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최근 편집: 2019년 12월 18일 (수)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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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출생1872년 3월 31일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1952년 3월 9일 ()
소련 소련 모스크바
국적소련 소련
별명어릴적 이름은 슈라(shura), 본명은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도몬토비치(Aleksandra Mikhailovna Domontovich,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Домонтович)
학력스위스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 국민경제학 전공
경력정치인, 혁명가, 사회운동가, 외교관
정당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러시아공산당
종교러시아 정교회무신론
배우자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이혼), 마슬로프, 파벨 드이벤코(동거혼, 1922년 결별)
자녀아들 미하일 콜론타이
부모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 어머니 알렉산드라 미살리나 마라빈스키 도몬토비치
정보 수정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슈라' 콜론타이(Alexandra Mikhailovna 'Shura' Kollontai (러시아어 :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1872년 3월 31일 ~ 1952년 3월 9일)는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인, 사회주의 혁명가, 소설가,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 맑시스트 페미니스트 활동가다. 그의 반대파들은 콜론타이를 혁명의 발퀴레라 부르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주요 혁명가 중 한 명으로,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부인 인민위원회의(Совнарком)와 러시아 공산당에서 주요 관료이자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사회복지 인민위원이었고, 1920년 10월부터 1922년까지 러시아 공산당 여성국(젠오트젤: Женотдел)의 국장직을 맡았다. 1922년 노르웨이 대사를 맡은 이후로 여러 국가의 대사직을 역임했다.

생애

유년기

알렉산드라의 본래 성(부계 성)은 도몬토비치(영어: Domontovich, 러시아어: Домонто́вич)이며 아명은 '슈라'이다. 그는 1872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알렉산드라 미살리나 마라빈스키 도몬토비치와 미하일 도모노비치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딸이 태어났을 당시 육군 대령이었고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년)에 참전해 공을 세워 후일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그의 가계는 부계로 13세기의 우크라이나의 귀족 가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살리나 마라빈스카(영어: Androvna Masalina-Mravinskaia)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집안의 딸이다. 그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결혼했을 당시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고 므라빈스키와 이혼한 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감행하였는데 이 점은 딸 슈라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주었다.

슈라는 어린 시절부터 소설과 시를 잘 지었으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제정에 반대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여성가족에 대해 연구했다. 6년간 개인 가정교사로 그를 가르친 가정교사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는 소설가를 꿈꾸던 슈라에게 차르와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는데 스트라호바의 영향으로 슈라는 제정 러시아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한때 불가리아에서 살던 시절 자유주의파에 가담했던 일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았는데, 슈라는 아버지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데 분노하였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어느 손님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손님에게 담배갑을 건네주길 거부해서 부모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슈라는 일반 사회규범을 잘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자신도 어린 나이부터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하였다.

슈라가 어렸을 때 귀족 출신이면서 나로드니키당(국민주권당)의 당원인 소피아 페롭스카야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알렉산드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후일 그가 혁명 활동에 가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한국식 나이 계산으로 17살이 되던 1888년, 이름을 슈라에서 알렉산드라로 고쳤고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그는 모스크바 출신인 한 남성과 사귀었으나 그 남자가 자살하여 첫사랑은 불행하게 종결되었다. 그 뒤 제정 러시아 정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한 여자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그 학교의 급진적인 분위기에 어머니가 반대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청년기

결혼과 유학

스위스 취리히

한국식 나이 계산으로 22살이 되던 1893년, 먼 친척이자 폴란드계 혼혈인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와 사귀다가 결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딸이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아버지도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는 블라디미르가 학식이 있는 자신의 딸을 받아줄 정신적 친밀감을 쌓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와의 결혼에 반대했으나 결국 알렉산드라는 결혼을 감행하였다.

양친의 걱정대로 남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는 무능력하고 아둔했으며 알렉산드라가 즐기는 독서나 철학 토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결혼생활에 크게 실망한다.

1894년, 아들 미하일 콜론타이를 낳았고 같은 해 단편소설 하나를 써서 잡지사에 기고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을 잡지사에 보냈을 때 잡지사에서는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써 보냈다는 평과 함께 작품을 반려해 보냈다. 남편인 블라디미르는 편집자가 아마도 중년 여인보다는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조롱했다. 잡지사의 거절과 남편의 조롱에 화가 난 그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이후 알렉산드라는 집을 나와 친구인 조야 사두르스카야의 집에 머물면서 그와 함께 사회주의에 관련한 서적을 탐독한다. 이때 그는 진화론, 유물론, 변증법 등에 대해 두루 독서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엥겔스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으면서 탐구하였다.

