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근 편집: 2021년 10월 10일 (일) 15:53
나노데스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0월 10일 (일) 15:53 판
일본의 위치
국기

일본아시아 극동에 위치한 섬나라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1.2배이며 인구는 약 1억 3천만명이다. 일본어를 사용한다. 크게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 4개의 섬으로 구성된다. 공식 국명은 일본국이다.

정치

체제

일본은 왕이 있지만(천황) 왕은 정치적으로 권한이 없고, 정치적인 실권은 내각총리대신(총리)에게 있다. 총리는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국회의원 중에서 선출되는데, 보통 제1정당의 당수가 선출된다. 물론 예외는 존재하는데 1993년의 비자민비공산 연립내각 등의 사례가 존재한다.

천황

천황(덴노)는 일본의 군주이다. 그러나 평화헌법에서는 국가원수가 아닌 "국가의 상징"이라는 애매한 서술로 남아있기에 국가원수로 대우해야 하는지는 일본 법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천황'이 아닌 '일왕'으로 불러야 한다는 여론도 많지만 '천황'은 '샤한샤'나 '차르', '카이저'같이 왕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므로 '천황' 내지는 '덴노'라고 호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 의미로 이낙연 전 총리 역시 나루히토 "천황"이라고 칭했던 바가 있다.

역사적으로 실권이 없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현인신이자 국가의 주인으로 대우받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적인 것이였다. 물론 총리 임명권이나 각종 고위직 임명권, 그리고 군통수권을 쥐고 있었고 국가신토의 주인으로 여겨졌기에 명백히 당시에는 일본의 국가원수로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히로히토 천황에 대해 실권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극우들이 쉴드를 치고는 있지만, 엄연히 전쟁을 승인하였던 군통수권자였으므로 전쟁 책임이 명백히 있다. 다만 대조적으로 현재 천황인 나루히토와 상황인 아키히토는 평화헌법을 존중하고 과거사를 반성, 기억해야 한다는 개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어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내각총리대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 정부 및 내각의 수반이자 책임자이다. 현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은 100대 총리인 자유민주당 소속 기시다 후미오이며, 2021년 10월 4일 취임하였다.

일본의 정치적 실권은 내각총리대신에게 있다.

일본 국민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

일본 정치에 대한 대표적인 고정 관념 중 하나로 "일본 국민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가 있다. 물론 이 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이후인 2014년 중의원 선거 이후 한정으로 투표율에 한정해서 본다면 이는 성립할 수도 있지만[주 1], 2009년 일본 중의원 선거만 해도 69.4%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실제로 일본 중의원 선거의 투표율은 경제 고도 성장기(1960년대)에는 70%까지 웃돌았으며 버블 경제 시기(1980년대)에도 60% 후반~70% 초반의 고투표율을 기록하였다. 2000년대에 치뤄진 2000년,2003년,2005년 선거도 각각 64.4%,59.8%, 67.4%라는 비교적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정권 교체를 이뤄낸 2009년 중원 선거도 69%의 매우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렇게 볼 수 있듯이,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게 된 것은 2012년 중의원 선거 이후의 일로 비교적 최근이다. 따라서 일본 국민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2012년 이후라면 맞는 말이지만, 전체적으로 포괄하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도와 비슷하면 비슷했지[주 2],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일본 국민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면 1993년 자민당 과반 붕괴로부터 시작된 10년동안의 개혁 진영의 선전(1996~2005)과 2009년의 정권 교체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두 차례의 정권 교체 이전 선거 흐름을 보면 1980년대는 사회당이 도이 다카코 총재를 중심으로 선전하던 때였으며 2000년대 역시 민주당이 공약 중심 정권교체 호소로 지지를 모으던 시기였다. 이렇듯이 일본 국민들도 자민당에만 순응하는 정치무관심자들이 아니라 투표에 꼬박꼬박 참여하며 야당에 힘을 실어 줄 때도 많았고 정권교체까지 이뤄냈던 사람들이다.

