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학교 소식지

최근 편집: 2019년 6월 8일 (토) 18:35
Yonghokim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8일 (토) 18:35 판 (초기 내용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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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는 정기적으로 소식지를 발행해 지지자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 1993-11 더불어 사는 뿌리 창간호
  • ?? 더불어 사는 뿌리 제2호 (종이 버전 없음)
  • 1996-06 더불어 사는 뿌리 제3호
  • ?? 이후 더불어 사는 뿌리? (종이 버전 없음)
  • 1998-10
  • 1998
  • 1998
  • 1999-01
  • 1999-03 (Available)
  • 1999-05 (Available)
  • 1999-09 (Available)
  • 2000-04 (Available)
  • 2000-07 (Available)
  • 2001-02 (Available)
  • 2002
  • 2002-06
  • 2002-11 (Available)
  • 2003-04
  • 2004-06 (Available)
  • 2004-11 (Available)

1993년

11월

더불어 사는 뿌리 창간호
38장
한글
  • 축시: 마당 - 이세방
  • 창간사: 소식지를 펴내며 - 이길주
  • 특별기회: 자기문화와 더불어 사는 삶 - 은호기
  • 특별기획: 미주한인동포사회와 우리의 과제 - 장태한
  • 특별기획: 우리문화를 만들자 - 김갑송
  • 내가 본 민족학교: 민족학교, 어느 뜨겁던 여름의 추억 - 조병옥
  • 대담: 민족학교 10년을 되돌아 본다 - 편집부
  • 이런 삶: 깡통줍는 할머니, 이주영 할머니 - 서재희
  • 추모의 글: 싸울것과 지킬것 - 이은실
  • 생활속의 글: 어느 택시기사의 하루 - 유선모
  • 단체탐방: 나성한인문화패 "한누리" - 이순옥
  • 이민생활정보: 소액청구소송 - 편집부
  • 이민생활정보: 우리말 열고개 - 편집부
  • 좋은 책, 좋은 영화 - 한누리
  • 후원자 현황
  • 민족학교 소개

민화의 소채로 많은 사랑올 받고있는 ‘까치와 호랑이’는 나쁜 일올 물리치고 기쁜 일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그린이는 천통민화률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형상화하여 민화속에 숨어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고 우리 민족의 자연관과 미관을 친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린이... 남궁산.

1961년 태어나 인천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함. 여러 기획전에 참여했으며 91년 서울, 전주, 태백, 대구에서 개인전을 카진 바 있음. 현재 본국의 민족미술협의획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 민족학교 영어이름은 Korean Resource Center (머리글자 KRC) 입니다 • 민족학교는 미연방정부와 캘리포니아주정부 로부터 세금감면혜택허가를 받은 비영리 사회단체 입니다 . • 민족학교는 1983년부터 교육, 문화, 사회봉사 분야에서 나성동포사회를 위해 꾸준히 일해오고 있습니다 . • 민족학교는 동포여러분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운영해나가고 있습니다


마당

이세방

1
마당,
마당이 일어선다.
먼 동이 트는 새벽,
네 귀퉁이에 지신을 세우고
마당,
마당이 일어선다 보아라
마당 한가운데를
마당 깊은 속을,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머리칼과 뼈다귀와 엉겨붙은 땀과 피가
살아서 꿈틀거린다.

2
마당,
마당이 일어선다.
보아라
마당에는 멍석도 있고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 깊은 그 속에는
작은 섬이 큰 산이 되는 비결이 있고
타향이 고향이 될 수 있는 평화가 있다.
보아라
마당 한가운데를 무너뜨릴 수 없는 그 힘,
우리들의 마당이 일어선다.
 
마당,
축운 자와 산 자의 중간에서
네 귀퉁이에 횃불을 켜고
마당이 일어선다
보아라
흩어진 우리들을 결집 시키는
마당,
마당이 일어선다
미래를 향하여
민족이 하나 될 때까지
마당이 일어선다
마당이 일어선다.-

이세방: 시인r미추민족문화예술인협의효I, 쩨 2 대회장r민족학고」 창립이사. 1941년에 태어나 1967년때 미국으로 옴. 시집 f조국의 달」.r서을 1992년 겨을」등을 펴냄.


동포사회의 미래와 우리가 할 일

4•29 L.A.사태를 겪은 오늘, 동포사회에는 우리의 나아갈 길을 올바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러나 어떻게 나아가는 길이 올바른가에 대한 뚜렷 한 인식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r더불어 사는 뿌리」는 우리의 나아갈 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데 도움이 되고자 “동포사회의 미래와 우리의 할 일”이라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자 유기고가인 은호기님이 한인사회의 문제점과 소수민 족으로서의 한인의 과제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고, 가 주대학 리버사이드 (U.C. Riverside) 캠퍼스의 인종학 교수인 장태한님이 정치•사회적 측면으로, 워싱턴 디 씨 한겨레 주홍보원 연구원인 김갑송님이 사회 문 화적 측면으로 동포사회의 과제를 살펴 보았다

• 자기문화와 더불어 사는 삶 은호기 • 미주한인사회와 우리의 할일 장태한 l 우리문화를 만들자 김갑송

특별기획

자기문화와 더불어 사는 삶

은호기

도전 받는 한인사회

팽창일로만 걸어오던 우리 한인사회가 심각 한 시련을 겪고 있다.

동반구에 이민의 문이 열린 이래 한인사회는 근 한 세대에 걸쳐 줄기차게 양적으로 팽창하여 왔다 우선, 수적으로 어림잡아 일백만을 헤아리 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급격히 성장하여 곳 곳에 한인타운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소득수준이 어느 소수민족집단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어, 경 제적인 변에서 본다면 ‘모범’ 소수민족이라고도 할만하다. 이러한 성장은 높은 교육수준과 전투 적인 근면성에 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이 곧 질적 성장을 뜻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성싶다.

지난해의 로스앤젤레스 4.29 사태는 한인사회 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흑인사회의 사회•경제적 불만의 화살이 한인사회에로 돌려 진 것도 문제지만 사후 사태수습과정에서 나타난 정치력의 한계가 곧 한인사회의 질적 수준을 말하여준다 하겠다.

게다가 삼 년째 짓누르고 있는 경제불황은 양 적 성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한인사회를 구 조적으로 흔들어대고 있다 경제불황은 비단 한 인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제일 주 의로 살아온 우리 한인사회는 특히 충격이 큰 듯하며, 경제제일주의를 쫓기 위한 편법과 편의 주의가 드디어 삶을 옥죄고 있는 사례를 적지않 게 보아오고 있다.

범죄 또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범 죄는 우리와는 무관한, 미국의 병적 현상으로만 여겨 왔고, 따라서 우리 한인들은 미국범죄의 희생대상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인사회가 급속히 팽창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범죄 의 대상에서 범죄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특허 청소년들의 각종범죄는 범죄가 비단 타 인종집단 의 것만이 아님을 곧바로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 고 대학입시를 둘러싼 범죄, 즉 성적 변조나 대 리 시험 둥의 청소년 범죄가 한인사회의 그릇된 가치 관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는 한인사회의 질적 성장문제에 관심을 돌 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옮아온 한국병

지금 한국에선 개혁바람이 한창이다. ‘한국 병’을 고쳐서 ‘새로운 한국’올 만들겠다는 것이 다. 한마디로 새로운 사회가치체계를 정립한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제까지의 한국 사회 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체계가 잘못 되었다는 말 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가치체계는 돈으로 시 작 되어 돈으로 끝이 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 각,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 돈이 모든 가치규정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동 원 된 수단과 방법은 늘 정당화되어 왔다 이러한 가치체계가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판을 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더군다나 미국은 자 본 주의의 본고장일 뿔더러 아직은 편법과 편의주의가 발붙일 소지가 비교적 많아 한국의 그릇 된 가치체계가 쉽게 판 올 칠 수 있었고, 여기에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이 부당하게 작용, 부추겨 온 것 또한 부인키 어렵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와 같이 편법과 편 의주의 가 이곳 한인사회의 경제팽창에도 기여한 바가 없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삶의 질을 외면 한 무작정의 팽창주의가 경기침체라는 벽에 부딪히자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금방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경기만 회복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리라 보고 있다. 그럴까 설사 미국경기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이 전의 경제제일주의, 무작정의 팽창주의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 터이다. 이번의 시련을 계기로 우 리의 삶을 반성해 보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회복, 쉽지 않다.

어쨌든, 미국경제는 쉽게 풀리지 않을 전망이 다 천문학적으로 커가고 있는 재정적자 (미국정부 가 가장 큰 채무자이며, 납세자는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의 이자 갚기에도 바쁘다) , 악화되어가는 국제수지적자 둥 구조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는 미국경제여서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게 다가 국내의 모순을 감싸오던 해외 잉여가치 획 득마저 국제경쟁력의 약화로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어서 미국경제력의 한계를 실감케 한다 그간 경제의 숨통을 틔우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써왔던 전쟁이란 방법도, 걸프전쟁 에서 판 가름 났듯이 이제는 효용가치가 없게 되었다.

한편,지금은 산업구조의 개편기에 접어들고 있다.‘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바뀔때 산업구조가 새롭게 짜였듯이,지금의 후기산업 사회가 다른 단계의 산업사회로 바뀌어 감에 따 라 산업구조가 다시 짜여지고 있는 중이다. 즉,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는가 하면 기존의 왕성했던 산업이 사라지고, 산업의 내용과 질도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여러 가지 진통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구조 개편문제는 세계 적인 현상이어서 개편되는 산업구조에 따라 국 제관계도 변화를 가져오게 될 터이며, 이 개편과 정을 누가 주도하느냐의 싸움이 강대국 간에 운 연히 그러나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산업발전단계 변혁에 따른 구조개편 작업은 상 당한 시일이 걸릴 터이며, 세계경제가 안정을 되 찾게 된 후에는 삶의 내용과 질은 어차피 달라 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이러한 삶의 질과 더불어 우리는 정체성의 문제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은 건너온 그 순간부터 적어도 외모에 있어선 차이가 없으며, 당대 에 또는 한 세대가 지나면 미국사회의 주류에 서슴없이 끼게 된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온 우 리들은 떠나온 모국을 숙명적으로 둥에 업고 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국계’ 미국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빗대어 터하고 있는 한 국의 역사는 썩 자랑스럽지 못하다. 식민통치, 분단정치, 군사독재정치 속에서 역사는 갈갈이 찢기고 우리는 내 것에 대한 끝없는 부정과 환멸로 자신을 잃고 있다 이를테면, 이천 년 전의 예수는 마음속에 살아있어 가깝게 느끼고 있는 데도 채 일백 년도 지나지 않은 ‘이조’하면 아득 하고 고루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미국이나 일 본에 비하여 북한은 아득히 먼 곳, 저주의 땅으로 생각된다. 이 말은 우리의 역사가 종으로, 횡으로 찢기고 끊겼다는 말이다.

그러나 따져보자. 이 지구상에서 한 종족이 한 곳에서 국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 지탱하고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아세아와 유럽의 몇몇 나라를 빼고는 남 북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호주, 아프리카 할 것 없이 모두가 타민족에 의 한 타율의 역사이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를 찾아 야 한다. 그래야만 당당해질 수 있다 오천 년의 역사를 찾아 나서고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문 화를 보듬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삶

그렇다고 이곳에 한민족의 또 다른 나라를 세 우 자는 말은 아니다.

타종족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국가 의 자기변명이긴 하지만 미국은 다종족국가이다. 다양한 문화와 특이한 능력들이 조화를 이루 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뚜 렷한 내 것(문화)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 에는 짓밟히고 만다.

다종족국가의 부정적인 특정은 인종주의이다 인종주의는 개인의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다종 족국가에서는 늘 써온 지배수단 (이데올로기) 이 다. 중국이 오랫동안 한족 중심, 한족우월주의가 지배하였듯이 미국은 이른바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지배주의 가 사회 이 데올 로기로 쓰여져 왔다. 따라서 백인 이외의 종족은 백인사회를 떠받치는 생산도구인 동시에 사회 욕 구 분출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 과녁이 흑인 사회 와 더불어 라티노 사회가 되고 있으며, 언제 우리 동양계사회로 번질지 모른다. 찬찬이 굽어보면, 꽃은 일 힘든 일은 모두 멕시코 사람들에게 의존 하면서도, 즉 멕시코 사람들이 없이는 이 사회 가 돌아가지 않는데도, 모든 사회불만의 표적이 곧잘 그들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자기를 확고히 하자는 것은 당당하게 더불어 살자는 데에 뭇이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강한 역사인식 과 오랫동안의 외침에서 비롯된 타 종족에 대한 배타주의가 몸에 밴 감이 없지 않다 거기다가 지난 일백 년 동안 민족통합의 역사경험을 갖지 못하여 이기주의가 극에 달하고 있다 돈이면 된 다는 생각,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뛰어 넘 어 사회공동체적 가치를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 다.