알렉산드라는 1896년에 남편과 이혼한 후 지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고,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국민경제학을 전공했다. 취리히 대학에서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에서는 금서였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작을 자유롭게 탐구하며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 독일어라틴어, 영어를 공부했고, 또 그리스 철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헬라어 등도 틈틈이 공부해 유창해지기에 이르렀다.

여성해방론 연구

그는 여성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여 여성의 해방·독립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 자신의 회고처럼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의 해결을 사회주의체제에서 찾고자 하였다.[1] 그러나 이런 시도는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베벨마르크스, 엥겔스사회주의 사상의 선배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여성의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였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자본 획득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듯이, 여성은 매춘부나 첩 혹은 아내로서 자신의 성을 남성들에게 제공한다고 보았다.[1]

그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법적 재산상속자 생산과 가사 노동이라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부르주아 도덕이란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부부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1]

나르바 견학

20대 무렵

다음을 참고할 것 제1차 러시아 혁명 1896년 나르바로 떠난 여행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만 2천 명이 일하는 거대한 직물공장을 견학하게 되고 그 곳에서 너무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그들의 아이들을 목격한다.[2]

1896년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보던 중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집단침실에서 방치되면서 죽어 나갔다. 아이들의 죽음에 무심한 극빈층의 모습 역시 경악스러웠다.[2] 후일 알렉산드라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공장의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도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공산주의에서 찾게 된다.[2]

러시아 빈민층 여성 노동자의 생활을 목격한 그는 '다른 사람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며 자신의 본가에서 제공되던 혜택을 모두 포기하고 공산주의 정치 활동에 투신한다.

여성과 그들의 운명은 내가 살고 있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발표하였고, 여성 해방 운동에 가담한다. 다시 취리히로 돌아가 수학하던 중, 1898년 초에 귀국하였다.

노동 운동 투신

1900년 무렵

1898년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인권 향상과 여성 해방 운동을 주관하고 여성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전파하였다. 그 뒤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899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자신의 생각을 보다 구체화하고 이론화하기 위해 남편과 이혼하고 스위스로 다시 되돌아갔다. 취리히 대학에서 그는 당시 제정 러시아 내에서는 금서였던 책들을 자유롭게 읽고 사회주의 이론가들과 교류하며 빠르게 급진화되어 갔다.[2] 그 뒤 제정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05년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청년기 - 혁명기

피의 일요일 전후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3] 콜론타이는 피의 일요일에 겨울궁으로 평화적 행진을 하던 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황제의 군대와 경찰은 평화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6백여 명이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날의 비극을 통해 직업적 혁명가로 거듭났다.[3] 그의 제정 반대 운동은 더욱 격렬화되었고, 차르를 살인자, 무능한 군주라며 강한 비난을 퍼붓고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후 그는 단순한 이론가나 작가로서가 아니라 행동가로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노동자들의 모임에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의 웅변적인 연설과 어린 시절 양질의 교육의 결과인 세련된 몸가짐은 투박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3] 그리고 직접 낮은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고, 그들을 직접 대화로 설득시켰으며, 사람에게 유식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 역시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1905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노동 참여와 이 여성 노동자들의 더 많은 참여로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여성 노동운동과 여성노동단체 조직

1905년의 혁명에 여성 노동자가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본 알렉산드라는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했다. 또한 기존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여성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 여성 노동자들을 다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 하였다.

여성노동자 운동은 노동자 운동 전체에서 따로 뗄 수 없는 일부이다. 여성 노동자는 모든 반란에서 남성 노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럼에도 남성 노동자들 만큼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략)... 소심하며 짓밟힌 채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던 여성은 파업과 격동의 시기에 빠르게 성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00년대 무렵

1907년 콜론타이는 직물노조와 수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여성 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하였다. 여성 단독 노조를 결성하자 남자 노동자들이 이를 분파주의라고 반대했다. 이어 러시아사회주의자들까지 콜론타이의 여성노조 결성을 분파주의, 편향주의이며, 노조 활동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큰 대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하였다. 남성 사회주의 운동가들조차 '수동적이고 교육수준도 낮은 '바바들'(러시아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말)은 혁명세력이 될 수 없다'며 조롱하였다. 이에 콜론타이는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여성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여학생과 인텔리겐차 여자들은 부르주아 남녀 평등론자들에게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분파주의가 무서워 우리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혁명은 남자 노동운동가들끼리만 할 것인가.