유난히 많은 세습 비율

대한민국은 세습으로 간 경우는 정대철-정호준 혹은 김진재-김세연 등 몇몇만 있으며, 나머지는 자신의 능력으로 정치 권력을 얻었다. 물론 친일반민족행위로 얻은 재산을 기반으로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면 비판을 받아야 될 상황이지만, 그래도 대체로 대한민국 정치권은 어느정도 자신의 노력과 뛰어난 지역구 관리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은 세습 비율이 자민당-국민당-입민당 상관없이 높으며,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무려 30% 정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실제로 아베 신조,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우리가 알만한 총리들의 대다수가 바로 세습 지역구 의원, 그래서 일본 정치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많이 만들고 있다.

일본은 기명식 투표다.

대한민국은 무기명 투표에 최근엔 전자개표기도 쓰는 반면, 일본은 자신이 직접 후보자의 이름을 써야 한다. 참고로 이 기명식 투표의 매우 큰 단점이 소수 정당이나 신인에게 매우 큰 장벽이 생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일본의 뒤쳐진 여성 인권과 위의 세습 문제와 맞물려 여성 정치인의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저조한 여성 정치 참여와 여성 정치의 현황

일본은 여성의 정치 대표성이 낮은 국가다. 더욱이 일본의 경제 수준이나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국가 위상에 비추어 보면 정치 분야에서 여성의 과소 대표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세계의원연맹(IPU)의 여성 의원 비율 순위에 따르면 일본은 189개국 중 132위(!)로 선진국 치고는 매우 낮다.

마돈나(도이) 선풍, 여성 자객, 오자와 걸즈 등 여성 정치가 일본 정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도이 다카코를 중심으로 한 마돈나 선풍과 여성 정치인 발굴(자세한 것은 도이 다카코 항목 참조)이 1980년대 후반 있었다.

