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마이클 잭슨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일 (월) 22:54
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마이클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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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58년 8월 29일(1958-08-29)
미국 인디애나주
사망2009년 6월 25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국적미국 미국
직업가수 겸 작곡가, 안무가, 댄서, 음악 프로듀서
활동 기간1968년(잭슨 5) ~ 2009년
종교없음
배우자리사 마리 프레슬리(1994~1996)
데비 로우(1996~1999)
가족아버지 조셉 잭슨
어머니 캐서린 잭슨
정보 수정

Michael Joseph Jackson
영원한 팝의 황제

개요

미국의 前 팝 가수, 前 댄서, 前 프로듀서, 前 배우. 20세기 전 세계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인종간의 음악적 장벽을 부수고,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대중 음악계의 신화적 인물이다. 또한 그의 사생활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왔다.

수많은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등 굵직한 기록을 소유하고 있다.[1]1969년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1집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로 데뷔하였고 수록곡 'I want you back'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2] 2014년 사후 앨범인 <Xscape> 수록곡 중 'Love never felt so Good'은 빌보드 9위를 기록[3]하며 40년대 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TOP 10위권 안에 든 유일한 가수이기도 하다.[4]

또한 작사·작곡 실력을 인정받아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으며[5] 댄서로서의 공로도 인정받아 2010년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다.[6]

<뉴스위크>는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내트라비틀즈, 엘비스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커트 코베인머라이어 캐리도, 비욘세도, 마돈나도, 잭슨의 위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고 보도했다.[7] AP는 비틀즈에 비견될 만큼 항상 센세이션을 불러온 팝 스타였다고 평가했으며[8] 2009년 가장 충격적인 연예인 뉴스로 잭슨의 죽음을 1위에 선정하며 팝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중대한 죽음 중 하나라고 밝혔다.[9] 1984년 뉴욕타임즈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종간의 경계를 부순, 팝 뮤직이 아닌 대중문화 그 자체인 가수라고 보도했다.[10]

하지만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으로서는 위대한 업적을 쌓으며 수많은 찬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인간 마이클 잭슨으로서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래 항목 참조

커리어

잭슨 5: 음악 인생의 출발점

솔로 가수로서의 입지도 대단하지만, 그의 음악 인생의 출발점인 잭슨 5도 대단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밴드로 평가받고 있으며[11] 흑인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최초의 남자 아이돌 그룹의 원형 중 하나로 뽑힌다. 잭슨 5 활동 기간 동안 4천만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으며 빌보드 차트에서 수차례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잭슨은 잭슨 5에서 자신의 친형 저메인 잭슨과 함께 메인 보컬을 담당했다. 원래 마이클 잭슨은 잭슨 5의 초기 멤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노래 재능에 감탄한 어머니 덕분에 잭슨 파이브에 가입할 수 있었다.

<Got to be there>: 첫 솔로 데뷔

13살 1971년 <Got to be there>라는 앨범으로 첫 솔로 데뷔를 한다. 빌보드 3위를 배출한 수록곡이 있다.[12] 다음년에는 Ben 을 발매했는데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13] 이후 2개의 솔로 앨범을 더 발매했다. 이 시기에는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주로 활동했고 변성기가 온 이후로는 이전과는 달리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Off the Wall> (1979): 성인이 된 후 첫 솔로 활동

1979년 <오프 더 월>(Off the Wall)을 발매하며 첫 성인으로서의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천만장 이상이 팔렸다.[14] 두 개의 빌보드 1위곡이 나왔고 10곡의 수록곡 중 발매한 4장의 싱글은 모두 빌보드 차트 10위 안에 진입한다.[15] 평단에게 인정을 받았으며[16][17] 2008년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다.[18]