집단이든 국가든, 나아가서 국제사회이든 더 불어 살기를 거부하고 지배하려는 데서 늘 문제 가 비롯되었고, 쓰라린 역사경험을 하여야만 한 다 인류의 궁극의 목적은 더불어 사는 데에 있다. 종교도 그 이상을 실현코자 하는 일에 다름 아닐 터이다.

온효기 1939년때 태어나 1970년에 미국에 옴. 현재 민족학고」 미사미며 시사영룬가로 활동 중임-

미주한인동포사회와 우리의 과제

장태한

미주한인동포사회는 백여 년의 미주어민 역 사상 가장 어려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 다 4•29 LA사태가 초래한 경제적인 타격과 정 신적인 충격은 과연 한인사회의 재기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본국에서는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인 사건을 계기로 신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여파가 서서히 미주한인동포 사 회에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고 있다. 미주한인동포사회는 본국지향적인 정치성향 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으며 따라서 직접 또는 간접 적인 간섭과 영향을 받아왔다.

미주한인동포들은 본국정부의 탄압과 미국내의 인종 차별을 동시에 받는 이중탄압의 어려움을 감수해 왔다. 영사관 그리고 안기부의 노골적인 간섭과 언 론통제로 인한 민주화 운동세력의 분쇄 등은 70 년대와 80년대초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미주한 인사회의 모습이었다. 또한 미주한인들은 소수민 족의 일원으로서 미국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 박 혀 있는 인종차별과 수모를 당해왔다. 다시 말하 면 본국정부의 부당한 간섭과 미국내의 인종차 별을 동시에 받는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 왔던 것이다.

4•29 L.A.사태는 우리에게 새로운 자각을 주• 었다. 미주한인들도 미국내의 소수민족으로서 심 한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4•29 LA사• 태의 가장 심한 피해자로서 절감했다 따라서 인 종차별에 대항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미주한인 동포사회에서 추진돼야 할 것이다.

본국 문민정부의 개혁의 바람을 지켜보고 있는 미주한인 사회는 앞으로의 망향을 어떻게 결정 할 것인가?

4•29 L.A.사태를 경험했고 본국 문민정부의 개혁의 바람을 지켜보고 있는 미주한인 사회는 앞으로 방향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미주한인동포사회는 Korean American으로서 의 위상정립도 해야 한다. Korean American은 누 구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가 설정돼야 구체적 인 활동을 벌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Korean American은 한국계 미국시민으로서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능동적으로 일을 해결해 나가는 것 을 의미한다. 또한 앞으로 욕 실현될 조국통일에 중 재자(?) 로서의 역할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강조하고 싶다.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 기 위해서는 북한과 남한 정부 그리고 국민들로 부터 신뢰 받을 수 있는 밑바탕이 있어야 한다 Korean American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중재자 가 되기 위한 밑바탕을 하나 둘씩 쌓아 올라가 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력 신장이 4•29 L.A.사태 이후 미주한인 동포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그 러나 정치력 신장이란 한인 정치가 몇 명을 탄 생 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인사회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없는 한인 정치가는 우리에 게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소적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어에 능숙 하고 미국사회의 참여가 가능한 젊은 세대들이 실체로서 압력단체를 구성하고 미주한인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즉 인종차별, 인권탄압, 법적 불평등, 언어 문화장벽, 노동 탄압 등의 문제 들올 직접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 것을 위해서는 재력과 경험을 갖고 있는 의식 있는 1세들과 2세 들의 공동보조가 절대 필요할 것이다.

인종차별, 인권탄압, 법적 불평등, 언어• 문화장벽, 노동 탄압 등의 문제들을 직접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재력과 경험을 갖고 있는 의식있는1세들과2세들의 공동보조가 절대 필요 하다

마지막으로 미주한인동포사회는 공부하는 자 세를 확립 해야 한다.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 교에 다니고 책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앞으로 닥쳐올 문제들을 이해하고 미리 준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주한인동포사회에 또 많은 시련이 닥쳐올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공부 하고 준비하여 피해를 줄이고 4•29 L.A.사태와 같은 억울함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미주한인동포 사회의 과제는 공부하면서 준비하는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느 사회이건 남다르고 특수한 문화를 가진 다. 문화는 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가 되비쳐 드러나는 것이지만 거꾸로 사회를 이끌어 나자 는 큰 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포사회가 어떻게, 어떤 문화를 가져야 할 지를 생각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오늘 재미동포사회의 문화는 텅 빈 깡통과 같으면서도 갈갈이 찢겨지고 나뉘어져 있다 미 국•일본문화에 찌든 오늘의 조국문화와 엄청난 자본의 힘으로 하루하루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적 시는 미국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문화는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 또한 1세와 2세의 문화 가 갈라지고, 생활과 문화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둥 우리 문화는 병들어 가고 있다. 이 같이 엉켜있는 문제들을 풀어내는 일과 함께 참 된 동포사회 문화, 올바른 우리문화를 새로이 만 들고 다듬는 일감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뿌리를 심는 일부터 하자

우리문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는 일부터 해야 한다. 1세들의 무관심과 어려운 생활조건이 빚어낸 2세들의 텅 빈 민족문화의식은 물론이고, 1세들 또한 민족 문 화의 냄새도 제대로 맡아보지 못하고 자라온 탓 에 동포사회는 민족문화의 뿌리가 뽑혀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조국에서 지난 70년대 초부터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민족문화운동의 싹이 이 곳 미국땅 동포사회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 결과• 곳곳에서 문화 운동 패들이 민족교육운동과 어깨를 함께 걸고 적게나마 그 씨앗을 뿌려왔다. 나 성의 ‘한누리’, 시차고의 ‘일과 놀이’, 뉴욕의 ‘비나리’ 둥 민족 문화 때들이 척박한 미국땅에 우리 문화의 맛을 보이는 노력을 펼쳐왔다.

동포사회의 민족문화운동은 이제 풍물을 두 드리고, 민요를 부르는 걸음마 단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민족문화의 뿌리를 교육하는 민족 문 화 교육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문화교육을 포함하는 민족교육이 동포사회 문화를 살리는 단 하나의 길임을 알고 민족의 바른 역사와 문 화를 배우고 찾아내는 일을 조국동포들과 힘을 합해 펼쳐야 한다. 잊었던 뿌리를 찾는 일은 결코 ‘누워서 떡 먹기’일 수 없다. 우리 것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아픈 현실을 바로 알고 이 같은 우리문화의 처지를 되새기며 우리 자식들이 겪을 텅빈 가슴의 쓸쓸함을 참된 민족문화의 알맹이로 채워주리라 다짐하며 힘든 뿌리 찾기의 길로 땀 흘리며 뛰어가야 한다. 민족문화사 교실을 열고, 문화강습회를 통해 우리의 핏속에 녹아 숨 어 있는 민족의 얼과 가락, 숨결과 홍을 깊은 바 닷속 진주를 따듯이 뽑아 올리는 ‘민족문화 뿌 리찾기 운동’의 가닥이 잡힐 때, 그리고 곧 이어 서 우리의 뿌리에 대한 믿음과 자랑스러움이 모 든 동포들 가슴에 알알이 맺힐 때, 우리는 이제 이 터전 위에 ‘동포사회 문화’를 세우고 다듬어 가자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알리는 일은 무척이나 전문적 인 일이다 무턱대고 장고를 두드린다고, 민요를 불러 젖힌다고 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재미동포 민족문화운동은 이제 전문성의 길로 내달려야 한다.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깊 은 이해와 넓은 인식을 갖춘 전문 문화운동가를 키워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일은 한두 사람의 땀 으로 이룰 수 없다.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동포사 회 모두의 많은 도움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생활문화의 가닥을 잡자

둘째로, 우리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생 활 문화의 가닥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문화는 크게 생활문화와 예술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문화에 대한 평가는 겉으로 빛나게 드러나는 문화예술 행위에서 보다는 잔잔히 밑 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회생활의 모든 갈래를 감 싸안는 생활문화에 더욱 무게가 가야 한다 결국 문화예술이란 생활문화의 집약된 표현일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생활문화란 오직 생활 속의 세심한 노력과 고민을 통해 의식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생 활 문화의 한 유형으로 우리는 공동체 문화를 이 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 복잡하기 그지 없는 사 회 구조 속에서 과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공동체 문화를 실현하는 것인지를 정리하지 않 고는 말로만의 공동체 타령이 되기 쉽다. 취미 생 활에서부터 직장생활에까지, 가족관계에서부터 남녀관계에까지, 독신생활에서부터 혼인 생활 에 까지, 말투에서부터 옷차림에까지 생활문화가 건드리지 않는 것은 없다. 이렇게 넓고 깊은 과제는 하루아침에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 정리하고, 뜯어 고치고, 토론 하고, 만들고, 깨버리면서 나가야 한다 올바른 생활문화를 세우는 일은 따라서 언제나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생활문화를 만드는 구조적 틀을 우선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가닥잡기를 미룰 수 없 다. 우리는 올바른 생활문화를 만드는 구조적 틀 을 우선 만들어야 한다 일터에서, 단체생활에서, 부부생활에서 올바른 생활문화를 세우기 위한 모범적인 툴이 하나, 둘 갖추어지고 그것이 알려 지면서 생활문화의 가닥은 서서히 잡혀가는 것 이다.

민족문화운동은 생활문화 가닥잡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모든 생활에서 올바른 모범을 보이 고, 자칫 건조해지기 쉬운 이민생활에 문화적 풍 부함을 제공하는 둥 동포사회 안에서 올바른 생 활 문화 형성의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활문화를 세우는 일은 결코 민족문 화 운동만의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다. 모든 동포들이 생활문화 형성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올바른 생활문화는 영영 먼 나라 이 야기가 될 것이다.

2세 문화운동을 키우자

재미동포사회는 아직 1세들이 80%를 차지 하 는 1세 중심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나머지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날이 동포사회 안에서 위 상이 높아가는 2세들의 존재를 문화운동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 2세들은 현재 참으로 딱한 처지 에 놓여있다. 많은 2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코리안’이란 존재에서 찾으려 하나, 무엇이 ‘코 리안’ 으로서의 정체성인지 그 내용을 모르겠다 고 하소연한다 단순히 코리안 피를 가졌다고 믿는 데서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핵심적인 내용은 표리 안 문화이며 다시 말하면 재미동포사회 문화 이다. 그러나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동포사회 문화를 보면서 2세들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혼돈에 빠진다.

2세 문화운동은 하루가 .시급한 상황이지만 아직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들에 대한 동포사화 전체의 많은 성원과 지원,격려가 절실하다.

아직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이유조 차 느끼지 못하는 2세들도 많이 있지만 올바르게 정체성 문제에 파고드는 소수 2세들의 아픔 만이라도 모든 동포사회가 함께 느껴야 한다. 그 리고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재미 동포사 회 문화를 일구는 일에 이들 2세들이 동참할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1세들만의 것이 아닌 1세와 2세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2 세들은 미국사회에 녹아 들지 않고 그렇다고 나 름 대로의 문화도 가지지 못한 1세들에 대한 심 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거부감은 1세들이 주도하는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거부감에 까 지 연결된다. 결국 1세 문화운동과 함께하는 2세 문화운동이 없이는 광범위한 2세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2세 문화운동은 하루가 시급 한 상황이지만 아직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다 민 족 문화에 대한 관심은커녕 동포사회에 대해 관 심이 있는 2세단체조차 눈뜨고 찾기 어려운 상 황에서 2세 문화운동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눈에 크게 띄지는 않지만 곳곳에서 미국 주류사회가 아닌 동포사회 안으로 눈길을 돌리고, 1세들과 손잡고 바른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하려는 2세들의 모임이 생기고 있다. 이 들에 대한 동포사회 전체의 많은 성원과 지원, 격려가 절실하다.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위해

끝으로 동포사회는 하루 빨리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많은 동포들이 어려운 경 제 사정 속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동포사회의 이른바 ‘주류문화’는 동포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문화예술인 들은 추상적인 어휘와 내용에 집착하여 자족적 인 작품들을 만들고 있을 뿔이며 국내 연예인들 의 방문 공연과 성악가들의 점잖은 노래의 향연 이 언제나 가장 많은 동포들을 모으는 연례행사 가 되어있다 동포사회 유지들의 행사는 언제나

우리문화를 만들자, 민족문화의 뿌리를 단단히 박고, 올바른 생활문화의 가닥을 잡으며,2세 문화운동을 일으키고,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이루며 우리 문화를 만들자

화려한 식당의 불빛아래 허리 잘록한 양주잔을 들어올리며 진행된다 과연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이같은 문화적 행태들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산호세의 전자공장에서, 나성의 봉제 공장에서, 뉴욕의 청과물상에서, 빈민가 구멍 가게에서 일하는 많은 동포들이, 미국 곳곳의 식품점 구석에서 김치를 담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공 감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2세들이, 이민 온 지 얼마 안되어 언어 장애와 일자리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동포들이, 동포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며 이리저리 직장 올 옮겨다니는 찍새(캐시어)와 짐꾼들이 과연 공감 할 수 있올까?

