옛 진달래가 아니었다. 내가 그리던 진달래는 초동들의 낫에 잘려 다보록한 진달래,앉아서 꽃잎을 만지고 향기를 맡았던 진달래,소박한 시골처녀 같은 진달래였다. 그러나 내가 본 진달래는 키가 커질 대로 커져 부잣집 정원에 있는 화사한 꽃나무 같은 진달래,세련된 도시 아가씨같은 진달래로 변해 있었다.

12년 망명생활 동안 나는 외롭고 슬프거나 괴롭고 힘들 때마 다 5월 영령들과 옛 동지들을 생각하며 이겨내곤 했는데 돌아와 보니 5월 영령들은 모든 영광과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앞이 가려진 채 말없이 누워 계시고 옛 동지들은 진달래처럼 거의가 다 변해 있었다. 변했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미국화 되었다는 소리 듣지 않도록,변함 없는 전라도 촌놈 ‘합수’로 살다가 돌아가자고,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운동하다가 돌아가자고 그렇게 무수히 다짐하며 살다가 돌아와 보니 나는 박물관에서 방금 나온 사람,깡통 안 찬 거지, 부시맨,골동품,상처 안 받은 사람,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국의 운동,광주의 운동을 해외에 확장시킨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다가 돌아와 보니 운동 또한 진달래처럼 변해 있었다. 물도 썩었고 고기들도 변해 있었다. 옛날의 운동 자세와 모습은 초라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군데군데 흔적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12년 세월의 벽,12년 변화의 바닥이 나를 마냥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아닌데…”

귀국 후 나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다. 95년 4월에 팔순이 넘으신 어머님의 집요한 하소연에 굴복해서 결혼을 했다. 만 47세의 늙은 총각이었던 나는 한청련 회원으로 민족학교 총무로 활동하면서 나를 정성으로 뒷바라지 해주었던,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34세의 신경희 씨에게 국제전화로 청혼해서 결혼한 후 내 생애에서 가장 넓고 좋은 주거공간인 12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에 살림을 꾸렸다. 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고마운 몇몇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95년 3월 ‘민족의 위대한 미래상을 마련하고 중장기적인 진 로를 제시하며 그 진로를 개척해 나갈 인재와 세력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가진 민족미래연구소를 광주에 설립해서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도 두 번 다녀왔다. 내가 귀국한 후 한청련,한겨레는 조직 내에 분규가 일어나 일부 화원들이 탈퇴하는 진통을 겪었지만 장하게도 빠른 시간 내에 조직을 재정비,강화하여 옛날처럼 왕성한 활동을 헌신적으로 계속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로 동포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건강이 나빠졌다. 서양의술로는 못 고친다는,무서운 불치병 이라는 폐기종에 걸렸다. 대기오염이 심한 도시생활은 피해야 한다는 고약한 병이다. 악화된 건강은 나의 의욕과 열정을 많이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내가 귀국 후 세운 중장기 계획까지 변경시키고 말았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나면 만사를 제쳐두고 숨은 명의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치료를 할 작정이다. 나는 건강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지라도 5월 영령들과 지난 12년의 망명생활과 헌신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을 생각하며 이겨 나갈 것이다. 영원한 그리움의 바다와 속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이겨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