<Thriller> (1982): 팝의 황제가 되다

6500만장 이상이 팔렸다. 이는 전 세계에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다.[19] 이 앨범은 잭슨을 팝의 황제로 등극시켜준다. '빌리 진'과 'Beat it' 등 총 2개의 빌보드 1위곡을, 9곡의 수록곡 중 발매한 싱글 7개 모두가 빌보드 차트 10위 안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1984년 권위높은 시상식인 그래미에서 이 <스릴러> 앨범으로만 7개의 상을 수상했고, 영화 ET의 사운드 트랙 작업으로 1개의 상을 더 수상했는데 이는 역대 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 기록은 2015년에도 깨지지 않았다![20] 이 또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으며[21] 미국 국립 음반 기록소에도 등재됐다.[22]

<Bad> (1987)

숱한 논란 속에 3집 Bad가 5년 만에 발매된다. 3200만장 이상이 팔렸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23] 전작 <Thriller>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다수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202위이며 MTV에서는 43위로 선정됐다. 또한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 등 5곡의 빌보드 1위 곡이 나왔는데 이는 한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 곡이 나온 것이다. 이 음반의 대성공으로 그는 80년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판 뮤지션이 됐으며 전작들과는 달리 11곡 중 9개의 곡을 단독으로 작사·작곡하여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도 확고히 했다.

<Dangerous> (1991)

퀸시 존스와 헤어지며 새로운 프로듀서인 테디 라일리와 합작했다. 락(Rock)적인 면이 더 강해졌고 전작과 달리 뉴 잭 스윙이 활용됐다. 3000만장 이상이 판매됐으며[24]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6위를 기록했으며 수록곡 'Black or White'는 빌보드 차트에서 7주간 1위를 차지한다.

1993년에는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왔다. 시청률은 무려 47.9%로 9천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시청했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 8위를 기록했다.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 (1995)

최악의 2년을 보낸 뒤 발매된 앨범. 잭슨의 히트곡을 모은 1CD와 신곡을 담은 2CD로 구성된 첫 더블앨범이다. 2200만장 이상이 판매됐다.[25]

이 앨범은 유태인 비하와 우상화 논란을 겪었다. 수록곡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는 유태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미국 내에서는 금기시 된 용어였다.[26] 음반 발매 전 6월 15일 뉴욕타임즈는 앨범에 인종차별적 요소가 들어 있다고 보도했다.[27] 6월 17일 잭슨은 그 말을 선택한 것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를 했다. 잭슨은 직접 말했다. " 이 가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이 노래는 편견과 증오에 대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끌기 위한 한 방법이다. Jew라는 용어는 잘못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였다"고 해명했다.[28] 이후 ABC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많은 친구들이 유태인인데 왜 자신이 유태인을 비하하겠냐며 해명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성급한 행동이었다며 일부 비평가들은 비판하였다.[29] 또한, 'HIStory' 필름은 잭슨의 동상이 세워지고 수많은 들이 환호하는 속에 잭슨이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모습이 연출된다.[30] 이 연출 때문에 잭슨이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우상화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잭슨은 ABC와의 인터뷰에서 결코 파시즘을 생각하며 제작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선택한 노림수라 대답했다.

<Invincible> (2001)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와 합작하여 6년 만에 정규앨범이 발매된다. 그러나 평론가들에게 좋지 못한 평가를 들었고 판매량도 겨우 500만장에 그쳤다. <인빈서블>은 잭슨의 마지막 정규앨범이 됐다.

<This is it> (2009)

숱한 루머 속에서 잭슨은 컴백을 선언한다. 영국 런던 아레나 O2 공연장에서 이번이 내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음 10회의 공연이 계획됐지만 40회가 더 추가됐고 75만 개의 티켓은 전부 매진된다. The Life of an Icon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당시 잭슨은 10회만 공연하는 줄 알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40회가 더 추가돼서 당황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 결국 50회 공연을 강행하기로 한다.

그러나, 2009년 6월 25일 주치의 콘레드 머레이에 의한 치사량의 프로포폴 투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50세의 숨을 거두게 된다.