그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도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된다고 보던 기독교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조차 그의 의견에 부정적, 회의적이었다. 여자들이 수공업과 노동에 종사하려 하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그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을 구성하는 운동을 계속했다. 후일 회고록에서 알렉산드라는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3년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내에서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과 이론적 공방을 벌이고, 사회주의 운동을 해 나가면서 러시아 경찰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3]

다른 여성운동가들과의 갈등

1908년 부르주아 여성 지식인들과 일부 귀족 여성들이 여성대회를 열어 '러시아 여성당'을 창당하려 하자 콜론타이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무산시켰다. 콜론타이는 남성들의 편견 못지않게 진정한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행위는 바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똑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요구하는 것과 상위 계층과 고위직을 요구하는 것 따위의 '위선적인 주장'은 여권 신장과 여성들의 권익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은 오직 그들의 부르주아 남편이나 형제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고, 단지 고위 직에 여성의 자리만 늘려주기를 원하였다며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보다 못한 남성들을 다시 짓밟고 착취하려는 것이 본질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 운동가와 여성 귀족들을 향해 '노동하는 여성들이 살면서 날마다 마주치는 기아와 자녀들의 질병 문제, 위생 문제 등은 외면한다'며, '부르주아 여성들이 공동체의 복지보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범주에 드는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며 비판하였다.

콜론타이는 상류사회 여성들의 일반적인 취미인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임금노동을 통한 자본주의의 착취 때문에 생겨난 고통과 가난과 궁핍의 바다를 티스푼으로 비우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그자들이다.

그는 동료 남성 공산주의자, 남성 노동운동가들에게도 분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부르주아 여성들과도 싸웠다. 그는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만이 진정한 여성 해방을 이룰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모든 것은 빵 한 조각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혁명으로 여성 노동자 계층, 빈민 여성 계층의 경제적 독립을 얻어내지 않고는 여성해방을 이룩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여성노동자에게 평등권은 오직 (남성노동자와) 불평등을 똑같이 나누는 것일 뿐이다. 상층계급 여성이 일단 정치권력에 접근하면, 이 ‘여성 권리’의 옹호자들은 자기계급 특권의 열광적 옹호자가 된다. 어린 자매들을 무권리 상태에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면서 말이다.

망명 생활

반전 평화 운동과 망명

1910년 무렵

그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운동, 반전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콜론타이는 핀란드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콜론타이는 핀란드 독립을 적극 주장하다 반국가 사범의 죄명으로 수배, 독일로 망명하였다. 이후 6년간 독일과 스웨덴 등에서 체류하며 칼럼과 기고를 하였고, 러시아의 여성운동가들을 후원, 독려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콜론타이는 반전운동을 지지하였고, 좌파 국제주의자들에게 국경을 초월하여 단결하고 뭉칠 것을 호소하였다.

망명 생활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각국의 국제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국가주의자로 돌아서는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레닌은 신념을 지켰다. 그는 레닌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모두가 국수적 애국주의자가 되어가는 마당에 레닌은 혼자 반전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4] 콜론타이는 레닌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고 그와 함께 행동하고자 하였다.[4]

또한 독일스웨덴 등에서 출판, 강연활동을 계속 하는 한편 러시아 제국의 억압에 대항하다가 넘어온 핀란드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꾸준히 교류하였다. 또한 그의 명성을 듣고 방문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명사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만난 지식인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있었다.


사상

날개달린 에로스

알렉산드라는 부르주아적 연애 도덕과 프롤레타리아적 연애 도덕을 구분하며 날개달린 에로스라는 개념을 주창한다.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에서 알렉산드라는 에로스적인 동지애를 통해서 성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소유'하는 관계가 아닌 평등한 동지애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일부일처제야말로 남성 중심 성 관념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부르주아적 도덕 안에서 불평등한 성적 관계를 기초로 이뤄지는 조건을 거래하는 결혼, 성매매 등을 '날개없는 에로스'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동지애적 사랑을 '날개달린 에로스'로 분류하였다. 콜론타이의 날개달린 에로스 개념은 배타적인 일부일처제를 배격하고 동지애 속에서 자유롭고 우연한 성적 결합이 가능하리라는 폴리아모리적 주장으로 나아간다.