도이 붐에 이어 여성 정치인이 화제가 된 선거는 우정 민영화를 둘러싸고 전개된 2005년의 제44회 중의원 선거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우정 민영화 법안을 본회의에서 성립시킬 것을 공언하면서 법안이 성립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공언했다. 우정 민영화 법안은 중의원을 통과하기는 했으나, 자민당 의원 중 37명이 반대하고 14명이 기권하는 등 자민당 내의 반발이 많아 본회의에서의 법안 성립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정 민영화 법안은 참의원 본회의 표결에서도 자민당 의원 중 반대 22명, 기권 8명이 나와 부결되었다. 이에 고이즈미는 우정 민영화를 반대하며 사표를 제출한 시마무라 농수산대신을 파면하면서까지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단행했다. 고이즈미는 우정 민영화에 대한 의지를 보이며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면 퇴진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국회 표결에서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자민당 의원들을 공천하지 않고, 대신 이들 선거구에 우정 민영화 찬성파 후보를 내세웠다. 이렇게해서 우정 반대파의 선거구에 공인받은 우정 찬성파 후보들은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불렸다. 고이즈미에 의해 '자객' 으로 뽑힌 후보자는 모두 35명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여성 자객'으로 불린 여성 후보자들은 선거 기간 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성 후보들은 주로 중진의 거물급 남성 정치인의 선거구에 공천을 받았는데 '미녀 자객단', '미녀 돌격대'로 표현되면서 그녀들이 갖고 있는 능력보다는 외모와 스펙으로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자객'은 거의 대부분 당선되었고, 특히 화제를 모았던 '여성 자객'은 전원 당선되었다. 한편 이 선거에서 당선된 자민당 신진의원들은 모두 83명으로 '고이즈미 칠드런'이라고 불린다. 이들 83명의 '고이즈미 칠드런'은 당선 후 '83회'이라는 의원 모임을 만들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칠드런'의 시대가 가고 '오자와 칠드런'이 주목을 받았다. '오자와 칠드런'은 오자와 이치로가 선거지도나 정치교육을 시켜 선거에 당선시킨 의원을 지칭하는 용어로 1990년 제39회 중의원 선거 무렵 '도이 칠드런'과 더불어 사용되기 시작하여 2009년 제45회 중의원 선거에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오자와가 자민당의 선거전을 지휘하면서, 이때 처음으로 당선된 오자와를 추종하는 소장 의원들을 '오자와 칠드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후 오자와가 자민당에서 탈당하여 신진당→자유당→민주당으로 정당을 옮길 때마다 '오자와 칠드런'이 생겨났다. 특히 2003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탄생한 민주당에서 오자와는 선거 때마다 신인 후보를 발굴하여 당선시키면서 많은 새로운 '칠드런'을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과를 올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이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2009년 제45회 중의원 선거다. 당시 민주당 간사장으로서 선거를 총지휘한 오자와는 143명의 신인 의원을 탄생시켰고, 이에 매스컴 은 '오자와 칠드런'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오자와 칠드런' 외에도 오자와에게 발탁된 여성 정치인만을 지칭하는 '오자와 걸즈' 혹은 '오자와 레이디'라는 표현도 사용되고 있다. 오자와는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여성 자객'이 '흥행'에 성공하자, 2009년 제45회 중의원 선거에서 연립여당인 자민당,공명당의 거물급 남성 정치인의 선거구에 여성 후보를 공천하는 고이즈미의 선거 전략을 모방했다. 이들 여성 후보자들에 대해 언론에서는 종래의 '여성 자객'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주로 '오자와 걸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오자와 걸즈'는 2009년 유행어 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오자와 걸즈'로 불린 여성 당선자는 초선 8명을 포함해 약 10여명에 이르는데, 그중에서도 주목을 받은 대표적인 '오자와 걸즈'는 공명당 대표 오타 아키히로의 선거구(도쿄 12구)에 출마 한 전 참의원의원 아오키 아이, 전 방위대신 규마 히사오의 선거구(나가사키 2구)에 출마한 20대 시민운동가 후쿠다 에리코, 전 총리 모리 요시로가 연속 14회 당선하여 '모리 왕국'이라고까지 불리는 이시카와 2구에 출마한 국회의원 비서 출신의 다나카 미에코 등이다. 오자와는 여성 후보의 선거구에 사설비서를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지원하였고, 이들 선거구는 선거 공시 전부터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결과, 대부분이 당선되었고 지역구에서 낙선했어도 석패율제로 부 당선한 후보자도 많았다. 오타 공명당 대표가 아오키 아이에게 패배해 낙선했고, 모리 전 총리는 근소한 차이로 겨우 이겨 낙선은 면했으나 다나카 미에코가 석패율로 당선됨으로써 체면을 구겼다.