영향력

잭슨의 영향력은 보는 음악의 시대, 인종 차별 돌파, 획기적인 사운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인종적 영향력

그의 대성공은 흑인들에게 엄청난 긍지와 자신감을 불어줬다. 1996년 한국에서 벌어진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 반대 운동 당시 재미교포들은 흑인들의 반응을 문화체육부에게 이렇게 전했다. "한국에선 그저 잭슨이 유명한 가수인 줄로 알지만 미국내 흑인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잭슨은 흑인사회에서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영웅 중 영웅으로 불리며 절대적 신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런 잭슨을 비난하며 내한 공연을 반대하고 있으니 흑인들이 큰 반발을 하는 중이다." 라며 제2의 LA 흑인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내한 공연을 조속히 허락할 것을 촉구했다.[31]

잭슨을 팝 황제로 만들어 준 <Thriller>는 최고의 음악 매체 중 하나인 MTV의 인종적 장벽을 돌파해냈다는 점에서도 큰 평가를 받고 있다. MTV1981년 개국하였다. 당시 MTV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밥 피트먼은 방송의 구성을 로큰롤에만 제한했는데 로큰롤은 백인들의 음악으로 흑인들의 음악 다수가 제외돼 버렸다. MTV 개국 이후 방영된 뮤직비디오 750개 중 흑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는 40개도 되지 않는다. 흑인들은 반발을 하며 MTV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잭슨의 '빌리 진'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고 잭슨의 소속사인 CBS는 MTV에게 빌리 진의 뮤직비디오를 건넸지만 MTV는 거절했다. 'Beat it' 뮤직비디오가 제작된 이후 CBS는 이 뮤비를 MTV에게 제공하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CBS 소속의 다른 모든 가수들을 MTV 방영 목록에서 제외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MTV는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흑인 가수 한 명을 위해 거대 소속사가 움직여 MTV를 압박한 것이다.

또한 많은 방송국들에서도 잭슨의 위력은 엄청났다.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비디오 방송국들과 흑인 가수들이 잘 나오지 않는 케이블 채널에도 잭슨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는 꾸준히 송출됐다.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거의 안 튼다고 봐도 될 정도였던 Album Oriented Rock 계열의 라디오 방송에서도 잭슨의 노래는 나왔다. 뉴욕타임즈는 잭슨이 방송국들의 인종차별적 프로그램 정책을 돌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은 이러한 잭슨의 돌풍을 보고 잭슨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으며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최대의 가수라고 소개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잭슨의 이름이 퍼져 그가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이런 공로로 유색인 지위향상협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유명 농구 선수인 매직 존슨은 흑인들을 위해 수많은 길을 열어줘서 감사하다고 표했다.

업계에서 영향력

잭슨의 영향력은 음반·패션 등 수많은 업계에도 끼쳤다. 70년대 후반부터 음반업계는 불황이었고 음반 가게는 계속해서 망해갔는데, 사람들은 잭슨의 앨범을 사기 위해 음반 가게로 몰리기 시작했고 잭슨의 앨범을 사면서 다른 가수들의 앨범까지 사간 것이었다. 이는 음반업계의 불황을 막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며 음반 판매 최호황인 78년의 총 판매량인 41억 달러를 잭슨이 <Thriller> 한 장으로 3천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78년 한 해의 총 판매량보다 더 높은 수입을 거둔 것이었다. 당시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인 "음반 산업은 잭슨의 성공의 몫을 봤다"고 증언했다. 패션 업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잭슨이 입는 옷은 사람들이 입으려 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심지어 잭슨의 패션을 따라하지 못하도록 규칙까지 제정했을 정도였다. 또한 잭슨의 대중성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펩시 콜라는 84년 잭슨과 500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체결하며 유명인과 관련된 계약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보는 음악에 끼친 영향력