동포사회는 하루빨리 문화와 생활의 통 얼을 이루어야 한다.

뉴욕의 재미동포 시인 최용탁씨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 사이를 걷다가/ 사람에 걸려 넘어진다/ 때 로는 부축을 받고/ 누군가의 어깨에 한쪽 팔을 넣어 보지만/ 여, 지, 없, 이 비틀거린다/ 꽃 향기 진한 곳에선 한동안/ 머물기도 하면서/ 우리가 찾는 것은 숨어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을까/ 어느 시인은 날고 싶어서 새를 키우고/ 사람들은 새를 구워 배를 채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이와 잠자리를 찾아/ 제국으로 오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비워두고 온 빵으로/ 휴양을 간다/ 많은 사랍 들이 브로큰 잉글리시로/ 부서진 삶을 힘겹게 맞추고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은 중시와 유럽의 통합을 이야기한다/ 세기말을 가득 채운 거 대한 뒤죽박죽과/패배한 이성의 하늘 위에/ 질, 서, 정, 연 하게 날아가는 것은/ 폭격기들 뿔이다 / 그 아득함 사이에 숨어있는 것을 찾아서/ 자칫하면 깡패로 풀렸을 나는/ 뉴욕에서/ 시를 쓴 다』

우리문화를 만들자, 민족문화의 뿌리를 단단 히 박고, 올바른 생활문화의 가닥을 잡으며,2세 문화운동을 일으키고,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이 루며 우리 문화를 만들자. 그래서 더 이상 뒤죽 박죽과 패배한 이성을 노래하지 않고 밝은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 올 맞이하도록 하자.

[파이오니어 티쳐 서푸라이스 광고]

미국땅, LA라는 곳에 ‘크렌셔’라고 이름하는 큰 행길이 있다.

날씨 좋다고 기분좋게 뒷짐지고 산보라도 나갔다 가는 언제 어디서 나타난 강도에게 주머니 털리고 얻 어 터질지 모르는 이 길,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이 행길엔 온종일 자동차 들만이 치닫고 그나마 가끔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면 맥도널드 가게 앞에 일없이 서있는 바싹 마른 몇몇 흑 인 형제들, 쓰레기통 뒤져 무언가를 업에 넣고 마지막 목숨을 푸득이는 흑인 노인네가 보일 뿐, 그 외엔 마른 먼지, 그리고 타는 햇살 그것 뿐이다.

자동차 개스가 다 떨어져가니 여기쯤에서 넣고 갈 까 ... 아나 더 안전한 곳까지 가서 넣을까 망설이며 크렌셔/아담스 네거리 구석에 있는 자동차 개스집올 흘겨보다 보면 느닷없이 눈에 띄는 낯익은 간판. 꼬 부랑말 아닌 한글간판이 걸려있다.

민족학교.

가끔 들러서 책도 빌려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고 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보다도 더 나를 강하게 끄는 것이 있어서 학교 앞에 차를 세운다. ‘아니, 웬 봉숭아가 저 갈라진 시멘트담 옆에 저 렇게 거것말처럼 아름답게 피어있단 말인가?’ “고향의 봉숭아 꽃 이지요. 고향에서 씨 갖다 심었 는데, 아앗따 미국놈 닮았나 웬키가 이렇게 큰지" 꽃물주는 광주아저씨, 콧둥에 .땀 방울이 맺혀있다. 꽃바람 솔솔 불때마다 히뜩히뜩 보이는 흰 머리털, 올해도 고향에 못 돌아가고 타향땅 미국땅에서 봉숭 아 꽃 에 눈물 뿌리고 서 있다.

‘마당집’이라 불리는 이 민족학교에 땅거미가 지 고 어둠이 내려오면 학습하러 오는 사람들, 일 도우러 오는 자원봉사자들, 방문하러 오는 손님들의 차로 좁은 마당이 꽉 차곤한다.

꽃 물주던 아저씨는 이젠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싱싱하고 기운 세 보이는 청년 두서너 명이 허리에 양손을 받쳐짚고 버티고 서있다. 마당집에 오신 손님들의 차를 갱들이나 도둑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려는 것이다.

이 마당집 앞마당엔 이따금씩 장이 서기도 한다. 사람들이 쓰다 버린 물건이나 입다가 버린 현 옷가지 를 모아 놓았다가 일요일 오후를 빌려 ‘벼룩시장’을 여는 것이다. 가난한 혹인 형제들이나 멕시코형제들이 들러서 찌그러진 주전자 조각이나 또는 화안히 비치 는 속치마,브래지어 둥을 접어가지만 고객의 대부분 은 소경 제닭 잡아먹는 민족학교 식구들이다.

그냥 놔두어도 접어가지도 않올 물건들이지만 그래도 몇사람은 뱅볕도 아랑곳없이 끈질기게 지키고 앉아있다. 그들의 손에는 땀내나는 일불짜리 지폐 몇 장이 꼬깃꼬깃 쥐어져 있다. 끝내 좋은 일에 써보겠다는 의지의 주먹 속에 쥐어져 있는 이 일불 짜리 들은 어떤 가진 자의 천불 짜리 지폐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그들 젊은 사람들 틈에는 으레 한 분 곱게 생기신 할머니가 앉아 계신다..오늘 만은 깡통 줍기를 쉬시고,그동안 모아놓으신 헌 옷 가지를 손수 세탁해서 이 벼 룯시장에 출품하시고 손님을 기다리고 계신 우리들의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따금씩 마당집의 쪽문이 열리면서 밖을 살피러 나온 고참 식구들이 있다.

“얼마 벌었어?"하고 물을라치면 모두들 ‘까르르’웃는다. 돈은 몇푼 못벌어도 마당집에 장이 서는 날 은 종일 웃음꽃이 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 마당집 식구들이 몸 비비며 지내는 좁다란 학교 방이 있다. 낡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는다. 쾌쾌한 먼지냄새 속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다.

거센 바람을 살다 간 이들의 사진 앞에 소리 없이 흐느끼는 가느다란 소리, 주먹 쥔 젊은이들의 절규 같은 노래 소리,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아 천근으로 서 있는 고향친구 떠나 보내며 한참 울먹이다 겨우 업을 여는 목쉰 소리 “통일되면 만나요.”, 뒷마당에서 울 리는 장고소리 꽹과리 소리 잦아질 때 누군가가 발꿈치로 뛰어와 타이르는 소리 “쉬이, 조용히 좀 해요. 이 층 에서 형님 몸 뒤채는 것 알면서. 어제 또 국내에서 일이 터졌잖아요"

문득 눈을 뜨고 창 밖을 내다본다. 꽤도 많은 차들 이 서로 속력을 다투어 가며 지나간다. 다투는 것이 어찌 속력뿐이랴. 자기만의 안이, 자기만의 행복을 다툰다.

“괜시리 생기는 것도 없이 애쓰며 사는 사람들이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마당의 키다리 봉숭아 꽃이 내게 말을 건넨다.

“저기 저 수없이 많은 L.A.사람들처럼 좀 고통 같 은 것 오거든 웬만큼 해서 넘겨 버리는 꼴을 못 보지요. 그저 쉴 새도 없이 자아비판을 해서 자신들을 세 상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 봉숭아 꽃은 말끝을 흐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꽃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어제는 광주에서 편지가 왔지요" 나즈막한 소리로 꽃이 말한다.

“형님이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 편지를 읽어줄 땐 나도 눈물을 흘렸지요. 물론 나 혼자 들은 건 아 니에요. 때마침 장시간 전단을 돌리고 돌아온 민족학 교 젊은이들, 전단 돌리면서 온갖 모욕을 받고 돌아 온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함께 들었지요. 다는 기억 올 못하겠지만 맨 나중에 쓴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그곳 민족학교에서 뵙고 온 분들을 한 분 한 분 기억 속에 떠올리며 몇 번이나 활동으로 눈물을 문질렀는지 모릅니다. 몇 십만의 한인 인구 속에서 보이 지도 않는 작은 수의 사람 들 이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을 선취적인 결단에 의해 능동 적으로 받아들여 그 삶을 재생시켜 가고 있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라는 논리는 절대있을 수가 없지요. 또한 그것이 ‘감상’이어서도 안되지요. 오히려 스스로 부딪쳐 피 흘리고 부서졌다간 다시 커지는 ‘정신의 죽음과 삶’을 계속적으로 받으 면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하는 그곳의 동지 들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정을 보냅니다.’

돌아오는 길, 나는 그 봉숭아꽃에게서 한 줌이나 되는 꽃씨를 선물로 받아왔고 그 씨는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져 그들의 집 마당에서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위 글은 올해 2월 7일에 있은 민족학교 창립 제 10주년 기념식에서 조병옥 선생님이 낭독하신 글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입니다.

조병옥: 1935닌에 태어나 1973닌때 특일로 갔다가 1988년에 미국에 옴. 전 이회여자대학고 음대 교수.

대담: 민족학교 10년을 되돌아 본다

더불어 사는 뿌리는 설립 10주년을 맞은 「민족학교」의 지난 이야기를 다루었다. 민족학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곡절들을 전•현직 두 분 이사장을 통해 들어본다.

박정병: 저는 상근 생활이 짧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많아 질문이 많은데요. 우선, 1980년대 초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5•18광주민충항쟁의 후유증으로 의식 있는 사람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였는데 이곳에 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때 에 두 분은 어떻게 민족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최진환: (웃으며) 글쎄. 우리나라에서야 군인이 정권을 잡아 독재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미국이니까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 하루는 (83년 1월 정) 합수 (융한봉)가 흉기완 (전 이사)씨와 같이 우 리 사무실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민족학교를 세우려고 하니 이사장직을 맡아달라는 거야. 그래 승낙했지.

신소하: 최박사님은 어떻게 해서 윤(한봉)선배님과 알게 되셨어요?

최진환: 그때가 아마 1981년이었을 거야. 고 김상돈 (전 민선 서울특별시 선생 집에서 친구들간의 모임이 있었는데,거기서 김선생이 한국에서 온 청년 을 소개하겠다며 인사를 시켰지. 그래서 알게된 거지. 그날 합수는 자기를 ‘김상원’이라고 소개 했었어.

이길주: 그래,맞아요. 그때는 김상원 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배타고 몰래 밀항해서 아직 신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최진환: 그날 그 집에 오인 사람들은 그래도 진보적 이고 우리나라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안다는 사 람 들이었는데, 합수가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하면 국내사정은 전혀 달랐어. 그래 주의 깊게 그 청년을 살펴보았지. 어딘가 다른 데가 있었어. 대단한 애국 심을 가진 철저한 민족주의자 같았어. 그때, 내 생 각에 ‘이 청년이야말로 우리나라와 동포사회의 장 래에 필요한 사람이다’ 싶어서 이 청년을 도와야겠 다고 결심했지. 그때는 나 말고도 합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어. 고 김상돈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 차상달 선생, 여기 있는 이길주 이사, 흉기완씨 등 많았어. 그사람 들이 가끔 합수와 식사를 하게 되 면 나를 불러 같이 이야기하곤 했어.

이길주: 그때 합수씨는 참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눈 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것 같았으니까요. 5-18광 주민중항쟁을 겪고 주모자로 몰려 숨어 있다가 하룻밤 사이에 밀항해 아무 연고자도 없는 미국에 오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동포사회가 제일 크다는 LA에 와서 보니 내로라 하는 단체들은 친정부적 성격을 띠고 있지, 그래도 좀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청년들은 다 어디 가고 50대 어른들만 모여 자유주의적인 사고에 반공일관론이나 펴지, 왜 한심하지 않았겠어요.

신소하: 네,그런데 우리 마당집 (' 민족학교’ 를 말 한) 운영방식이 북미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립 전후의 생활모습을 말씀해 주세요.

최진환: 독특하지. 북 미주에서뿐만 아니라 아마 전 세계에서 우리 같은 센터(민족학교 운영방식을 가진 곳은 없을 걸. 상근자 봉급을 주나 그렇다고 남들처럼 정부나 재단으로부터 기금을 받나. 그래도 공동체 생활을 하니까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와서 밥은 먹거든.

이길주: 상근자들이 고생 많이 했어요. 방이나 부엌 이 따로 없고 그냥 큰 홀을 홍기완씨가 막아. 한쪽 은 사무실로 다른 쪽은 부엌으로 썼었어요. 밥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이 없었어요.

최진환: 계약에 밥을 못해 먹도록 돼있었지.

이길주: 그래서 쌀을 화장실에서 몰래 씻어 물을 번 기통에 버리고 보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얼른 뛰어 들어와 전기곤로에서 밥을 짓곤 했어요. 합수씨의 전라도 강진 고집이 대단했어요. “동포들의 마당집인데 동포들이 먹을거리를 갖다 주면 먹고 안 갖다주면 굶는다”는 식이었어요. 이따금식 마당집을 방문하면 밥과 된장에 멸치를 찍어 먹으면서도 같이 먹자고 자리를 비워주곤 하는 정을 보면 눈물이 나서- -

[1983년 2월 5일 민족학교 설립식]

최진환: 그때는 여자 상근자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상근자들이 잘 방이 없어 바닥에 모포만 깔고 잤지. 덮을 이불이 없어 수건으로 배만 가리고 자는 생활을 했어.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이런 고생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위에서 부엌용구며 사무 용품들을 하나씩 들고 오기 시작했어. 이 이사장이 수시로 집에서 음식이며 살림용구들을 갖다 나르며 상근자 들의 누님 노릇을 했어.