알렉산드라는 그러한 날개달린 에로스는 육아의 완전한 사회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여성이 불평등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데에 많은 경우 육아와 재생산 노동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육아를 사회가 책임지게 되면 여성의 종속이 끊길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일반이 공동체로서 '내 아이'가 아닌 '우리의 아이'를 육아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알렉산드라는 당대의 관념에서는 무척 급진적으로 여성이 '순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함께 여성의 성적 욕망과 자유로운 성애의 해방을 요구하였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당대 콜론타이의 급진적 사고는 소문건 『혼인관계 영역의 공산주의 도덕에 관한 테제』속 "성욕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는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콜론타이의 급진적 주장은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물 한 잔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되고 비판당한다.

여성의 해방과 경제적 자립

알렉산드라는 여성해방의 조건으로 경제적 자립을 주장하였다.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결혼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억압적 상황에서 여성들이 떨쳐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가족이 ‘보호’하는 소유물이 아닌,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소비에트 구성원으로서 여성이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강력해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과 동등한 책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노동권 보장안을 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러시아 여성 노동자·농민대회'에서 알렉산드라는 여성이 경제력을 갖추고 가정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남성에게 기댈 필요도, 남성들에게 예속될 필요도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마음을 여십시오. 가정은 여성을 종속시킬 뿐 아니라 비생산화함으로써 집단의 발전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노동자 국가는 남성과 여성, 두 평등한 노동자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국가는 여성에게 일자리를 주고 아이를 돌볼 것입니다. 유치원과 탁아소에서 집단 활동은 아이들로 하여금 ‘내 것’ ‘네 것’보다 ‘모두의 것’을 깨쳐 사유재산 관념을 갖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콜론타이가 주장했던 ‘자립적인 여성’은 종국에는 전통적인 결혼에서 자유로운 여성상이었다. 남성의 부속물이나, 가정의 부속물이 아닌 소비에트 사회 노동력의 일부이자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민으로 취급되기 위해서는 일부일처제 결혼 관계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알렉산드라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근대적 관념이 여성 일반이 남성 일반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사회적 토대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남성의) 외도 및 실연이 경제적인 손실과 연결되기 때문에 더 큰 절망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콜론타이에게 있어 질투는 동지애에 기반해서 극복해야 할 부르주아적 정서였다.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

알렉산드라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에도 비판적이었다.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해 '위선적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공동체의 복지보다 일부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노동하는 여성들은 날마다 기아의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으며, 그 문제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남성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 콜론타이의 주장이었다.

그는 여성운동이 계급투쟁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운동보다는 노동 운동에 함께 참여하여 이를 함께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참다운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은 조건에서 노동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남성의 부속물, 노예로 전락할 것이라고 봤다.

『여성 문제의 사회적 기초』(1908)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쓰여졌다.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이 종속된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뒺비어야 하고, 부르주아 여성운동가들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운동에 뛰어들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부르주아 여성들이 노동계급 남성을 짓밟는 데에 가책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노동계급 남성들에 대한 연대를 표하기도 한다.

꾸준하게 주장해 온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은 부르주아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부르주아 여성운동이 주장하는 '부르주아적 도덕'은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균등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은 '남성의 성욕 충족, 아이의 재생산, 가사 노동'이라는 삼중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저작

정치서

  •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09)
  • 『사회와 모성』(1913)
  •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
  • 『공산주의와 가족』(1920)
  • 『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27)
  • 『경제진화에 있어서의 노동』(1928)

소설

  • 『붉은 사랑』(1925)
  • 『삼대의 사랑』(1925)
  • 『위대한 사랑』(1927)
  • 『자매들』(1927)

논문

  •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에 대해서』

출처

  1. 1.0 1.1 1.2 1.3 한국서양사학회 (2003).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58쪽. 
  2. 2.0 2.1 2.2 2.3 김정미 (2011). 아름다운사람들. 105쪽.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3. 3.0 3.1 3.2 3.3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6페이지
  4. 4.0 4.1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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