뒷골목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흑인들의 브레이크 댄스와 로봇춤을 방송에서 선보이며 선풍적인 유행을 만들었고 1983년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빌리 진'을 춤으로 선보였는데 거기서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문워크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는 미국인들이 역사상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장면 7위로 뽑히기도 했다. 200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하여 만든 'Dangerous' 안무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국회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비디오 'Thriller'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다. 무대 위에서 노래와 함께 정교한 안무를 선보였고 'Thriller'와 'Beat it' 뮤직비디오는 잭슨이 최초로 집단 군무 뮤직비디오를 선보인다. 잭슨의 놀라운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은 직접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고 잭슨 사후 많은 유명 댄서들이 "댄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애도를 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앨범은 뮤직비디오 시대를 연 MTV가 주류 매체가 되도록 기여했다고 평가받으며 투어 공연에 뮤지컬 형식을 도입하거나 새로운 장비를 사용하는 등 혁신적 시도도 꾸준히 하였다. 이런 잭슨의 활동은 후대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줬다.

사운드의 영향력

정일영 평론가는 잭슨의 앨범은 그냥 팝이라고 흘리기에는 음향 엔지니어로 배울 점이 너무 많다고 평가했다. 임진모는 잭슨의 앨범은 사운드가 뛰어나 옛날 스튜디오 엔지니어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있었다고 회고했으며 소리에 대한 민감성이 사상 최고라 할 정도로 사운드에 완벽성을 추구한 가수라고 평가했다. 이를 증명하듯 <Bad>와 <Dangerous> 2개의 앨범은 엔지니어 상을 수상한다.

세계적인 대중성

세계적으로 핫한 대중성을 몰고온 가수이기도 하다. 1984년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4위로 뽑히기도 했다. 또한 언론 보도를 보면 당시 한국에서 잭슨의 유명세는 조용필과 맞먹을 정도라고 했다. 소련은 잭슨을 악마라며 비난했고 동독의 경우는 <Bad> 투어 당시 서독으로 공연을 하러 오는 잭슨 때문에 혹시나 동독의 청년들이 서독으로 넘어가지는 않을지 초긴장을 했다고 한다. 체첸 사람들은 자신들의 반군 지도자를 마이클 잭슨이라고 불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빈민촌에서는 흑인 아이들이 제2의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추기도 한다고 주간조선이 보도했었다.

투어

잭슨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15번의 투어를 하였다. 그러나 11번은 모두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투어였고 솔로 투어로는 <Bad> 투어(1987~1988), <Dangerous> 투어 (1992~1993), <HIStory> 투어 (1996~1997),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1999)로 총 4번이다.

1984년 열린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의 투어인 <Victory> 투어는 80년대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투어 7위로 기록됐다. 노래의 전부를 잭슨이 라이브로 불렀다.

1987년 열린 첫 솔로 투어인 <Bad> 투어는 80년대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투어 2위로 솔로 가수의 투어로는 1위이다. 총 123회 공연 440만명의 관중들을 동원했고 영국 웸블리 구장에서는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1992년 열린 <Dangerous> 투어는 350만명의 관중들을 불러왔다. 투어를 다 끝마치지 못했는데 후반기에는 진통제 중독과 건강 이상으로 투어가 중단되고 만다. 유명한 퍼포먼스로는 오프닝 'Jam'의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토스트 기법이다. 1992년 HBO라는 미국의 케이블 채널에서 데인저러스 투어의 라이브 동영상 판권을 구입하여 방영하였는데 21.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는 미국 케이블 채널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이다. 2005년 <Dangerous> 투어의 라이브 동영상이 발매된다. <Dangerous> 투어 당시 잭슨은 미식 축구 결승전인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시청률은 전년 하프타임에 비해 8%가 상승했으며 잭슨 이후 슈퍼볼 하프타임에는 유명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게 된다.

1996년 열린 <HIStory> 투어는 82회 공연 450만명의 관중들을 불러왔다. 잭슨의 건강 이상으로 인해 노래의 대다수를 립싱크로 처리한다. 투어의 규모는 이전 투어들에 비해 훨씬 거대해졌다.

1999년 열린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은 한국 서울독일 뮌헨 2곳에서 한 차례씩 열렸다. 우리나라에선 <SBS>가 당시 공연을 생중계 해줬는데 잭슨이 등장한 6부에서는 시청률 42.3%를 달성했다.