이길주: 근데 놀란 것은 합수씨가 그것들을 일일이 기록해 감사편지를 보내고 전화도 하고, 이사회가 얼리고 나면 꼭 활동보고서를 보내는 거예요.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민족학교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생각했죠.

박정병: 활동보고서를 후원자들한테 보내는 전통은 그때부터 생겼군요?

신소하: 그때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가끔 제 가보기도 하는데....

[1993년 2월 7일 민족학교 설립 제 10주년 기념식]

이길주: 아참 그리고 상근자와 후원자들이 먹는 음식비는 마당집 운영비에서 지출 되지 않고 별도로 유지되고 있어요. 그래서 밥값 모으는 병이 따로 준 비 되어 있어요. 밥 먹은 사람이 알아서 돈을 넣도록 말이에요. 아직도 그 전통은 계속되고 있구요.

신소하: 네. ‘밥값, 자율! 알아서!’라는 딱지가 붙은 모금 병이 식당으로 쓰이는 방에 있어요.

박정병: 듣기로는 윤한봄,홍기완 두 선배님이 직접 망치들고 책장이며 칠판걸이등 필요한 것들을 만들 었다고 하던데요.

최진환: 그랬지. 합수는 자기 스스로 「민족학교」 ‘소사’라고 했고 홍기완씨는 목수일에 소질이 있어. 웬만한 것은 다 만들어 썼지.

박정병: 일을 하려면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크게 부닥치는 것이 돈 문제 일텐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 어려웠다고 들었는데요 ...

최진환: 글쎄. 재정문제는 늘 따라다니기 마련인데, 나는 지금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사실 내가 「민족학교」 이사장 일을 맡겠다고 했지만 몇 달 이나 갈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렌트며 사무실 운영 비 등 비용이 많이 드니깐. 그런데 후원자들이 많이 도와 주었고 그것을 중간에서 허비하거나 착복하는 사람이 없이 다 학교사업에다 썼어. 희생적인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지. 또 운영비 마련을 위한 바자도 자주 했고.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된 전진 호 교장이 민화를 수십 장 모아 갖고 있었는데 그 것을 팔아 운영비에 보탰어.

이길주: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 우리 집으로 왔지. 나는 우리 남편한테 그것을 파느라고 온갖 애교를 다 부리고..... '. (참석자 모두 웃음)

최진환: 또 김홍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나무에다 조각한 작품들을 팔아 그 돈을 「민족학 교」에 기부하기도 했어. 그리고 중고품 판매 (거라지세세일)와 깡통 모아 파는 것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거구- (편집자 주: 세금도 민족학교」는 운영비의 70% 이상이 동포들의 기부금으로 모아진다)

신소하: 설립목적이야 어떻든지 「민족학교」라는 이 름 하나만으로 숱한 유언비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요. 물론 영사관측의 고의적인 방해도 심했겠구요.

최진환: 크렌셔길에 사무실을 얻고 설립식을 하고 간판을 걸었지. 그러니깐 주위에서 수군수군 여러 말들이 들려오더라고. 다 우리하고 관계없는 말들이 긴 하지만.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 있으니깐 ‘이건 분명 이북에서 온 간첩이 세운 학교다’, 「민족학교」에 가면 김일성 사진이 붙어 있다’, ‘거기에 있는 청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구타를 한 다’ 둥 (웃음). 또 그때 당시 합수가 하는 일을 좋 지 않게 생각하는 그룹들이 있었어. ‘합수가 태평양을 건너 밀항했다고 하는데 그건 도저히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이다. 틀림없이 중앙정보부에서 미주에 있는 우리 진보세력들을 파괴시키기 위해 보낸 첩자일 것이다’ 등 비방•중상이 대단했지. 그러니까 합수는 한쪽으로부터는 북한 간첩으로, 또 다른 쪽으로부터는 중앙정보부 첩자로 몰리게 된거지. 그런 합수를 도와 같이 일을 하는 나를 그들이 곱게 보겠어? 자연 나도 누명을 쓰는 거지. 소문 이 퍼지니까 친했던 친구들이며 교인들이 나를 슬슬 피하고 뒤에서 수군수군거리기 시작하더군. 그 때는 참 견디기 어려웠어. (최 박사님의 눈이 촉촉히 적셔지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길주: 10년전 그때는 언론사에서조차 민족학교 라는 존재를 무시했어요. 심지어는 우리가 설립식을 하고 보도의뢰를 여러 동포언론사에 보냈는데, 아무 데서도 실어주지 않는 거예요. 다만 코리안 스트릿 저널과 캐나다에 있는 「뉴코리아 타임즈」에서 기사를 다뤄주어서 지금도 그 기사가 보관되어 있어요.

최진환: (웃음을 띠며) 박군은 무슨띠야?

박정병: (의아한 표정으로) 개띱니다

최진환: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개띠? 박군이 우 리나라 나이로 열 세살 때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우 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군. (표정을 바꾸고) 사람이 심한 어려움에 처하면 오히려 용기와 더불어 오기가 생기는 법이거든. 그때 우리는 정말 반은 사명 감으로 또 반은 오기로 일을 밀고 나갔지. 그때 얘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오후 에 웬 젊은 청년이 현관문을 빼꼼히 열더니 머리만 들이밀고서는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꺼리며 혼자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더라구. 그래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지. 그 청년이 자기는 이곳에 오면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고 사람을 마구 구타한다는 소문을 들고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와본 거라고 하더군. (참석자 모두 웃음)

박정병: 기록에 의하면 그때도 상당히 많은 활동을 했는데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최진환: 지금이야 「민족학교」가 무료법률상담, 세금 보고 대행, 도서실운영, 그리고 영화상영 등 교육활 동과 봉사활동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또 세월도 많이 흘러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초창기에는 그렇지 못했어. 그래도 좀 생각 있는 젊은이들한테 민족교육을 해야 하고 또 「민족학교」라 는 단체가 세워져 활동 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나라 근•현대사 교실’, ‘탈춤강습’, ‘태권도 교습’, ‘판소리 감상회’ 등 참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었어.

이길주: 재미있었던 일 하나 이야기 할까요? ‘탈춤 강습’ 반에 합수씨가 들어갔어요. 그때는 김석만씨 (현 중앙대 교수)가 지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이 합수씨를 조용히 불러서는 강습반에서 좀 빠 져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이유는 합수씨의 몸이 너무 뻣뻣해서 곧 부러질 것 같아 불안해서 못 보겠 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합수씨는 “나도 배울란다” 고 고집을 부리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지장을 준다 는 선생의 말에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는 정말 여러 가지 해보았어요. ‘악보원기와 우리노래 부르기’도 해보고, ‘미술품 전시회’도 자주 했어 요. 물론 전시회는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요. 참석자는 적었어도 다들 진지하고 열성 이었어요. 아마, 최선생님도 역사교실에 몇 번 강사로 참석하셨지요?

최진환: 그때야 교사라고 했지. 몇 명의 교사가 주 제별로 돌아가면서 참석을 했지. 은호기씨 r현 이 사). 고 전진호씨, 김상일씨 (현 한신대 교수) 등이 었지. 그리고 ‘건축으로 본 한인타운 형성의 문제 점’이라는 주제를 발표한 적도 있었어. (기록에 의하면 연사는 박준성님이었음)

신소하: 그런 활동 중에서 ‘우리나라 역사 교실’은 지금도 일년에 2-3번씩 3개월 코스로 하고 있어요. 이건 다른 질문인데요. 지난 2월에 설립 제 10주년 기념식장에서 발표된 것 충에서, 도서가 약 3.200권 이었거든요. 결코 적은 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초창기 때 이 도서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말씀 좀 해주세요.

이길주: 민족학교가 세워지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 씩 갖추어 가는데 무엇보다도 책이 제일 필요했어요. 근데 책 살 돈이 있나요? 주위 사람들이 자기 가 갖고 있던 책들을 한 권씩 기증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합수씨가 주위 사람들 집을 방문하게 되면 으레히 그집 책꽂이부터 살펴보고는 괜찮은 것이 있으면 기증받곤 했지요. (웃으며) 말이 기증이지 반 강제(?)였어요. 합수씨는 책에 관한 한 양보가 없었어요. 항상 하는 말이 “세상에는 지옥갈 사람이 3종류가 있는데, 그충 첫번째가 좋은 책을 혼자만 원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최선생님도 최진환• 뭐, 장준하선생 작품집 10권을 비롯해서 여러 권 빼앗겼지 (웃으신대. 합수는 어떤 사람이 좋은 책을 가지고 있는데 기증하지 않으면, 어느 날 그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그 책을 가방에 담아 와. 그러고서는 몇 일이 지난 후 ‘형님 (또는 선생님). 그 책 제가 「민족학교」에 갖다 놨습니다’ 하는데 뭐 라고 할 커야. 그냥 웃으며 기증하는 거지. 대신 그렇게 해서 모은 책들을 무척 아꼈어. 조금만 찢어 지거나 흠이 생기면 손수 풀로 붙이고 스카치 테입으로 바르고 했으니까. 그리고 누가 책을 빌려가서 홈을 내서 돌려주면 그자리 에서 야단이 나. ‘ 이 책이 어떤 책인 줄 아느냐’, ‘책을 소홀히 다루는 사람은 원을 자격이 없다’고. 책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데, 어떤 사람이 「순이삼촌」이라는 책을 빌려갔어. 그 사람이 책 돌려줄 날짜를 한참 넘기고도 연락이 없었어. 그래서 상근자들이 비상이 걸렸지. 그런데 그 사람은 이사를 가고 전화번호도 바꿨네. 새 번호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떻게 어떻게 새 번호를 알아서 연락을 했지. 그게 그 사람이 이사가고 1년이 넘은 때였어. 상근자들이 「순이삼촌」 책 돌려달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는군. 어떻게 자기 연락처를 알았냐고 되 묻더래. 그래 우리 상근자들이 책 안 돌려주면 지옥까지 따라간다고 했더니 몇 일 후에 갖고 왔어. 그때 그 사람이 우리보고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사실은 그 책이 귀한 것이라 자기가 먹을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하더군 (모두가' 웃음). 그렇게 해서 모인 책들이야. 그 3.200여권이.

(편집자 주: 세금도 민족학교 도서실에는 ‘이 책 들은 뜻있는 분들이 기증하신 것 입니다. 감사드리며 읽읍시다’, ‘빌려가신 책을 기한내에 몰려주지 않는 분 에게는 대출을 중단합니다’, ‘빌려가신 도서를 분질 포는 배손했을 때에는 권당 30불올 변상 하셔야 합니다’ 라는 안내서자 불어있다)

신소하: 부분적으로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오늘 직접 두 분의 체험을 들으니 새삼 어려웠던 시기가 떠 오르는 듯합니다. 지난 10년간 일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기억되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진환: 글쎄. 아무래도 합수와 관계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왜냐하면 1983년에 같이 「민족학교」를 세 우고 「민족학교」가 설립 10주년이 된 올해 5월에 합수가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여행증명서를 받아 대낮에 떳떳히 귀국하게 되고, 또 내가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나로서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어.

박정병: 시간이 픽 지났는데요. 미처 여쭤보지 못한 게 있네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민족학교」를 아는 사람도 있겠고 전혀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민족학교」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를 듣고 이 대담을 마쳤으연 합니다.

최진환: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만주와 연 해주로 옮겨간 우리 선배들이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야겠다고 생 각하고 곳곳에 세워 운영하던 교육•훈련기관들을 통칭해서 「민족학교」라 불렀지. 그리고 그러한 교육 과 훈련활동을 「민족학교 운동」이라고 했었어. 그 후 「민족학교 운동」은 1970년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r민족학교」를 서울에 설립하고 교육 계몽활동을 함으로써 창조적으로 계승되었지. 그러나 곧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문을 닫았어. 그러다 1985년 5월쯤에 서울에서 비제도 민종교육을 내걸 고 또다시 「민족학교」가 설립됨2로써 r민족학교 운동」은 끈질기게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거지.

이길주: 처음에 우리가 동포사회에 민족교육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때, 합수씨가 「민족학교 운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안한 것이 「민족학교」였어요. 지금 최박사님이 말 씀하신 대로 그 유래를 듣고보니 참 좋더라구요. 그래 설립 준비위원들과 상의해서 「민족학교」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죠. 우리가 이름을 「민족학교」로 하자고 했을 때에는 그 이름 때문에 비장중상과 모략을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간판을 걸자마자 그 곤욕을 치루게 될 줄이야…

자리를 정리하는 우리들에게 두 분은 ‘상근자 들이 고생을 제일 많이 한다. 사실 민족학교 살림은 상근자들이 다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이사들은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납기셨다 그러나 선배들의 그 눈물나는 고쟁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며 숙연한 자세로 우리의 할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편집부)


이런 삶

깡통 줍는 할머니, 이주영 할머니

“나는 한 것도 없고 배 운 것도 없는 사람이라서..."