이렇듯 일본의 여성 정치 참여에 대해 살펴보면 주지의 사실인 여성 과소대표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 정치인의 충원 과정에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 정계에 입문하는 정치인들이 거물급 정치인의 아이들로 불리고 인식되는것, 그리고 그에 따라 정치 활동에도 제약을 받을수밖에 없는 일본적 정치문화 즉 철저한 파벌주의와 가부장적 정치문화에 기인하고 있다. 물론 사회당의 '도이 칠드런'을 '고이즈미 칠드런'이나 '오자와 칠드런'과 같이 엮어서 파벌주의와 가부장주의로 비판하는데 대해 이견이 있을수 있다. '칠드런'의 성격에 대해서도 도이 다카코는 '여성 자객'과 '마돈나'는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도이는 "당시의 마돈나는 남성 중심의 낡은 국회 체질을 바꾸어 정치 속에 '생활'이 살아있는 상황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떨쳐 일어선 여성들이지만, (여성 자객들은) 고분고분하게 고이즈미씨를 따르는 예스 우먼들 로 고이즈미를 위한 역할을 할 뿐"이라고 평가하고, 여성 자객들이 "국정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사실 역설적이게도 이상과 같은 문제점 속에서 희망도 있다. 그것은 세 그룹의 여성 정치인들이 당해 선거에서 '개혁'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도이, 고이즈미, 오자와와 같은 일본 정치사의 거물 정치인들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전면에 내세운 건 바로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는 것이다. 도이와 달리 고이즈미나 오자와가 여성 후보자를 전면에 내세운 목적은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거의 흥행을 위해서였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정치개혁의 아이콘으로 여성 후보를 앞세운 선거는 유권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흥행에 성공했고 여성 후보들은 당선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예외적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본 정치계와 국민은 앞으로는 여성의 당선이 더이상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여성 정치인이 아 니라 여성 정치세력이 될 때 비로소 특정 정치인의 칠드런에서 벗어나 자객으로 활용되지 않고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사회에서 여성의 정치 과소대표성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제는 성공한 여성 정치인에 맞추었던 관심의 초점을 균형적인 정치인 비율을 위한 적극적 우대 조치(ex:여성할당제 등)의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위에 있는 기명식 투표의 단점인 신인 정치인에 대한 높은 장벽도 물론 해소해야 될 과제이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당, 사회당 계열의 여성정치인뿐만 아니라 혁명조직인 중핵파 소속의 여성정치인인 호라구치 토모코(洞口 朋子)도 있다. 호라구치 토모코는 2003년 중학생 때부터 이라크전 반대 시위를 했으며 이후 정치활동으로 유명한 호세대학에 진학해 전학련 활동을 한 후 중의원 선거에 지속적으로 출마, 현재는 스기나미 구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중이다.[1]

일본의 여성

일본의 가족상과 여성

메이지시기로 들어오면서 일본에는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가 확산되었다.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는 자유연애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성•생식・사랑은 가족의 영역에 속해야한다는 억압의 기제로도 작용을 하게 되었다.

결혼

일본의 결혼은 1898년 민법에서 현재 민법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①「가문의 문제」로서의 결혼에서 「당사자 개인의 합의」에 의한 결혼으로의 변화.

②「불평등」한 부부관계에서 형식적「평등」한 부부관계로의 변화

③「부계 직계가족」에서 「성별분업형 핵가족」으로의 변화

형식상 평등한 부부관계로 변화하였지만 비가시화 된 차별의 문제. 현재 일본의 결혼 문제점은 이하와 같다

강제적부부동성제(強制的夫婦同姓制): 아내 혹은 남편의 성을 고를 수 있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평등하나 대부분 남편의 성을 선택하며, 부부의 불평등 혹은 성별분업을 정당화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

부부 재산 별산제(夫婦財産の別産制): 아내와 남편의 재산을 각각의 소유로 하는 것, 이 또한 형식적으로는 평등하나 현실 상 아내는 경력 단절로 인하여 경제력이 남편과 차이가 난다. 이에 따라 아내는 남편의 재산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으며 이혼 이후 아내는 빈곤의 문제로 이어진다. 따라서 부부재산별산제는 부부의 경제적불평등을 시정하기 보다는 정당화하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이혼제도

일본의 주된 이혼제도는 이하와 같다.

  1. 협의이혼
  2. 조정이혼
  3. 심판이혼
  4. 화해이혼
  5. 인낙이혼
  6. 판결이혼

취업과 여성

여성의 취업과 연관된 사회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의 실현과 연관이 있다. 일본의 후생노동청(厚生労働省)의 2012년의 "남(녀) 취업률의 국제비교" 통계에 의하면 남성의 취업율은 약 88.5%, 여성의 취업율은 약 66.4%이다. 또한, 여성에게는 특징적으로 M자형취업곡선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한국에도 공통된 현상이다.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정식명칭: 고용의 분야에서의 남녀 균등한 기회 및 대우의 확보 등 여자노동자의 복지의 증진에 관한 법률)

1985년 성립, 1986년 시행인 남녀고용기회균등법으로 인하여 여성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할 기회가 넓어졌다. 그러나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종합직」, 그 외의 잡무를 담당하는 「일반직」으로 나뉘어져 여성간의 격차가 생겨나게 된다.