사생활

잭슨은 자신의 음악과 댄스 외에도 사생활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외모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가는 피부색과 그의 이목구비는 언론들과 사람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의 이목구비, 즉 성형과 관련된 문제에서 잭슨은 1988년 자신의 자서전 『문워커』와 2003년 인터뷰인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서 총 2번의 코 성형수술을 했으며 턱에 홈을 파는 1번의 시술을 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성형수술을 2번 했는데 어떻게 이목구비가 확연하게 변하냐는 의문을 품은 것이다. 잭슨의 성형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신뢰도 높은 증언에 따르면 4번의 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면 잭슨은 최대 4번의 코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목구비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성형도 있지만 그의 심한 체중 감량과 노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피부색의 경우에는 백반증이 원인이 됐다. 집안 대대로 백반증 유전력을 가진 잭슨은 1978년 사진을 보면 백반증이 약간 진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984년 펩시 광고 촬영 도중 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백반증은 화상을 입으면 급격하게 악화되는데 이로 인해 잭슨의 피부색이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변하게 된다. 백반증은 덤성덤성 하얘지기에 사람들이 보기에 외관상 좋지 않다. 결국 잭슨은 화이트 메이크업으로 번져가는 백반증에 맞춰 피부색에 변화를 주게 된다. 그러나 잭슨은 백인이 되기 위해 탈색을 한다는 근거 없는 비난에 휩싸였다.

왁코 잭코와 언론

왁코 잭코(Wacko Jacko)는 미친 잭슨 혹은 괴짜 잭슨이라는 잭슨의 별명이다. 이 별명은 1987년 나왔는데 1987년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들, 즉 찌라시들은 잭슨을 '150살까지 살기 위해 산소통에 자고 있으며, 시체를 사려는 피부 탈색성형 중독자'로 묘사했다. 또한 온갖 루머들이 다 퍼졌는데 마이클 잭슨의 동생인 자넷 잭슨과 동일인물이라던가 혹은 잭슨이 외계인을 만났더단가…. 이로 인해 잭슨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된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 생전 그리고 죽어서인 지금까지도 잭슨을 왁코 잭코라 부르며 근거 없는 비난 기사를 퍼뜨리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국의 유명 보수주의 언론인 폭스 뉴스와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폭스 뉴스는 타블로이드 언론의 보도를 고대로 받아적는가 하면 자신들이 직접 근거 없는 비난 기사로 잭슨을 공격했다.

성격

매우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수줍음을 너무 타서 등을 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그의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는 처음 잭슨의 모습을 보고 자신감 없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걱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잭슨에 대해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여자 관계

잭슨은 여자같은 곱상한 얼굴을 가졌으며, 여자같은 높은 목소리를 가졌는데 이는 잭슨이 동성애자라는 루머가 퍼지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잭슨의 성 정체성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한 면이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온 잭슨이 오프라에게 동정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2011년 잭슨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잭슨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The Life of an Icon 라는 다큐멘터리가 발매된다. 거기에서 잭슨의 지인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잭슨은 여자 배우들과 활발한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소식이 흘러나가면 팬들의 지지가 떨어질까봐, 절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잭슨은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데비 로우라는 여자와 각각 결혼을 경험한 바 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미국의 전설적 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다. 리사는 어릴 때부터 잭슨과 만나게 됐고 잭슨이 1993년 최악의 소송에 휘말렸을 때 급격하게 가까워지며 서로 의지하게 된다. 잭슨의 지인인 J. Randy Taraborrelli 가 집필한 책인 Michael Jackson – The Magic, the Madness, the Whole Story에서 당시 일화가 나오게 되는데, 리사 마리의 친구들은 리사 마리는 성경험을 중요시하며 독특한 성경험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잭슨에게 푹 빠진 것을 보면 그와의 경험이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리사 마리와의 결혼은 세간에서 좋지 못한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잭슨이 이미지 회복을 위해 리사 마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즉, 사랑하지도 않는데 가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잭슨과 리사 마리는 우리 둘은 정말 사랑을 하고 있다며 반박했다. 몇 년 뒤 둘은 이혼을 하게 된다. 리사 마리는 이혼 후 여러 인터뷰들을 통해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잭슨과 정말 사랑을 한 것이 맞으며 잭슨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리사는 잭슨에 대해 그 사람이 선택한 삶의 방식인데 남들이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옹호했다.