방문을 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고 정만수* 할아버님의 미망 인 이주영 할머님댁을 찾아간 것은 일요일 오후 4시경이었 다. 나성에 있는 노인 아파트. 방 하나, 거실 하나로 된 할머니의 집은 할머니 한 분 이 사시는 집이라고는 믿어 지 지 않을 정도로 아기자기한 살림살이가 가득 차있었다. 소파 뒤에 있는 여섯 폭짜리 병풍과 소파 위에 놓여있는 수가 자잘하게 박힌 깨끗한 쿠션들 속에서 할머니의 깔끔 한 성격을 느낄 수 있었다. “방이 참 좋습니다! 했더니 “이제야 고생이 끝났는가 싶어.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먹고살고, 이런적은 다시 없었 던 것 같아.. 할머니의 주름 진 눈가에 짧은 미소가 퍼진다.

쪼들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할머니를 지탱시켜 주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부러질지라도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 할아버지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

지금 생활이 가장 여유있 다고 말할 정도로 할머니의 생활은 언제나 쪼들린 생활이 었다. “영감 열일곱, 나 열여 섯에 만났지. 영감이 남의 머 리를 깎아서 그나마 밥 술이 나 뜨게 됐지. 우리가 밥이나 먹고 사나 싶었던지 여기저기서 친척들이 몰려들기 시작 했어. 그래서 한때 우리 집에 스물 여넓 식구가 산 적도 있었어.. 그러나 할머니는 무엇보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식민지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겪었던 할아버지의 고초가 가장 마음 아팠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야학을 세우고 민족의식을 갖고 있다 는 이유만으로 몇 년 씩 옥고를 치르셨던 것이다. 딸린 대식 구들,할아버지의 옥바라지,그리고 한 푼 두 푼 모아 산 땅 뙈기에 농사를 짓는 일로 할 머니의 작은 몸은 언제나 갈기 갈기 찢기는 것처럼 힘들었다고 하신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하 나님께 ‘나 정말 못 살겠는데 언제나 이 일이 끝 나겠습니 까?’하고 물었어. 그 날밤 꿈 을 꾸는데 하얀 옷을 입은 세 명의 농부가 소처럼 열심히 밭갈이를 하고 있는거야. ‘아! 이것이 주님의 뜻 인가보 다 싶어 그 다음날부터 나는 소처럼 일하는 밭갈이 농부가 되기로 했지.. 쪼들리고 어려 운 상황 속에서 할머니를 지 탱시켜 주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부러질지라도 절대로 휘어지지 않는 할아버지에 대한 굳은 신뢰였다고 하신다."

해방 후에도 세상은 할아버 지의 진심을 여전히 몰라주었 고 그런 세상인심이 너무나 서러워 할머니는 목놓아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신다.

서울에 올라와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에서 작은 이발관 을 운영하셨다. 여섯 식구가 방 한 칸에서 몸을 부비고 사 는 살림에서도 할아버지는 학생들의 머리를 깎아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으셨다. 그러나 당시는 박정희의 군부 독재 시절. 적색공포증에 걸 린 세상 사람들은 “저런 사람 이 무슨 돈이 있어서 장학금 올 내놓겠어? 분명 북한의 공 작금일 것”이라는 말 을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 이발관에서 쫓겨나셨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어. 애국자는 모두 방안에 들어 앉 았고 매국노만 나와 설치는 시절이었지” 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고려대학교에서 쫓겨나신 할아버지는 중앙대학교에서 일자리를 잡아 이발관을 운영 했고 거기서 나온 돈올 모아 작은 농장 하나를 사셨다.

“하루는 함석헌옹이 애국 자니까 그 농장을 주어야 한 다고 하지 않아. 그게 그때 돈으로 삼백만 원이었어. 애 국자한테 주는 거니까 아까워 말라고 하면서... 옳은 일에 쓰는 거라니까 말 한마디 제 대로 못했지만 자식들이 자꾸 걸렸어. ‘저것들 공부 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야 할텐데’하는 생각에..."

1980년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에 올 때까지 고개 고개 마 다 힘들게 넘어야 했던 조국 에서의 생활이었지만 그렇게 산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올바른 것은 누가 뭐 라고 해도 올바른 것이고 그 른 것은 어떤 겉치장을 하여 도 그른 것이라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 지셨다.

미국에서도 두 분은 여전 히 올바른 일에 도움을 주려 고 노력하셨다. “우연한 기회 에 윤씨(윤한봉*)를 알게 되 었고 「민족학교」를 후원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윤씨를 만나기 이전부터 「국민회」에다 깡통을 모아 주었지. 나는 국내 있을 적부터 ‘애국자다’하면 그 집안부터 유심히 살피는데 어째... ? 나는 ‘애국자다’하면 모두 영 감처럼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제 먹을 것만 챙기고 제 실속만 차리면서 말로만 애국자고 실천과 행동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자꾸 만 깡통 갖다 주는 것이 아까 운 생각이 들었어. 그때 윤 씨를 만났지. 퀘이커 교회를 다니고 있을 땐데 윤씨가 거기를 왔어."

“윤선생님이 미더우시던가 요? “그럼 그랬지" 하시며 무릎을 탁 치신다.

“하루는 민족학교 에서 회의하는 것을 보았는데 ‘너 희들이 진짜 애국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유럽 여행 가려고 삼천 불짜리 계를 붓고 있었는데 ‘시집 장가도 안 간 사람들이 저리 고생을 하는데... ’하는 생각 이 들어서 영감한테 ‘유럽여행 안 가겠소!’ 했지. 그리고 그 돈을 r민족학교」 에 주었어. 그때 참 어려울 때였어. 쌀도 없어서 소영 민족학교 전 총무, 암소영남) 이가 집 에서 돈 타다가 쌀 사놓고, 「동서식품」 앞에서 기다렸다 가 버리는 배추 쪼가리 들고 와 김치 담고, 소금 뿌려 시래기국 끓여 먹을 때니까. 소 영이 참 고생했어. 지금도 「민족학교」 가면 쌀 있나 걱정스러워 나는 쌀 독부터 뒤진다니까.

“영감과 나는 새벽마다 쓰 레기통을 뒤져 깡통을 모았지. 어쩔땐 쓸만한 옷인데 그 냥 버려둔 것도 있었어. 그런 것들을 주워다 깨끗히 빨아서 재봉틀로 박고 손으로 기워서 중고품 판매에 내놓으라고 갖다줬어.."

‘애국자다’하면 모두 영감처럼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제 먹을 것만 챙기고 제 실속만 차라면서 말로만 애국자고 실천과 행동이 없었다. 80년대 초 국내와 동포사회의 분위기로 보아 「민족학교」를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두 분의 생활모습 은 세상 사람들의 말에 오히려 초연했다 한다.

“「민족학교」가 한쪽에서는 이북간첩으로, 다른 한쪽에서 는 중앙정보부 첩자로 몰리던 시대였다. 자원봉사자들은 물론이었고,그들을 돕는 후원 자조차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면키 어려웠다. 그때 두 분의 헌신적인 도움은 진정 귀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올해 초 「민족학교」 설립 10주년 기념식장에서 깡통과 중고품 판매 금을 모아 장학 생 두 명을 선정하여 각 천 불씩 장학금을 주기로 하고, 그 이름을 공개 모집 하였다. 거기서 고른 이름은 다름아닌 정만수•이주영 장학금.

두 분의 정신을 민족학교」 관련자들이 새로 온 사람 들에게 업에서 업으로 전하며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이리라.

민족학교」가 정한 장학금 이름에 기쁘지 않냐고 넌즈시 물어 보았다. “장학금 이름을 정만수•이주영 장학금」으로 한다는데 마음이 좋지 않아. 한 것도 없는데. 그리 안했 음 좋겠어"

민족학교를 돕게 된 것 은 한 평생을 올바르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온 두 분의 삶으로 보아 선 오히려 당연한 듯 싶다.

영감이 원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 먹었어" “영감은 목사들도 말뿐이고 실천이 없다고 했지. 그래서 조용히 명상하는 퀘이커 교회가 성미에 맞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퀘이커 교회를 못 나가게 되었어. 여기저기 큰 교회를 다니게 해보려고 하니까 ‘내가 왜 남의 다 먹 은 김치독에 빠지누?’하며 싫어해. 남이 소금, 고춧가루 다 섞어서 간 맞춰놓은 김치 독에 빠지면 자기자신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지. ‘그럼 당 신 민족학교」 좋아하니까 거기가서 모임 만드우’ 하니 그건 좋대. 그렇게 해서 「씨알의 모임」이라는 것을 갖게됐어.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마다 모여 노래도 부르고 돌아가며 책도 낭송했지. 첫 모임을 갖고 며칠 후 에 꿈을 꾸는데 하이얀 쌀이 내 앞에 수북하게 쌓였어.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자리가 이 자리구나!’ 하고 느꼈지"

여러 사람이 위험하다고 말리는 바람에 할머니는 이제 아첨마다 깡통 줍는 일은 그만 두었다고 하신다.

할아버님이 끝까지하고 가셨던 깡통줍기를 주위의 염려로 그만두신 할머님은, 이제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깡통을 계속 주으신다.

"4년전 동짓달 초엿새 새벽에 같이 깡통을 주우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그만 주저앉아. "못가겠수?" 하니 그렇대. "그럼 당신 들어 가우. 나 혼자라도 할테니!" 했어. 그때 영감은 직장암으로 항문을 떼어내고 옆구리에 변기통을 차고 다녔어. 그후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넉 달동안 혼자 깡통을 모으러 다녔지. 영감은 그렇게 주저 앉더니 몇달 못 넘기더라고."

요즈음도 할머니는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깡통을 계속 줍는다.

떠나오기 전, 할머니는 마침 선물 들어온 과일이 많다며 키위, 복숭아, 딸기 등을 싸 주셨다. "어머님 갖다드려" 하시면서.

우리는 오늘 한 어머님을 만났다. 그분은 일생동안 왜곡된 역사를 살아오신 모든 우리 어머님들이 그렇듯이 참으며 베푸는 강한 어머니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틀에서 못 벗어난채 남편 에게 무조건 순종하며 자식에 게 헌신하는 어머님의 모습만은 아니다. 세상과 역사에 부끄럽지 않기위해 작으나마 할 일을 찾으셨던 분, 그리고 그 일이 다른 이와 더불어 함께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분.

어쩌면 그래서 민족학교」 관련자들은 이주영 할머니를 ‘민족학교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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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당신을 잊은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뿐, 그래도 당신 생각에 가슴은 쑥빛으로 물들어 하늘보고 짐짓 웃어도 본답니다. <1991년 12월>


조선의 하늘과 바다와

깡마른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너, 조선이여. 젖은 눈으로 얼굴 부비며 울부짖는다 조선이여. 산과 바다와 말조차 잃어버린 백성. 하늘 향해 주먹 쥐고 찢어진 산하에 피 토하는 조선 아아,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한 조선 조선의 숨결아! <1991년 11월 19일>


싸울 것과 지킬것-전진호 선생님께 배운 것들

이은실

나는 전선생님올 미주민족문화예술인협의회 (민문예협) 에서 알게 했고 동네신문 「발광」지를 편집하면서 자주 만나 친숙하게 됐었다.

L.A. 에서 작가다운 얀목과 실력을 가진 분을 만난 반가융도 컸지만 다른 예술분0뼈 대한 끊임없는, 열정적 호기섬을 가진 사랍을 알게 된 즐거움도 매우 컸다.

L.A.카운티 뮤지엄에서 멕시코작가전이 열렸을 때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을 보고 “한국의 민중미술한다는 작가들이 이런 상상력과 테크닉을 배워야 한다”며 책을 사서 한국에 보내고, 중국 장예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 「주도」를 보고 “운동권 영화가 데모하는 거나 찍는 데서 탈피하려면 이런 영화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몇번이나 말했던가.

「발광」지에 쓴 그의 글들을 보면 눈물이란 단어가 꼭 나온다. 전선생님올 모르고 신문만 받아보던 어떤 정신과의사는 황지강(전진호님의 훨명)이란 사랍이 여자인 줄 알았다고 말해서 웃었던 적이 있다.