임금격차

2014년 내각부의 「남녀간 소정내 급여격차의 추이」에 따르면 남성의 일반노동자(상용노동자 중 단시간노동자 제외)를 100으로 하였을 때 여성의 급여 수준은 71.3이다. 여성 정사원으로 산정하여도 74로 남녀격차가 크다.

참고로 OECD 기준으론 2등이다. 참고로 1등은...

일본의 여성 인권

일본의 성범죄 발생률은 표면적으로는 낮지만, 이는 신고율은 매우 낮기 때문이며 이는 전근대적인 일본의 성범죄 수사 방식에서 기인된다. 출처 영상.

참고로 성폭력 친고죄 폐지 시기가 2016년(1996년,2006년이 아니다!)로 대한민국보다도 늦었다.

AKB48 문서에서도 보듯이 미디어와 매체, 각종 문화적 산물들이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타자화가 노골적이며,심지어 실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거 같은 연예계에서도 외모와 몸매를 부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주 3][주 4]

또한 일본에는 AV(adult Video)라는 산업이 있는데, 문제는 이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타의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AV 산업의 강제 촬영 문제는 널리 알려져 있는 폭력적 관행으로, 매년 이런 관행에 희생당하는 피해자는 수천에 이른다. 심지어 미성년자도 있다. 그런데 이런 피해자들은 일본 특유의 메이와쿠(迷惑) 문화 때문에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력(女子力)이라는 여성혐오 단어가 유행어로 사용되고 있다. 요리를 잘하거나 진하지 않은 청순한 메이크업을 하고 다니면 여자력이 높다고 얘기한다. 여자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 방법이 일본 여성 잡지에 실리고, 여자력 빙고까지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고,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 수입되는 등의 일부 성과는 있지만[주 5]일본회의[주 6]라는 정치-사회계의 우익이 너무 강해서 진전 속도가 더디다.

일본의 페미니즘과 여성 해방 운동

일본의 여성 해방 운동은 리브운동과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로 그 시기를 나눌 수 있다. 리브운동은 70년에 개최된 제1회우먼리브대회(第一回ウーマンリブ大会)에서 1975년까지를 칭하며,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법이 이용된 것은 1975년으로 지정된 국제여성의 해(매년 3월 8일)를 기점으로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전쟁 전의 『세이토우(青鞜)』에서 이용된 바가 있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국제적으로 사용되었던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일본에도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일본에도 페미니즘이 들어왔다. 하지만 90년대의 후반의 불황기(잃어버린 10년)으로 인하여 젊은 남성들의 박탈감이 늘어났고, 여기에 새역모, 산케이 신문등 우익 언론과 우익 단체들이 이들의 여론을 잘 캐치해 페미니즘을 공산주의 사상[주 7]으로 매도하였다. 즉 백래시가 일어난 것이다.,그리고 이것을 자민당이 여론으로 생각해서 성평등과 관련된 법에 제동을 걸었고, 결과적으로 여성인권은 자꾸 후퇴해서 일본은 위에 나온 동아시아에서 여성인권을 제일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20년 전인 1990년대 중반 전후 성평등에 대한 국제 기준의 확립에 힘입어 제도적 차원과 사람들의 의식 차원 양쪽에서 일본 사회의 젠더 평등을 제고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95년 세계여성회의 이후 총리부는 ‘남녀공동참획(参画)2000플랜’을 책정했고 교육계는 ‘젠더프리’라는 용어를 도입해 성별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성을 포괄하는 교육을 논의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9년 제정된 ‘남녀공동참획기본법’은 기존의 그동안 사회 제도가 성별 분업과 성역할의 고정화에 의해 불공정하게 유지되어 왔음을 인식하고 “특정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라 온갖 개인의 생활과 다양한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 시스템의 구축”을 제도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에 부딪치게 된다. ‘산케이신문’ 등의 보수 논단 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역사 교과서 문제로 잘 알려진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우익 단체들의 네트워크는 “젠더프리가 과도한 성교육을 제공해 성교를 장려한다.[주 8] “전업주부를 부정하는 등 타인의 생활 방식에 개입한다.” “’결과의 평등’의 주장은 공산주의 사상이다.”[주 9] 등의 기가 막힌 비판을 쏟아냈다. 조직적인 선동은 인터넷 상에서 젊은 남성들을 빨아들였고 이들은 페미니스트를 ‘페미나치’라 부르며 공격했다. 이를 ‘여론’으로 포획한 자민당은 2005년 ‘과도한 성교육과 젠더프리 교육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 팀’을 구상해 아베 신조에게 수장을 맡긴다. 애초엔 그 주장의 우스꽝스러움 때문에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백래시 파가 지자체부터 중앙 정치권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영향을 미쳤고 일본의 젠더 평등 정책과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을 주춤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패망 이후 군국주의의 부활을 기다리던 극우 보수 세력들이, 80년대 버블경제 이후 급격히 몰락해서 생긴 잃어버린 10년 이후 생긴 2030대 남성들을 선동해 백래시를 만든 것이다.