데비 로우와는 80년대 잭슨이 백반증으로 고생하여 피부과를 방문했을 때 만나게 된 간호사이다. 둘은 자주 만나면서 사이가 가까웠는데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잭슨은 아기를 가지고 싶어 했는데 리사 마리와의 결혼 생활에서는 리사의 반대로 아기를 가지지 못했고, 이후 데비와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기로 결심한다. 데비와는 총 2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몇 년 뒤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된다.

가족 관계

어머니 캐서린 잭슨과는 사이가 가깝고 좋은 편이다. 그러나 아버지인 조지프 잭슨과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이유는 잭슨이 어릴 때 조지프 잭슨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인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다. 조지프는 잭슨을 채찍질 하기도 했으며 잭슨의 외모 특히, 잭슨의 크고 넓은 코를 집중적으로 비난했는데 이는 잭슨이 외모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조지프도 이러한 학대 사실을 인정했다.

형제들과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친형인 저메인 잭슨은 1991년 자신이 발매한 음반에 잭슨을 비난하는 노래를 수록하였고 친누나인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잡지에서 누드 화보를 찍는 가 하면 자서전 등을 만들며 자신들의 가족들을 비난하기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인한 민사 소송에 당했을 때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자신의 동생 마이클의 결정적인 성추행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거짓 증언을 함으로 큰 논란을 불러왔으며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자신의 남편인 조 잭슨의 협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저질렀던 일이라며 용서를 빌었다.

잭슨이 죽고나선 잭슨의 유산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였다. 잭슨의 유서에는 형제들에게 돈을 지급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이로 인해 형제들은 유서는 조작된 것이며 잭슨의 유산을 관리하는 변호사들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잭슨의 자식들은 트위터를 통해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며 슬픈 감정을 드러냈고 이 문제와 관련해 캐서린 잭슨이 몇 시간 사라져 납치된 것이 아니냐는 등 여러 좋지 않은 말이 나왔다.