희한과 슬픔, 그리고 자기다짐으로 일관된 그의 마지막 여러 글들을 보면, 프로파캔더로 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운동권 문학이 본질적으로 전진호 개인의 생리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으며, 바로 그 정치 희생자의 한 사랍으로서의 고발과 울분은 미국에서 거의 자기학대적인 노동과 그로언한 시간 뺏김의 절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희한과 슬픔, 그리고 자기다짐으로 일관된 그의 마지막 여러 글들을 보면, 프로파갠더로 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운동권 문학이 본질적으로 전진호 개인의 생리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으며, 바로 그 정치 희상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고발과 울분은 미국에서 거의 자기학대적인 노동과 그로인한 시간 뺏김의 절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울고있는 작가 황지강씨의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도 문학에서도 극복되어야만 하는 살아남은 후배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짧은 머리에 맨발, 아무렇게나 걸친 낡은 옷에 늘 가난한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어떤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게 처음엔 몹시 못마땅하고 궁금했으나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바로 그 초라한 모습은 그가 싸울것과 지키고 간수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알고 그것을 계속 실행해 나가는 바로 그 점이 진선생님을 떳덧하게 하고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였다. 그는 한번도 작가적 양심에 대해 떠든 적이 없지만 바로 그렇게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 실천적 삶은 전선생님의 민족운동가적인 삶으로 나타났다. 그는 1975년 도미 이래의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1983년 민족학교를 세워 교장의 일을 맡으면서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의 재정립, 보급에 힘써왔을 뿐더라 민족운동에도 직접 뛰어든 걸로 알고있다.

이제 그는 다시 대지의 품안에 안기었고 남은 우리들이 할 일은 전진호 선생을 영웅화하는 게 아니라 그 분이 말없이 보여주었던 지켜야 할 것을 이어받아 우리도 소중히 지키는 일인 것이다.



어느 택시기사의 하루

생활속의 글

아파트 방세 마련과 먼 훗날 어렬 때부터 동경했던 중앙아시아의 어떤 형화스러운 마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여유있는 생활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태시운전사인 냐는 오늘도 쏟살같이 달려 나간다. 회사에서 알려준 주소로 보아 어떤 노인일 거라는 짐작은 간다- 거기는 우리 동포 노인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였기에 .....

‘오늘도 병원이나 마켓좀 가는 노인이시겠지 " 생각하며 다가간다. 그런데 오늘 이 할머니는 밤새 고민을 했는지 뭔가 착잡한 모습이다. 수심 가득한 얼굴에 불현듯 조국의 훌로 계신 어머니 모습이 겹쳐 보인다. 어느 아과트로 가자는 말씀에 그 곳에 도착하나 이번엔 분노와 절망으로 뒤덮인 얼굴에 화장기도 전혀 없는 행한 모습의 30대 여인이 아파트 계단에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다. 나는 보통때처럼 시집간 딸이 부부싸움을 한 것 아니면 장가 간 아들이 부부싸움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는 투를 보니 며느리인 듯싶다. 나는 그 며느리까지 함께 태워 할머니가 이르는 다음 목적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 라는 도박장! 지난 일들이 생각난다. 전형적인 우리네 어머니들이 아들과 딸을 찾아 도박장 안팎을 드나들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내 심정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던 경우를 ..... 오늘도 비슷한 경우가 된 것이다. 내가 이 일을 하는 몇해 동안 그런 일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으며 속상해했던가?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차를 안전하게 빨리 몰아서 그곳에서나마 남편과 아들을 찾기 바라는 것뿐이다.

뒷거울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모습을 볼까 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로 민망해질 것 같아 끝까지 참기로 했다. 도착하니 며느리가 말문을 연다. 주차장부터 뒤져보자고. 차가 없으면 안에도 없을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혜나 큰 주차장인데 아침부터 만원이다. 차를 찾으려는 두 사람의 눈길은 무쇠라도 뚫을 것 같다. 한 바퀴를 돌았다. 두 바퀴까지 돌고 나자 두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다른 “나” 도박장으로 가는 동안에 며느리는 분노를 토혜내고, 할머니는 그래도 그 녀석이 섬성은 착하다며 아들을 두둔한다. “나” 도박장도 두바퀴를 돌았다. 그곳에서도 아들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또 다른 도박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곳애서도 아들을 찾지 못하고 두 사람은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사연인즉,그토록 착하게 외아들로 자라온 사람이(할머니 말에 의하면) 4-5년전 부터 도박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울며 불며 호소도 했고, 위협도 했고,하다 못해 빚을 내서 해볼 때까지 해보라고 대주기도 했단다. 아들도 나름대로 맹세도 하고. 교회를 다녀 보기도 하면서 노력을 한 모양이다. 도박 때문에 직장에서도 쫓겨났는데 어제가 모처럼만에 참은 아들 직장의 첫 월급날이었다. 이 사실을 안 며느리가 남편의 도박을 막기 위해 태시를 타고 직장 문에 도착한 것은 그가 어디론가 사라진 지 10분 후였다.

차는 할 수없이 한인타운으로 향한다. 이유고 몸까지 아픈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며느리가 원망을 터트련다. 결혼할 때 친정에서 어렵게 가져온 돈도 다 써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친정돈까지 빌려 오게 해 도박에 써버린데다 남편은 직장도 없이 아내가 봉제공장을 다녀 벌어옹 돈까지 탕진하기에 이르렀단다. 아내는 생계가 어려워 무리하게 일을 하다보니 이제 옴까지 망쳐 일을 못 나간단다. 그 아내의 업에서 급기야 ‘이렇게 애를 태우는 인간이라면, 누군가를 시켜서 살인이라도 해야겠다’는 극언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그래도 아들을 두둔하던 활머니는 말을 앓었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조국에서 생각하던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인가? 분명 동포사회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고,우리는 그것을 풀어낼 과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집에 도착하자 며느리는 남편이 들어오면 칼이라도 들어 찍을 것 같으니 자기와 함께 었자고 시어머니한테 사정하듯 말한다. 시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하고 용어리가 터져나오는지, 옹몸이 아과오는지,북받쳐 오른 한숨만 쉬며 집으로 향했다.


단체탐방

나성한인문화패 "한누리"

기자는 2530 1/2 크렌셔에 위치 한 「한누리 」사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들어서자 마자 장고,북 등 사물놀이 악기와 벽에 걸려있는 하회탈이 한 눈에 들어와 여기가 문화단체 사무실임을 실감케 했다. 대표 김준씨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므면서, 먼저 「한누리」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물어 보았다.

“한누리는 몇해 전부터 우리 문화에 관심올 가진 몇몇 동포 청 년들이 꾸준히 활동을 해오다 동 포사회에 올바른 우리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또한 많은 동포청년들과 함께 폭넓 게 활동하고자 1992년 12월에 공식적으로 나성한인문화 때 「한누리」란 이름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우리의 건강한 문화와는 점점 멀어져가는 지금의 이민사회에서 생각있는 동포 청년들이 만들어낸 「한누리」는 참으로 반가운 존재인 것 같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저회는 다양한 우리 전통문화 를 창조적으로 계숭하여 보급하고자 첫째로는,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공동체 문화를 이곳에 정착시킴으로써 보다 풍요로운 동포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는,우리 조국의 건강한 문화를 보급 함으로써 이곳 1.5세,2세들이 우리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셋째로는,미국내 소수민족으로서 타민족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여 소수 민족간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합니다. 넷째로는,우리 조국의 참된 민주화와 통일,평화정착의 길에 작은 힘이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 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누리는 욕심(?)이 많은 것같다. 이러한 욕심들을 충족시키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창립 후 「한누리」는 자신 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한누리」가 만들어진 이후에 조국의 건강한 노래문화를 동포사 회에 소개하는 차원에서 1993년1월 가수 안치환씨를 초청하여 노래공 연올 열었습니다 그리고 L.A시가 주최한 LA WORKS, 와츠 보건재 단에서 주최한 아태축제의 날 기념행사 등에 초청되어 사물놀이 등을 공연하여 타민족에게 우리문화를 소개하기도 하고 또한 타민 족파 연대행사도 했습니다. 또한 지난 5월에 5 •18 광주민중항쟁 제 13주년 기념식」에서 시, 노래 와 함께 슬라이드를 상영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약 한 달간에 걸쳐 ‘제 1 회 한누리 여름문화교실’올 개최하여 동포청년들에게 뿌리의식올 심어주고, 동포사회에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정착하기 위한데 대하여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려하는 일에 대한 욕심이 큰 것 만큼,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많은 활동을 한 것 같다, 그 중에서 동포청년들이 직접 참여했다는 ‘여름문화교실’이 흥미로웠다. ‘여름문화교실’에 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 처음 개최한 ‘여름문화교실’은 이민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우리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름문화 교실’에서는 우리 민족문화,풍물,탈춤,민요,공동체 문화에 판하여 함께 고민하고,토론할 수 있는 자리와 또한 이민생활 속에서 앞으로 우리의 문화들올 어떻게 계승,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토론하 는 이야기 마당올 마련했었습니다 실기마당으로는 풍물의 기본장단, 탈춤, 민요를 직접 배우면서 함께 풍물진도 짜보고 탈춤도 추는 자 리를 마련했었습니다. 앞으로 매년 이와같은 사업을 할 계획입니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동포청년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실재로 춤과 장단 등을 익히기도 하는 모습이 어떠했을지 또 주로 어떤 청년들이 참여했는지 궁금했다.

“이번엔 주로 30세 미만에서 고둥학생까지 참여를 했었습니다. 우리 문화를 배우는데 있어서는 참가자 전원이 열과 성의를 가지고 열심히 하더군요. 진지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한 달간의 강습기간이 끝난 후에도 친구들을 데려와서 우리문화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계속적으로 우리 문화를 배우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는데 대해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활동해야겠 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자리를 벌어 이번에 참여한 1기생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옆에서 저희들을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 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한누리」에 관심을 가 지고 참여할 분들을 위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얘기해 달라고 했다.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고 저희 활동목적에 뜻을 같이 하는 분이 라면 언제나 환영합니다. 우리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함께 하고자 하는 분, 저희들을 후원해 줄 분, 저희 활동에 직접 참여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격려와 조언올 아끼지 않는 분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누리」의 연락처와 다짐을 들어 보았다

「한누리」는 앞에서도 말씀드 렸듯이 이민생활 속에서 접하기 어려운 우리의 올바른 조국 문화를 소개하고,함께 올바르게 계숭 발전시켜 미국내 소수민족으로서 1.5세, 2세들이 우리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며 동 포사회에 건강한 공동체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겠 습니다. 저희들의 연락처는 전화 (213) 737-5220 입니다.

이야기롤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한누리」라는 이름 그대로 각박하고 단조로운 미국땅에서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문화,“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문화”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동포사회의 미래가 밝아 보였다.


알아두면 편리한 이민생활정보

소액청구소송 (Small Claims Trial)

[더불어 사는 뿌리]는 앞으로 이민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생활정보 를 독자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이번호 주제는 줄캘철j칸승쏠이다‘ 소액청구소송은 소액청구법원(Small Claims Court)에서 하는데,이 법원은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분쟁에 대해 그 분쟁을 쉽게 해결하고 각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법원의 한 종류이다. 소액 청구법원은 $5,000 이하의 민사소송을 다루고 있으며 만 18세 이상에 한해 이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소액청구법원에서는 소송 당사자가 변호사없이 직접 재판에 참여한다. 그럼 소액청구소송에 대해 간략히 알아본다.

가)소송이 될 수 있는 사례 (1) 계약에 관한 법적 시비 (2) 임대자와 입주자 사이의 법적 시비 (3) 소비자의 법적 시비 (4) 재산피해에 관한 법적 시비 등

나) 소송비용 (1) L.A. 카운티 법원의 경우 -소송청구서 (Plaintiff's Claim and Order to Defendant) 제출비: $24 정도 -재판통지서류 전달료 (소송청구서를 당사자가 직접 전달할 수 없음) 법원 보안관 (Marshall)을 이용할 경우: $21 정도 전문서류전달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40 정도 (옐로 페이지의 Process Serving을 찾아보십시오.)

다) 소송전 준비 (1) 소송 상대방에게 타협할 기회를 준다. (2) 상대방의 정확한 법적 이름과 주소를 확인한 후 소송액수 ($5,000 이하에 한함)를 측정한다. (3) 소송청구법원을 정하고 법원에 찾아가 소송청구서류를 작성한후 청구비용과 함께 제출한다. (4) 피고에게 청구서류 전달: 같은 카운티에 살면 재판 날짜 최소 10일전, 다른 카운티에 살면 최소 15일전에 통고

라) 재판 (1) 재판전: 증인 및 증거물을 준비 (2) 재판당일 -재판소에 도창하면 즉시, 법우너서기 (Court Clerk)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린다. -재판진행 절차 1) 원고가 자신의 소송내용을 설명하고 증인과 증거물을 제시한다. 2) 피고가 자신을 변호한다. 3) 다시 원고가 응답한다. 4) 판사가 판결한다. (우편으로 판결 결과를 통고 -Notice of Entry of Judgement- 하는 경우도 있음)

마) 항소 (1) 판결후 20일 안에 소액청구법원 서기관을 통해 신청료와 함께 항소한다.