지금, 일본 여성의 삶 (아이즈)

그래도 이후 페미니스트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다시 페미니즘 운동이 활성화 되가고 있다.

백래시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일어날 가능성

극우 보수 세력의 SNS 침투와 초유의 경제위기 이후 2030대 남성 내부의 안티페미니즘 성장을 단순히 찌질한 것,억울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이유이자 진보 개혁 정당이 현실에 안주하면서 "우리들이 이끌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면 안되는 이유다. 일본의 백래시도 진보 개혁 정당이 보수 정당과 동등하게 싸웠던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에 군국주의 부활을 바라는 우익 네트워크이 20대 남성을 선동해서 페미나치 프레임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양당이 확실한 콘크리트를 가지고 있고, 2030대 여성들이 중도~중도진보층에 몰려있고 투표율이 남성보다 높은 특성상 주류 정치에 적용될 가능성은 지금 상황에선 낮긴 하지만[주 10] 약 5~10년 후, 기독교 우파 세력,친박 세력이 일소 안되고, 2030대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계속 있는 이상, 여전히 극우 세력을 콘크리트로 가지고 있는 보수 정당이 안 받아들일 거란 보장이 없다.

추가로 마중물샘 사건,은하선 하차 사건등에서 안티페미니즘 성향인 대안 우파와 기독교 우파,친박 세력의 연대가 확인되었고[주 11],여기에서 보듯이 10대 남성의 높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반동성애까지 조장하는 것도 포착될 만큼, 여기에 대해서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그나마 기독교 세력의 비율이 매우 적어서 퀴어 인권이라도 진전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보다도 더욱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알겠지만 제일 무서운 건 자신을 마이너리티라 생각하는 집단의 박탈감을 공략하는 집단들이다. 나치 세력도 이와 비슷한 계기로 생겼다는 걸 생각하면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페미니스트

여성 차별과 관련된 주요 사건

행정구역

일본국의 행정구역
홋카이도 홋카이도
도호쿠 아오모리, 아키타, 후쿠시마, 이와테, 미야기, 야마가타
간토 도쿄, 이바라키, 도치기, 군마,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주부 후쿠이, 이시카와, 나가노, 니가타, 도야마, 야마나시, 아이치, 기후, 시즈오카
간사이 교토, 오사카, 미에, 시가, 효고, 나라, 와카야마
주고쿠 히로시마, 오카야마, 시마네, 돗토리, 야마구치
시코쿠 에히메, 가가와, 고치, 도쿠시마
규슈 후쿠오카, 나가사키, 사가, 구마모토, 오이타, 미야자키, 가고시마
오키나와 오키나와

1도(都) 1도(道) 2부(府) 43현(県)이다. 1도(都)는 도쿄, 1도(道)는 홋카이도, 2부는 교토오사카이다.