성추행 혐의

1993년 첫번 째. 성추행 사건이 터진다. 조단 챈들러라는 13살 짜리 소년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32] 1992년 잭슨은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고장이 나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우연히 잭슨이 차 고장으로 인해 쩔쩔매는 모습을 본 근처 카센터의 직원은 그것을 사장 데이비 슈워츠에게 알렸다. 데이비 슈워츠는 훗날 잭슨이 자신을 성추행 했다며 주장한 조단 챈들러의 의붓 아버지이자 조단 챈들러의 친어머니인 준과 재혼한 사람이다. 슈워츠는 당시 아내 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조단 챈들러는 열렬한 잭슨의 팬이었다.조단은 잭슨이 펩시 CF 광고를 촬영하던 도중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편지를 써서 빠른 쾌유를 빌기도 하였다. 이를 이용하면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잭슨에게 접근했고, 잭슨에게 차를 렌트해주는 조건으로 자기 아들과 놀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잭슨은 OK를 했고 조단과 그리고 조단의 어머니인 준 그리고 조단의 동생인 릴리까지 네버랜드를 포함하여 호텔 등에서 함께 놀았다.[33] 이들의 사이는 급격하게 좋아졌는데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마이클 잭슨의 새 가족이라는 특종을 보도하기까지 하였다.[34] 한편 이혼한 남편 이반 챈들러는 이러한 잭슨과 소년의 우정에 질투를 느끼게 되고[35][36] 잭슨을 직접 대면하기까지 한다. 이반 챈들러는 잭슨을 대면하고 나고선 그에 대한 악감정이 풀렸고 이반과 잭슨의 사이 또한 가깝게 된다. 잭슨은 이반을 최고의 아버지라고 칭찬까지 하기도 하였으며 이반의 경우는 잭슨에게 아예 우리 집 옆에 집을 지어 조단과 가까이 지내는 게 어떠냐고 제의할 정도였다.[37] 그러나 이들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건 조단이 잭슨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학교 친구들과 놀지도 않으며 잭슨에게만 함께 있으려 한 시점부터이다. 이반의 재정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반은 치과 의사였지만 이혼으로 인해 위자료 6억원을 주며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야망 때문에 거액이 필요했던 시점이다. 이반은 준에게 조단의 양육비를 줘야 하지만 이반은 그것을 줄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반 챈들러는 당시 악덕 변호사로 유명한 베리 로스에게 찾아가 의뢰한 뒤 베리 로스 측은 잭슨에게 찾아가 2000만 달러의 합의를 제시했다. 당시 그들이 증거로 내세운 것은 조단의 녹음이었는데 참고로 조단은 처음에는 잭슨을 열렬히 좋아했으며 따랐으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 적이 없다. 이는 잭슨의 사립 탐정이었던 앤서니 펠리카노에 조사에서도 추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반이 한 정신과 의사에게 조단을 데려가고 마취 전문의가 있어야만 투입할 수 있는 최면 진정제를 투입한 뒤부터는 조단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잭슨과 자신이 성관계를 나눴다는 것. 문제는 이때 사용된 최면 진정제는 'AMYTAL SODIUM'은 상당한 부작용으로 인해 비판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이 약을 투여하게 되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상대방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또한 이 약을 사용하여 거짓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지 미국 워싱턴 대학 등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입증이 되기도 하였다.[38][39][40][41]

참고로 이때는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으며, 이반 측과 잭슨 측 두 사이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잭슨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태였고 이반 측은 200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잭슨 측은 결코 안 된다며 35만 달러를 제시했고 결국 둘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1993년 7월 2일 조단의 의붓 아버지인 데이비 슈워츠는 도대체 이반이 왜 이러는 지 이해를 할 수 없게 되자 전화를 시도했고 그 녹음본이 공개됐는데 당시 이반은 데이비 슈워츠에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다" 말하였다.[42]

이후 이반은 잭슨을 민사소송 하였고, 아동복지국은 자체적으로 형사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네버랜드가 압수수색 되자 언론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처음 알게 됐고 잭슨을 향해 끊임없는 비난을 쏟았다. 준은 형사 조사에서 잭슨은 성추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말하였다. 잭슨은 자신은 결코 죄가 없다며 결백을 호소했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진통제 중독 그리고 변호사들이 잭슨이 결백하더라고 하더라도 백인 중상류층 보수 지역인 산타바바라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며 끊임없이 합의를 권유하였으며 결국 2000만 달러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일부는 합의를 유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합의안에서는 잭슨이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명시됐다.[43][44] 말 그대로 합의일 뿐이다. 민사 소송 문제는 해결됐다. 검찰청 검사 'Gil Garcetti'는 민사소송 합의가 형사 수사 건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45] 증거의 부족으로 1994년 9월 22일 조사를 중단했으며[46][47] 경찰이 제시하는 증거들은 잭슨을 기소하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없었으며[48][49] 이로 인해 형사 수사는 불기소로 종결됐다.

당시 잭슨을 고소한 이반 챈들러는 잭슨이 죽은 지 5개월 후인 2009년 11월 17일 권총으로 자살을 하며 생을 끝마쳤다.[50] 또한, LA DCFS(로스엔젤레스 아동복지국)가 당시 잭슨의 사건을 조사한 결과 잭슨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51]