바) 소액청구문제에 대한 전화안내 (L.A. 카운티 법원의 경우) (1) 소액청구자문 프로그램: (213) 974-9759 (2) 소액청구중재 프로그램: (213) 974-0825 (3) 마셜 사무실 이용 번호: (213) 974-6311

1996

더불어 사는 뿌리
제3호
한글
53 장
  • 시: 뿌리의 노래 - 최용탁
  • 인사말: 당당히 살기 위해서 = 김만평
  • 화보: 새해맞이 및 병자년 정원대보름맞이 지신밟기
  • 정만수 이주영 장학금: 수상 소감 에세이 - 윤명주, 홍성철
    • 정만수-이주영 장학금 수여식 - 이용오 장학위원
    • 코리안 커뮤니티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발전상 - 윤명주
    • 장학금 수상 소감 - 홍성철
  • 반이민 공세와 한인 커뮤니티 - 편집부
  • 미국내 반이민 공세의 역사적 배경 - 다까께
  • 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 편집부
  • 교육실천수기: 자랑스런 코메리칸으로 키우기 위하여 - 유정순
  • 발술 현대사인물: 박용만 선생에 대하여
  • 교양강좌: 라티노 이민사 - 산체스
  • 5분 컴퓨터: 초고속 정보통신망 - 장동인
  • 청년여름학교: 우리의 삶보다 빛나는 문학은 없다 - 문학교실 참가자 일동
  • 시사: 12.12, 5.18 공판과 역사바로세우기 - 김갑송
  • 생활 문화: 기행문: 그랜드 캐년과 자이언 캐년을 다녀와서 - 최건호
  • 노래 소개: 이 땅에 살기 위하여 - 한누리
  • 재미있는 민속놀이: 윷놀이 - 한누리
  • 건강하게 삽시다: 마늘 - 편집부
  • 좋은 책 소개 - 편집부

P.10

반이민 공세와 한인 커뮤니티

재미동포사회의 생존을 위협했던 웰페어 개정안에 클린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또한 가족 이민를 제한하려 한 합법이민관련 조항이 최근 상·하원의 이민제한법에서 분리·삭제되었다. 그러나 미국내의 반이민 공세가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올 11월 선거를 앞두고 이민과 소수민족의 권리문제 는 미국선거의 가장 큰 이슈 중의 하나로 부각되어 있다.11월 선거를 문기점으로 더 큰 반이민 파고가 몰려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본다. 과연 이민 선풍은 갑자기 생겨난 것인가, 이민자는 미국의 재정적화 악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가, 재미동포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편집부에서는 민족학교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가 펼친 반이민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점검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함께 고민해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반이민 공세와 한인 커뮤니티의 대응 -LA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족학교와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활동일지-

1994년

9월 18일- 주민발의안 187 공개토론회 공동주최: 나성한국청년연합, 민족학교 장소: Local 770 노조회관

9월 20일- 유권자 등록활동 및 발의안 187의 악영향에 관한 교육활동 기간: 9월20일- 10월11일

9월 30일-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 협의회 (NAKASEC) 결성 참가단체: 나성 민족학교, 뉴욕 청년학교, 북가주 민족교육봉사원,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필라델피아 청년마당집 활동목표: 1. 뿌리교육을 중심으로 한 민족교육사업 2. 민족문화 보급, 계승 및 발전을 위한 문화사업.

P.11

3. 미국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시민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 홍보사업 4. 재미동포사회의 권익옹호, 권리신장을 위한 교육, 홍보사업 5. 노인, 청소년, 여성, 2세들을 위한 교육, 홍보사업 6. 타민족 커뮤니타와 이해 증진, 우호 증진, 협력 강화를 위한 연대, 교류사업 7. 타지역 해외동포사회와의 교류, 연대사업 8. 조국의 교육, 문화, 부문과의 교류, 연대사업

10월 11일- 유권자 등록 마감

10월 16일- “주민발의안 187” 반대 시위 주최: 발의안 187 저지를 위한 나성지역 조직 위원회 장소: LA 다운타운 참가자: 약 7만명

10월 30일- Phone Banking 기간: 10월30일-11월7일

11월 5일- “주민발의안 187” 반대 거리 홍보전

11월 8일- 선거결과 “주민발의안 187” 통과 (찬성 59%, 반대 41%) 공화당: 연방상원 100석 중 53석, 연방하원 435석 중 230석을 차지함

1995년

3월- 하원에서 웰페어 개정안 통과 (공과당 ‘미국과의 계약’ 중 하나)

6월- 상원 재무위원회 웰페어 개정안 통과

6월 21- 반이민법 저지를 위한 워싱톤 포스트 광고 전국 캠페인 기간: 6월21일-7월12일

워싱통 포스트 전면광고 게재 (7월 30일) -광고원본 백악관과 상/하원의원 521명에게 전달 -당시 미 연방상원은 여름휴가를 연기하고 웰페어 개정안 하나만을 의제로 격동하고 있었음 -참가단체 및 개인: 총 46개 단체 및 수백명의 개인 (전국: 총 315개 단체 및 수천명의 개인) -모금액: 1만7천여불 (전국: 5만1천여불, 목표액 2배 초과) -초고 모금액으로 적절한 시기에 2차 광고 게재 하기로 결정

8월 3일: 박서 상원의원 사무실 방문

8월 9일: 파인스타인 상원의원 사무실 방문

8월 25일: 웰페어 수정안 추진을 위한 파인스타인 상원의원 대상 편지쓰기 운동 -기간: 8월25일-9월5일 (개인의 사연을 담은 편지 200여통을 번역하여 발송) 성과: 파인스타인 상원의원 9월 초 수정안 상정

9월 4일: 이민자 권익옹호 아시아 커뮤니티 시위 -주최: API-FIRE (민족학교를 비롯한 아시안 커뮤니티 단체들의 협의체) 장소: 차이나 타운 참가자: 700여명

9월5일: 미국 연방의회 속개

9월5일: 전국 팩스/편지 보내기 운동 -대상: 밥 돌 상원의원, 윌리엄 로스 상원의원 -기간: 9월5일-9월19일 (나성 500여통)

9월11일: 전국로비데이 활동 -기간: 9월11일-9월12일 -내용: 전국 20여개 주에서 300여 명의 단체대표, 지역대표 참여

   나성지역 한인대표: 민족학교 주관
   전국 한인대표: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NAKASEC) 주관

9월11일: 워싱톤 포스트 제2차 전면광고 게재 -상원 9월 11일부터 웰페어 개정안에 관한 본격적 논의 재개 -상원 의사 일정과 전국로비데이 활동에 맞추어 제2차 광고 게재

9월19일: 웰페어 개정안 상원안 통과 (찬성 87표, 반대 12표)

10월 17일: 백안관 정책보좌관과 캠페인 참가단체와의 전화회의 -영주권자에 대한 사회보장혜택 제한을 반대한다는 백악관의 공식입장을 발표

10월 18일: 백악관, 조정위원회에 웰페어 개정안에 관한 백악관의 공식 입장을 전달하는 서한 발송

10월 26일: 조정위원회 대상 전국 팩스 보내기 운동 -기간: 10월 26일 - 11월 16일 (나성: 1500여통 / 전국: 6000여통)

11월 6일: 연방정부청사 앞 촛불시위 -주최: 민족학교, L.A. County Community & Senior Services API-FIRE 등 -장소: 다운타운 연방청사 앞 -참가자: 300여명

11월 16일: 웰페어 개정안 최종 철충안 공식발표 -이민출신 시민권자에 대한 차별조항 삭제 -영주권자 학생의 대학 학자의 보조 프로그램 보호


11월 20일: 밥 돌 LA 방문 긴급 규탄시위 -장소: 베버리 힐스 호텔 -참가자: 50여명

11월 28일: 웰페어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비토 촉구 전국 캠페인 -기간: 11월 29일 - 12월 (나성: 2000여통)

12월 21일: 웰페어 개정안 최종 절충안 하원통과 (찬성 245표, 반대 178표)

12월 22일: 웰페어 개정안 최종 절충안 상원통과 (찬성 52표, 반대 47표)


1996년

1월 9일: 클린턴 대통령 웰페어 개정안 최종 절충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

2월 28일: 이민제한법안에 대한 전국로비데이 활동 기간: 2월28일-3월1일 전국규모의 한인단체로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NAKASEC) 공동 주최

3월 11일: 이민제한법 저지를 위한 의회 대상 편지보내기 운동 대상: 파인스타인 상원의원 기간: 3월 11일-3월17일 (380여통)

3월14일: 상원 법사위, 합법이민과 불법이민을 분리 심의할 것을 결정 (찬성 12표, 반대 6표)

3월 21일: 하원 이민법 통과 (찬성 337표, 반대 87표) -합법이민관련 조항 분리/삭제

성명서

"클린톤 대통령의 웰페어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환영합니다!"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National Korean American Service & Education Consortium (NAKASEC)

1996년 1월 9일 클린톤 미국대통령은 웰페어 개정안 최종 절충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여러 소수민족 커뮤니티의 우려 속에 추진되었던 웰페어 개정안은 일단락이 지어지게 됐고, 따라서 영주권자의 SSI 수혜중단 등 웰페어 개정안에 포함되었던 반이민 조항들도 일단은 무산된 것입니다. 저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 (미교협) 에서는 클린톤 대통령의 비토권 행사를 적극 환영하면서 새해 벽두에 찾아온 희소식을 백만 재미동포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클린톤 행정부는 SSI 수혜에 있어서 영주권자에 대한 차별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즉 영주권자의 SSI 혜택을 현행법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여 이민 커뮤니티의 권익옹호에 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동안 타민족 커뮤니티와 함께 이민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에 반대 하면서 대통령 대상 웰페어 개정안 비토 촉구 캠페인을 벌여온 미교협은 늦은 감이 있으나 정의와 이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준 클린톤 대통령께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또한 그동안 아낌없는 지지 성원을 보내주시고 반이민법 저지 전국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주신 수많은 동포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백만 재미동포 여러분! 지난해 초 캘리포니아 주민발의안 187 통과후 영주권자 SSI 수혜중단 이민제한법 등 각종 반이민 법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때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당시 우리는 당혹감,배신감,절망감을 딛 고 워싱톤 포스트 전면광고 캠페인으로 시작하여 상•하원 대상 편지보내기 운동,각 지역에서의 대규 -모 연합시위, 상-하원‘조정위원회 대상 전국 팩스보내기 캠페인,대통령 대상 비토 캠페인 등 이민 커뮤니티의 권익옹호를 위한 활동을 타민족 커뮤니티와 함께 꾸준히 펼쳐왔습니다,우리 노력이 그 결실을 맺었는지 지난해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민자에 대한 차별의 부당성 문제가 전국적 차원의 사회이슈로 부각되고, 상 하원 조정위원회에서 이민출신 시민권자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고 메디케이드와 대학 학자금 보조가 유지 되었으며 이제 클린톤 대통령도 영주권자에 대한 SSI 혜택중단을 반대 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웰페어 개정안을 비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저희는 이제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 신장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이제 웰페어 개정안은 현 미국정계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연방균형예산안의 틀 속에서 논의가 계속될 것이며, 이민자 관련부분도 이 테두리 내에서 궁극적으로 타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공화당 주도 의회와 민주당 대통령의 연방균형예산안 관련 정책대결이 양보의 기미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웰페어 개정안 문제는 상당히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저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에서는 그동안의 반이민법 저지 캠페인을 일단락 짓고 다음 단계의 대처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동포여러분! 우리 할일이 이제 모두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웰페어 개정안도, 각종 반이민 법안도, 전반적인 반이민 공세도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클린톤 대통령의 입장이 상황에 따라 또 바꾸어 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근래 미대륙에 강하게 몰아치고 있는 반이민 공세는 웰페어 개정안 등 법안 측면에서만 대응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저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에서는 지난 해의 반이민법 저지 전국 캠페인을 동포사회 권익옹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 소박한 시작으로 생각하고 밝은 미주동포사회의 앞날을 위하여 계속 연구하고 실천하려 합니다. 동포여러분의 변함없는 지지,성원,참여를 부탁드리면서 다시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미국내 반이민 공세의 역사적 배경

로날드 타카키 (버클리대 인종학 교수)

“187 법안”의 입법화 과정을 통해 이민자들에게 여실히 증명되었던 미국내 반이민 추세는 반이민 감정이 주기적으로 나타나곤 했던 캘리포니아의 과거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미국내 반이민 소동은 지난 1 년사이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며, 그 이유 또한 법치국가의 법적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도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이 글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특히 1840년대를 시작으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거 센 돌풍처럼 몰아쳤던 반이민 소동은 인종차별과 경기불안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으킨 사회, 경제,정치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백 오십여 년에 걸쳐 사회 전반에 노출되었던 사례를 소개하 면서 미국내 반이민 추세의 역사를 더듬어 볼까 한다.