경제

2차, 3차 산업 위주이며 고부가가치산업이 발전하였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매우 발달해있으며 그 중 예시가 로봇 산업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으며 아베노믹스로 타개하려 시도하나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본은 카드기가 잘 보급되어있지 않아 대부분의 상점에서 카드 결제가 불가능하다. 2017년에 맥도날드에 카드기가 도입된 것이 뉴스 기사로 뜰 정도였다. 이렇게 현금 위주로 돌아가는 일본이기에, 야쿠자 등이 어둠의 경로로 경제를 주무르기에 용이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사회

현재 일본은 수도권으로 정치와 금융, 문화와 인구, 자본, 자원과 산업 등이 밀집된 도쿄일극집중 현상이 심하다.

역사

전쟁 범죄

일부 세력은 일본 제국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난징 대학살, 식민지 주민 학살 및 탄압, 민간인 학살, 731 부대 마루타 실험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기후

남북으로 2,000km이 넘게 뻗어있는 호상열도인 일본은 최북단인 홋카이도는 냉대 기후, 혼슈는 계절풍이 부는 온대 기후, 시코쿠와 규슈는 아열대 기후, 오키나와와 최남단인 오사가와라는 열대 기후를 띈다. 이러한 기후를 바탕으로 '사계절이 있는 나라'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이 이를 가져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로 사용중이다

같이 보기

문서

부연 설명

  1. 2012년은 59.6%로 2003년과 비슷했다. 단 2003년과 마찬가지로 자민당의 지역구 득표율은 43%였지만, 민주당의 지역구 득표율은 36%에서 22%로 무려 14% 정도 급락했기에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100석 이상이라도 차지했던 2003년과 달리,단 57석정도만 얻었다.
  2. 실제로 대한민국도 총선 투표율은 50% 후반~60% 초반으로 1990년대 후반~2000대 중반의 일본 중의원 선거의 투표율과 비슷했다.
  3. 참고로 이걸 대한민국에 무작정 우겨넣었다가 아이돌학교라는 참사를 만들었다.
  4. 추가로 아이즈원의 일본 팬덤 비율이 굉장히 여초인데, 이것도 AKB48과 관련이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5. 실제로 일본은 후술하다시피 페미니즘 도입 초기에 극우 보수 세력에게 막힌 적 있었기에, 선진국 치고는 여성인권이 매우 뒤쳐진 상태다. 즉 일본 여성들에게는 82년생 김지영에 나오는 일들이 00년대, 아니 2010년대에 노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그래서 대한민국보다 더욱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6. 안티페미니즘 + 호모포비아 + 제노포비아 + 재일 한국인 혐오 + 극우 성향인 우익 정치 네트워크이다.
  7. 알겠지만,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에서 파생한 사상이다. 실제로 초기의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기회,교육을 받자는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8. 실제로 링크에서 반대세력이 주장한 것이다!
  9. 어디서 본 익숙한 발언이 아닌가, 실제로 남초 사이트 중 상대적으로 극우~우익 성향에서 많이 관측되는 발언이다. 심지어 오늘의 유머에서도 종종 나오는 발언이다.
  10. 주류 정치에만 적용은 안되었지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우리공화당 내부에 안티페미니즘 세력은 상당수 있다.
  11. 심지어 자유의새벽당이라는 대안 우파 정당도 탄생했고, 여기엔 친박 세력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분류

  1. 洞口 朋子 (2020년 11월 3일). “호라구치 토모코 의원 홈페이지”. 2020년 11월 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