2005년. 개빈 아르비조의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하게 됐다. 재판 끝에 재닛은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했고 만장일치 무죄로 잭슨이 승소했다. 그러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잭슨의 무죄를 신뢰하지 못했다. 여론조사 결과 백인의 28%만이 무죄 판결에 동의했고 54%는 동의하지 않았다. 백인을 제외한 인종에서는 56%가 무죄 판결에 동의했고 26%는 동의하지 않았다. 인종대립적 양상도 보인 것이다. 또한, 잭슨의 이 냐는 질문에 25%만이 팬이고 75%는 팬이 아니라고 응답했다.[52] 마이클 잭슨이 죽고 나서 2009년 잭슨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 잭슨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개빈 아르비조와 가족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증언을 못 얻어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FBI는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 지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갖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타블로이드들의 주장이 개연성과 구체적인 정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사실 또한 밝혀졌다. 그와 함께 개빈 아르비조의 부모인 재닛 아르비조가 돈을 많이 받기 위해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절도 행위를 하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사실이 밝혀졌다. [53]

Living With Michael Jackson

영국의 기자 마틴 바시르가 240일 동안 잭슨을 동행하여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2003년 2월 영국 ITV 방송국이 최초로 방영했는데 무려 시청률이 53.9%였다. 네덜란드,이스라엘,일본에서도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미국에서도 18.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국에서는 2009년 온스타일이 수입하여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방영하였다.

이 다큐는 큰 논쟁을 불러왔다. 잭슨 측은 즉각적으로 반발하며 이 다큐멘터리에서 비춰지는 잭슨의 모습과 실제 잭슨의 모습은 다르다고 반박했다. 다큐에서는 잭슨이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잭슨은 반박 영상을 제작하였다. 잭슨의 전 아내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이 다큐에 대해 자신도 봤지만, 실제 잭슨의 모습과는 다르다며 잭슨을 옹호했다.

  1. マイケル記録ずくめ 「最も成功」ギネスが認定, 아사히신문, 2009.07.02.
    [Guinness World Records 2002, pp. 145–147]
    [Guinness World Records 2005, p. 193]
    Jackson receives his World Records, Yahoo! Music UK & Ireland, 2012.11.14.
  2. Michael Jackson and Motown: the boy behind the marketing, Telegraph, 200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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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미국문화 속 Jewish Subculture
  27. In New Lyrics, Jackson Uses Slurs
  28. Michael Jackson Apologizes For Hurt Caused by Lyrics
  29. `History' Lesson: Jackson's Living On Past Glories
  30. Michael Jackson - History (Official Video)
  31. [마이클 잭슨이 어쨌다구요?. pp. 127-136]
  32. Campbell, p. 47–50
  33. Campbell, p. 47–50
  34. Taraborrelli, p. 464–471
  35. Taraborrelli, p. 464–471
  36. Fischer, p. 217
  37. Fischer, p. 217
  38. Fischer, p. 216
  39. Fischer, p. 221
  40. Taraborrelli, p. 464–471
  41.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80759,00.html Dubious Memories
  42. Taraborrelli, p. 477–478
  43. Jackson settlement from 1993 allegations topped $20 million
  44. Michael Jackson's $15 Million Payoff
  45. [Michael Jackson Settles Suit For Sum Said to Be in Millions Michael Jackson Settles Suit For Sum Said to Be in Millions]
  46. Taraborrelli, p. 540–545
  47. No Charges for Now Against Michael Jackson
  48. Grand Jury - Hearsay Evidence: Admissible Before A Grand Jury?, Should The Grand Jury Be Abolished?, Further Readings
  49. Chapter Four: Grand Jury Manual – Department of Justice
  50. 故 마이클 잭슨에 아동성추행 고소한 60대 자살
  51. Authorities Investigate Michael Jackson’s Children: No Evidence of Pedophilia - See more at: http://celebritynewsandstyle.com/authorities-investigate-michael-jackson%E2%80%99s-children-no-evidence-of-pedophilia-112/#sthash.42HON3NU.dpuf
  52. Instant Reaction: Plurality of Public Disagrees With Jackson Verdict
  53. [ http://www.fbi.gov/news/stories/2009/december/jackson_122209 Michael Jackson File], 2009년 12월 22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