캘리포니아에 소위 ‘이방인’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1840년대 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방인들은 여러 형태로 이곳, 캘리포니 아로 오게 되었는데,그중 일부는 약 2만명의 중국 인들로써,포티나이너즈(금광을 찾아 1849년에 캘리 포니아로 모여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의 한 무리로써 금광을 찾아 이곳에 모여들었고,또 한 부류 는 새크라멘토 삼각주에 관개수로용 둑과 수로를 짓기 위해,또 일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공장 지대에 서 일하기 위해,또는 대륙횡단 철도 건설장의 노동자로서 캘리포니아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렇게 오게 된 중국인 노동자들은 다른 민족 노동자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경제를 근대화 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이 중국인 노동자들은 후에 명성이 자자하게 된 두 명문대학의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갑부인 릴란드 스탠포드씨가 운영했던 센트럴 퍼시 픽 철도회사 노무자의 90%가 중국인 이민자들이라 는 사실과 이 회사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스탠포드씨가 자기 이름을 딴 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스탠포드 대학 설립의 뒤안길에는 중국인 이민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방인 광부세’라고 하는 차별적인 세금으로 인해 중국인 광부들은 캘리포니아 주정부 재정의 50%까지를 담당하게 될 정도로 부당하게 많은 세금을 갈취당했는데,이 세금으로 마련된 기금으로 UC 버클리 대학이 1868년에 설립되었다 이제 웰페어 개정안은 현 미국정계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연방균형예산안의 툴 속에서 논의가 계속될 것이며, 이민자 관련부분도 이 테두리 내에서 궁극적으로 타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공 화당 주도 의회와 민주당 대통령의 연방균형예산안 관련 정책대결이 양보의 기미없이 팽팽하게 맞서 고 있는 상황에서 웰페어 개정안 문제는 상당히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저희 미주한인 봉사교육단체협의회에서는 그동안의 반이민법 저지 캠페인을 일단락 짓고 다음 단계의 대처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1998

1998년 10월

한/영
8장
  • 이사장 최진환 인사의 말
  • 활동보고
    • 선거
      • 책자
      • 유권자 등록
    • 신임 윤대중 사무국장 선임
    • 청년, 2세 여름학교 개최
    • 일일찻집
  • 영주권자 푸드스탬프 복원
  • 민족학교 활동 계획
  • 98년 선거와 코리안아메리칸 커뮤니티

1998년 마무리

4장
한글
  • 인사말
  • 이렇게 일해왔습니다.
    • 이민자옹호 컨퍼런스
    • 지신밟기 수익금 NCAPA 에 전달
    • 웰페어 강습회
    • 제3회 이민자의 날
    • 주민발의안 227번
    • 영주권자 푸드스탬프 복원
  • 이렇게 일하겠습니다.
    • 2000년 센서스 참여
    • Affirmative Action
    • 이중언어교육권리
    • 98년 11월 선거 참여
    • 부당한 시민권 관련 법안 대응
    • 이민자 정치참여 보장촉구
    • 반아시안 폭력 대처활동

Annual Report

1999

1월

민족학교 소식지
1999-1
8장
bilingual
  • 사무국장 윤대중 인사의 말
  • 선거교육프로젝트
    • 선거안내 설명회
    • 선거안내 전화 개ㅓㄹ
    • 98 남가주 캘리포니아 코리안 커뮤니티 출구조사
  • 이민자 권익 옹호 프로젝트
    • 캘리포니아주 이민자 재정지원프로그램 실시
    • 거주자 권익활동
  • HFP
  • 1998년 11월 선거 출구조사
  • 1999년 상반기 민족학교 신설 프로그램
    • 교육: 어린이 뿌리교실, 청장년대상 우리말 교실, 청년대상 역사교실
    • 문화: 청년풍물교실
    • 봉사: HFP, 세금보고
  • 민족학교 일꾼을 찾습니다.

3월 (3호)

민족학교 소식지
1999-3
3호
bilingual
8장
  • 유권자교육
  • 이민자권익
    • CAPI
  • 봉사
    • 세금보고 및 HFP
  • 문화
    • 기묘년 지신밟기
  • 교육
    • 어린이 뿌리교실
  • 재미동포사회의 뿌리교육
  • 1999년 봄 새로 시작하는 민족학교 프로그램
    • 교육: 역사, 사회, 어린이뿌리, 문화교육통신
  • 봉사: HFP
  • 유권자교육: 출구조사 자원봉사자 모집, 유권자
  • 이민자
  • 문화: 장년, 청년
  • 활동 보고 http://krcla.org/news/132/
  • 재미동포사회의 뿌리교육 http://krcla.org/news/133/
  • 1999년 봄 새로 시작하는 민족학교 프로그램 http://krcla.org/news/134/

5월 (4호)

민족학교 소식지
1999-5-15
제 4호
8장
Bilingual
  • 교육활동
    • 어린이뿌리학교 2학기 개강
    • 근현대사 청년 역사교실
  • 유권자교육 프로젝트
    • 로스엔젤레스시 예비선거 대응활동
  • 이민자 권익옹호 프로젝트
    • 메디칼 수혜금 지불 환불
  • 봉사활동
    • 제8회 세금보고
  • 출구조사 결과보고
  • 이민자 권익 옹호를 위한 제4회 이민자의 날 로비데이
  • 1999년 여름에 시작하는 민족학교 프로그램
    • 겨육: 99 여름청년학교
    • 유권자교육
    • 이민자권익옹호
    • 문화: 청년풍물교실
    • 봉사: 청소년 건강보험
  • 미교협 설립 5주년 기념 만찬: 민권운동의 새 시대를 열며...
민족학교 소식지
1999-12-1
Vol 1 No 5
8장
Bilingual
  • 교육 활동
    • 99 청년여름학교
  •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
  • 이민자 권익 옹호 프로젝트
    • '이민자의 날' 로비데이 참가
    • 캐피법안 통과를 위한 주지사 사무실 방문
    • 복원 '96 전국 이민자 권익 옹호 캠페인
    • 중부지역 혐오범죄 희생자 추모행사
    • 혐오범죄 책자 배포
    • 2000년 센서스 교육 홍보 활동
  • 혐오범죄와 동포사회
  • Upcoming Events & Programs
  • 민족학교에서는 여러분의 참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0

2000-4-15

민족학교 소식지 KRC Newsletter
2000-04-15
Vol 2 No 1
8장
Bilingual
  • 교육 활동 Education
    • 정만수 이주영 장학금 Chung & Lee Scholarship
    • 사회교실 Social Issues
    • 어린이 뿌리학교 Saturday Roots Program
  •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
    • 미연방 행정선거제도 안내책자 투표2000!
    • 캘리포니아주 예비선거 대응활동
    • 출구조사 결과보고
  • 센서스 2000 프로젝트
    • 센서스 신문 발간
    • 센서스 2000 교양강좌
    • 센서스 보조센터 (QAC) 운영
  • 봉사활동
    • 세금보고
  • 문화활동
    • 지신밟기
  • 이민자 권익옹호 전면 캠페인
  • Upcoming Events & Programs
  • 도서 구입 목록

2000-7-15

  • 민족학교 소식지
Vol2 No 2
한/영
8장
  • 교육활동
    • 어린이 뿌리학교
    • 2000 청년 여름학교
  • 권익옹호
    • 이민자의 날 행사
    • 이민자 권익 15,000 서명
  • 연대활동 AFL-CIO IW Town Hall
    • Good Samaritan Hospital
    • 지역주민회
    • 청소노조
  • 로스앤젤레스 주민의회
  • Upcoming Events & Programs
  • 한인사회의 참된 일꾼을 찾습니다.

2001

2001-2

민족학교 소식지

2001-02-05
8장
한/영
  • 인사말
  • 교육활동
    • 민족교육
    • 소수민족교육
    • 시민사회교육
    • 청년우리말교실
    • 시사영어교실
    • 뿌리교육
    • 컴퓨터교실
    • 생선오염
  • 봉사활동
    • 세금보고
    • 이중언어서비스
    • HFP
    • 주택보조신청
    • Public benefits
    • 노인봉사
    • 이민업무 봉사
    • 일반봉사
  • 권익옹호
    • 참여21
    • 가주복지
    • LA 선거
    • 선거구재조정
    • 직업 & 보건의료
    • 주민의회
    • 혐오범죄
    • 주택권리
  • 문화활동
    • 해맞이
    • 지신밟기
    • 강습
    • 공연
  •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 개봉박두: 민족학교 웹사이


2002

2002 민족학교

2장
영/한
  • 활동 소개
  • 교육 활동
    • 민족교육
    • 소수민족교육
    • 시민사회교육
    • 청년우리말교실
    • 시사영어교실
    • 뿌리교육
    • 컴퓨터교실
    • 팔로스버디스
    • 방과후 교육
  • 봉사
    • 세금보고
    • 이중언어서비스
    • HFP
    • 공공복지혜택
    • 노인봉사
    • 이민업무
    • 일반
    • 법률
    • 노인국 출장상담
  • 권익옹호
    • 참여21
    • 가주복지
    • 주선거
    • 선거구 재조정
    • 직업&보건의료
    • 주민의회
    • 혐오범죄
    • 보건권리
  • 문화활동
    • 해맞이
    • 지신밟기
    • 강습활동
    • 공연활동
  •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0

2002년6월

  • 소식 민족학교
2장
한글
  • 이민자도 인간이다! 공공의료 및 복지혜택 개선 촉구
  • 서류미비자도 학비 혜택 가능
  • 의료보험 선택
  • 뿌리학교 졸업식
  • 자원활동가를 공개수배합니다!
  • 무료 세금보고 사상 최고
  • KIWA 연대상 수상
  • 산이 좋아.. 산으로 가자
  • 뿌리학교 신입생 ㅁ집
  • 100만달러를 지켜라
  • 새로운 인턴이 오다 (김태현, 장승원, 최종환)
  • 우리도 뛴다
  • 까페를 오픈했습니다
  • 약속상

2002-11

민족학교 소식지 KRC Newsletter
Nov 2002
4장
  • 교육활동
    • 방과후 교실 프로그램
    • 뿌리학교
    • 정만수-이주영 장학금 수여식
    • 컴퓨터 교실
    • 유권자 교육
    • 새식구 Steve Ryu
    • 인터넷 카페 개설
    • 팔로스 버디스 화학요염 캠페인
  • 봉사활동
    • 의료보험 선택 교육 및 홍봉
    • 세금보고
    • 법률 상담
    • 노인국 출장 상담
    • 저소득층 공공 복지혜택
    • HFP 및 메디칼
    • EDD
    • 2002년 봉사활동 통계자료
  • 문화활동
    • 강습
    • 해맞이 및 지신밟기
  • 권익옹호
    • 이민자의 날
    • 서류미비자 운전면허증 AB 60
    • AB540
    • DREAM Act
    • 서류미비자 사면 100만 엽서
  • 한인사회의 참된 일꾼을 찾습니다

2003

Vol 4 no 1

민족학교 소식지

한/영
2003-4-15
  • 서류미비자 사면안
    • 드림액트
  • 주의회 캠페인
    • 불체자 운전면허증
    • 시사영어
    • 뿌리학교
  • 교육
    • 민족교육
    • 소수민족교육
    • 시민사회교육
    • 청년우리말교실
    • 시사영어교실
    • 뿌리교육
    • 팔로스버디스
    • 방과후교육
  • 봉사
    • 저소득세금보고
    • HFP
    • 저소득층 공공복지혜택
    • 노인봉사
    • 이민업무 봉사
    • 법률상담8
    • 노인국 출장상담
    • 일반봉사
  • 권익옹호
    • 참여21
    • 가주복지
    • 로스앤젤레스
    • 직업
    • 혐오범죄
    • 보건 권리
    • DREAM Act
  • Health Access
  • 2003년 민족학교 프로그램
    • DREAm Act 캠페인
    • 세크라멘토 이민자의 날
    • 로스앤젤레스
  • 자원봉사자를 찾습니다
  • 문화활동
    • 해맞이
    • 지신밟기
    • 강습
    • 공연

2004

Jan-June 2004

민족학교 소식지

8장
bilingual
  • 교육활동
    • 제5회 토요뿌리학교
    • 오염생선
  • 선거교육
  • 일반 봉사
    • 세금보고
    • public programs
  • 건강의날
  • 권익옹호 활동
    • 복지예산 삭감안
    • 드림법안
    • 서류미비학생
    • 이민자의 날
  • 문화활동
  • 감사의 말
  • 도와주신분
  • Please, Pass the DREAm Act

June-December 2004

민족학교 소식지

bilingual
8장
  • 선거 활동
    • 유권자 등록
    • 선거 책자
    • 핫라인
    • 2004년 대선 출구조사
  • 이민자 권익
    • 드림법안 촉구 단식
    • 기습 단속
    • 이민 세미나
    • 혐오범죄
  • 교육 활동
    • 서머 임파워먼트
    • 오여생선
  • 의료 권익
    • 건강의 날
    • 의료 상담 및 트레이닝
  • 문화활동
  • 새로운 자원 활동가
  • 금전 및 노력 봉사
  • 첨부: 일일하루찻집

2006

2006 05

민족학교 소식지
bilingual
4장
  • 인도적이민개혁 촉구 대행진
  • 의료보건 권익활동
  • 재정후원자
  • 세금보고
  • 봉사업무
  • 연장자를 위한 컴퓨터학당
  • 앞으로의 일정

틀:Reference